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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울산부, 김해부 등의 왜정(倭情)을 살펴 보고하는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24. 回咨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4년 2월 24일(음)(만력 22년 2월 24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보내온 자문(咨文)을 받으니, 「공무(公務)입니다. 운운」 했습니다.
 
[조선국왕] 이를 받고 살펴보건대, 소방(小邦)은 왜구의 병화를 혹독하게 입어 군병들은 죽고 토지는 황폐해졌는데, 왜적은 변경(邊境)을 점거하고서 다시 침범해 올 것을 도모하고 있으니 굶어죽은 자들이 서로를 베고서 누웠는데도 이를 구제할 방책이 없습니다. 삼가 전보(轉報)하는 사이에 일이 혹시라도 오래 지체됨이 있을까 염려스러워, 배신(陪臣) 백유함(白惟咸)을 전차(專差)하여 병력을 잔류시키고 군량을 요청하는 등의 자문을 가지고 순무(巡撫)와 순안(巡按) 두 원(院)주 001
각주 001)
순무(巡撫)와 순안(巡按)을 아울러 지칭한다. 도찰원의 직함을 겸했기 때문에 이처럼 부른다. 각각 무원(撫院), 안원(按院)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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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서둘러 가서 진정하도록 하고, 불쌍히 여겨 살펴 주심을 입어 허락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지금 받은 게첩(揭帖)과 자문에, 「무릇 왜정(倭情)에 관한 일은 자문으로 경략(經略) 고양겸(顧養謙)에게 품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소방은 예전부터 성식(聲息)에 관한 일체를 자문으로 귀사(貴司)에 보고하여 이를 근거로 전정(轉呈)하도록 해 왔습니다. 더구나 순무아문에서 또 ‘비왜군무(備倭軍務)’를 아울러 관할하게 되었음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한편으로는 경략 고양겸에게 품하고, 한편으로는 전례대로 두 원(院)에도 전정한다면 실로 더욱 편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각 배신들이 치계(馳啓)한 연해 지역의 적정(賊情)을 낱낱이 옮겨 적습니다. 본년 2월 초1일에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이 치계했습니다.
[이빈] 본년 정월 초3일 청무인(聽撫人) 개이(介伊) 등이 각각 아뢰었습니다.
[개이 등] 원래 머물고 있던 왜적의 무리는 김해부(金海府)에 500여 명, 동래현(東萊縣)과 임랑포(林郞浦)에 각 1,000여 명씩, 죽도(竹島)와 두모포(豆毛浦)에 각 5,000여 명씩, 부산포(釜山浦)와 서생포(西生浦)에 각 20,000여 명씩이었는데 모두 성채(城寨)를 건설하고 군량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으며 날마다 진(陣)을 배열하고 군사 훈련을 하면서 관백(關白)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선국왕] 이어서 본월 초3일, 본관이 치계했습니다.
[이빈] 본년 정월 19일에 체탐인(體探人) 김해준(金海俊)이 보고했습니다.
[김해준] 왜적이 웅천현(熊川縣)의 웅포(熊浦)에서 와포(窩鋪)를 추가로 조성하였고, 거제현(巨濟縣)의 칠천도(漆川島)에서는 부근 지역에 토굴을 새로 설치하고서 날로 방자하게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신병(新兵)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대대적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국왕] 또 본월 12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고언백(高彦伯)이 치계했습니다.
[고언백] 본년 정월 26일에 피로인(被擄人) 서응린(徐應麟) 등이 아뢰었습니다.
[서응린 등] 저희는 모두 울산군(蔚山郡) 사람들로 작년 12월에 왜적에게 사로잡혀 가서 서생포의 본영[老營]에서 사환을 했는데, 그러다 여러 왜적들이 “병력이 보태지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들은 장차 다시 경성(京城)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본월 내에 본영의 왜적 추장이 임랑포의 왜적 추장과 더불어 오가면서 서로 의논하고 이어서 저로 하여금 매번 서신 한 장을 가지고 경주성(慶州城) 안에 전해주게 하면서 “급히 답변을 재촉하라.”고 했습니다. 이를 받고 그대로 그들의 편지를 보니 「우리들은 영원히 거주하며 살 것이다.」라고 쓰여 있은즉, 근처의 만민(萬民)들은 올해의 농작을 우러러 기다리는데 만약 태만해져서 실패했다는 소식이 있으면 각처의 대란(大亂)을 어쩔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조선국왕] 또 본월 17일에는 전라도방어사(全羅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했습니다.
[이시언] 본년 정월 28일, 별장(別將) 한명련(韓名璉)주 002
각주 002)
한명련(韓明璉, ?~162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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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呈)을 받았습니다.
[한명련] 제가 정예병 주의수(朱義壽) 등 64명을 거느리고 몰래 김해부의 덕교(德橋)와 죽도, 웅천현의 웅포와 안골포(安骨浦) 등처에 가서 널리 정탐하였는데, 각처의 왜적들이 이전과 같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김해부 삼차아(三岔兒)의 길 옆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 100여 명을 조우하여 곧바로 차단해서 죽이고 왜적 1명을 생포하여 데려와서 역심(譯審)했습니다. 신은질이(信隱叱已)가 공술한 내용입니다.
[신은질이] 저는 일본국(日本國) 우도도(右道島) 사람으로 작년 정월에 평양성(平壤城) 안에 있다가 전투에서 패하여 웅천의 본영[老營]으로 도망쳐 돌아와서 머물렀다가 이제 붙잡혀서 오게 되었습니다. 본영의 군대는 아직 바다를 건너갈 기약이 없습니다. 12월에 천조의 장수 1원이 와서 강화(講和)를 진행하며 대명(大明)의 미소녀를 일본(日本)의 왕자(王子)와 혼인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본영의 상관은 머물면서 미소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좌도(경상좌도)와 우도(경상우도)에 나누어 주둔하는 각 진영들은 모두 의복이나 군량 등의 물건을 옮길 수 없어서 모두 본국의 접제(接濟)를 따르고 있습니다.
[조선국왕] 또 본월 19일,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권율(權慄)이 치계했습니다.
[권율] 본월 5일에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의 정을 받았습니다.
[백사림] 초탐인(哨探人) 맹수(孟守)가 고했습니다.
[맹수] 제가 바다를 멀리 바라보니, 왜적의 배 190여 척이 변경에서부터 나누어 와서 동래‧김해 등처의 물굽이[灣]에 정박했습니다. 또 김해의 죽도에 주둔하는 여러 왜적이 장차 농사를 짓고자 하여 본국의 민호(民戶)들에게 소를 내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조선국왕] 이상은 모두 긴급한 비보(飛報)이며, 소방의 존망이 여기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번거롭더라도 귀사에서는 즉시 옛 규례를 살펴서 속히 순무와 순안에게 전정하여 구원하게 해 주십시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요동도지휘사사에 보냅니다.
 
만력 22년 2월 24일.

  • 각주 001)
    순무(巡撫)와 순안(巡按)을 아울러 지칭한다. 도찰원의 직함을 겸했기 때문에 이처럼 부른다. 각각 무원(撫院), 안원(按院)이라고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한명련(韓明璉, ?~1624)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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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부, 김해부 등의 왜정(倭情)을 살펴 보고하는 조선국왕의 회자(回咨) 자료번호 : sdmg.k_0002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