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국(勿吉國)의 위치와 풍속
물길국주 001
번역주 001)
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옛날의 숙신국주 002 勿吉國 : 勿吉은 5~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북쪽 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으로, 肅愼, 挹婁의 후예, 靺鞨의 전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제3자의 판단일 뿐, 실제 계승 관계는 분명치 않다. 본전의 ‘勿吉國’이 여러 물길 부족들의 통합체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본전에서 “國有大水 … 名速末水”라고 했으므로, 물길 7부(粟末, 伯咄, 安車骨, 拂涅, 號室, 黑水, 白山) 중의 粟末部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粟末部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어 충돌이 잦았는데(『北史』 “與高麗接 … 每寇高麗”), 이는 본전에서 전하는 乙力支의 기술과도 일치한다.
번역주 002)
이다. 읍락마다 각기 수장이 있으며,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힘세고 사나워,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한데, 언어는 유독 다르다.주 003 두막루주 004 등의 나라를 항상 업신여겨,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근심거리로 여긴다. 낙[양]에서 5,000리주 005 떨어져 있다. 화룡주 006 북쪽 200여 리에 선옥산주 007이 있는데, [그] 산에서 북쪽으로 13일주 008을 가면 기려산주 009에 이른다. 다시 북쪽으로 7일을 가면 여락괴수주 010에 이르는데, 강폭은 1리쯤이다. 다시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태로수주 011에 이르고, 다시 동북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그] 나라에는 큰 강이 있는데, 너비가 3리쯤이며, 이름은 속말수주 012 肅愼國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단,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
번역주 012)
이다. 速末水 : 지금의 松花江을 지칭한다. 松花江의 歷代 名稱을 보면 漢에서 晉代까지는 弱水(『後漢書』 夫餘傳 “夫餘北有弱水” ; 『晉書』 東夷傳 “肅愼民 在不咸山北 … 北極弱水”)로 불렸고, 魏代에는 難河(『魏書』 勿吉傳 “去延興中 遣使乙力支朝獻 … 初發其國 北船溯難河西上”), 速末水로 불렸으며, 隋·唐代에는 粟末水로, 遼代에는 混同江(『契丹國志』 “黑水發源於此 舊云粟末河 太宗破晉 改爲混同江”)으로 불렸다. 金代에는 宋瓦江, 烏剌江, 白江으로 불렸으며, 明代에 이르러서야 松花江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宋瓦’나 ‘松花’는 은하수를 뜻하는 만주어 ‘松嘎里烏喇’에서 전음된 것이다.
그 땅은 낮고 습하여, 성을 쌓아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집 모양은 무덤과 같고, 출입구를 위에 두고, 사다리를 이용해 드나든다.주 013 그 나라에 소는 없고 수레와 말은 있는데, 밭을 갈 때는 [두 사람이] 짝지어 갈고,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닌다. [곡식은] 조와 보리·기장이 있고, 채소는 아욱이 있다. 물에 소금기가 있고, 소금은 나무에서 생산되며,주 014 소금기가 있는 못도 있다. 돼지는 많으나주 015 양은 없다. 쌀을 씹어 술을 빚는데주 016 마시면 많이 취할 수 있다. 부인은 베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남자는 돼지·개 가죽옷을 입는다.주 017 신혼 첫날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잡았다가 놓으면, 이로써 [혼인이] 정해지고, 이에 부부가 된다.주 018 습속에 사람의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고,주 019 머리에는 호랑이·표범의 꼬리를 꽂는다. 활사냥을 잘 하는데, 활의 길이는 3자이고, 화살 길이는 1자 2치이며,주 020 돌로 화살촉을 만든다.주 021 그 부모가 봄·여름에 죽으면 곧바로 묻고,주 022 무덤 위에 지붕을 지어 비에 젖지 않게 한다. 만약 가을·겨 울에 죽으면, 그 시신으로 담비를 포획하는데,주 023 담비가 그 육신을 뜯어먹다가 많이 잡힌다. 항상 7·8월이면 독약을 만들어 화살에 바르는데, 새나 짐승을 쏘아 맞으면 바로 죽는다. [독]약을 달일 때의 독기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주 024
번역주 024)
나라 남쪽에는 도태산주 025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황’주 026이다. 호랑이·표범·큰곰·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주 027 사람은 산에서 배변할 수 없으며, [산을] 질러갈 경우, 모두 [오물을] 물건에 담는다.주 028 勿吉人이 사냥을 할 때 毒矢를 사용한 것은 肅愼, 挹婁와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毒矢를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지역의 여러 민족에게 일반화되고 있으나, 『三國志』 挹婁傳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史料인데, 挹婁는 원래 森林地域에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毒矢가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勿吉이 毒矢를 사용한 것은 挹婁人이 毒矢를 사용하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毒矢는 『本草綱目』에 의하면 毒草類 가운데 烏頭라는 풀에서 줄기의 汁을 짜서 햇빛에 말려 사냥할 때에 이것을 화살에 발라서 쏘는데,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고 한다. 鳥頭는 滿洲와 沿海州 일대에 많이 자라는데, 勿吉人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독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三上次男, 1966).
번역주 028)
이 내용과 관련해서 『北史』 勿吉傳에서 “俗甚敬畏之 人不得山上溲汚 行經山者 以物盛去”라 하여 좀 더 자세히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전에는 언급이 없으나, 勿吉의 풍속에 徒太山을 경외하여 더럽히는 행위를 금기시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成海應의 「少華風俗攷」(『硏經齋全集外集』 卷53 故事類)에서도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확인된다. 즉 “魏書勿吉傳曰 太白有虎豹羆狼 不害人 人不得上山溲汙 太白山卽白頭山 人若汚穢 則風雲晦冥 尙今猶然”이라고 하여, 만약 그곳을 더럽히면 [산이 노하여] 곧장 바람과 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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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勿吉國 : 勿吉은 5~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북쪽 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으로, 肅愼, 挹婁의 후예, 靺鞨의 전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제3자의 판단일 뿐, 실제 계승 관계는 분명치 않다. 본전의 ‘勿吉國’이 여러 물길 부족들의 통합체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본전에서 “國有大水 … 名速末水”라고 했으므로, 물길 7부(粟末, 伯咄, 安車骨, 拂涅, 號室, 黑水, 白山) 중의 粟末部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粟末部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어 충돌이 잦았는데(『北史』 “與高麗接 … 每寇高麗”), 이는 본전에서 전하는 乙力支의 기술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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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2)
肅愼國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단,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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速末水 : 지금의 松花江을 지칭한다. 松花江의 歷代 名稱을 보면 漢에서 晉代까지는 弱水(『後漢書』 夫餘傳 “夫餘北有弱水” ; 『晉書』 東夷傳 “肅愼民 在不咸山北 … 北極弱水”)로 불렸고, 魏代에는 難河(『魏書』 勿吉傳 “去延興中 遣使乙力支朝獻 … 初發其國 北船溯難河西上”), 速末水로 불렸으며, 隋·唐代에는 粟末水로, 遼代에는 混同江(『契丹國志』 “黑水發源於此 舊云粟末河 太宗破晉 改爲混同江”)으로 불렸다. 金代에는 宋瓦江, 烏剌江, 白江으로 불렸으며, 明代에 이르러서야 松花江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宋瓦’나 ‘松花’는 은하수를 뜻하는 만주어 ‘松嘎里烏喇’에서 전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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勿吉人이 사냥을 할 때 毒矢를 사용한 것은 肅愼, 挹婁와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毒矢를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지역의 여러 민족에게 일반화되고 있으나, 『三國志』 挹婁傳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史料인데, 挹婁는 원래 森林地域에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毒矢가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勿吉이 毒矢를 사용한 것은 挹婁人이 毒矢를 사용하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毒矢는 『本草綱目』에 의하면 毒草類 가운데 烏頭라는 풀에서 줄기의 汁을 짜서 햇빛에 말려 사냥할 때에 이것을 화살에 발라서 쏘는데,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고 한다. 鳥頭는 滿洲와 沿海州 일대에 많이 자라는데, 勿吉人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독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三上次男,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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