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信檢閲月報〉(1941.2.19)
〈통신검열월보〉(1941.2.19)
해제
1941년 2월 19일, 카이펑의 하라다[原田]부대 겐죠[見城]부대, 하기와라[萩原]부대 본부의 기타호리 타카지[北堀考治]가 사이타마현[埼玉縣] 히키군[比企郡] 미야마에촌[宮前村] 오오아자하쯔오[大字初尾]에 거주하는 고바야시 키쿠노[小林キクノ]에게 보낸 편지 중 조선인 위안부 관련 내용이 검열에 걸림. 출정 후 2년 동안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다가 이 해 들어 많이 마시게 되었고 자포자기하여 2월 11일 기원절(일본 건국기념일)부터 조선 여자가 있는 전지(戰地)의 ‘P屋’에 가기 시작함. 성병에 걸렸으나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완치됨. 조선 여자를 찾지 않겠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또 찾아가 잤다는 편지의 위안부 언급 부분은 ‘삭제’됨. 1941년 하남성 개봉에 조선 위안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음.
출전 : 『鐵證如山』 10
- 비고2015년 중국 국가당안국(國家檔案局)에서 발표한 〈‘위안부’-일본군성노예당안선(“慰安婦”-日軍性奴隸檔案選)〉 제2집 ‘당시 일본 측에서 생산한 자료’ 편에 선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