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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거문도 점령에 관한 교섭의 역사

История переговоров по занятию Порта Гамильтона
  • 구분
    보고서
  • 번역·감수
    김선안, 이원용, 조재곤, 하원호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113,лл.155-156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외교(국제문제)/사회
  • 세부분류
    국제관계/언론
  • 주제어
    거문도 문제
  • 색인어
    거문도, 교섭, 역사, 〈The Japan Weekly Mail〉, 솔스뵤리, 이홍장, 라디젠스키, 오코너, 〈Japan Mail〉
  • 형태사항
    4  , 필사본  , 러시아어 
1887년 4월 30일자 〈The Japan Weekly Mail〉지의 발췌문
 
얼마 전 영국 의회에 “영국 정부의 거문도 임시 점거에 관한 서신 교환”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제출되었다. 여기에는 이 문제에 대한 교섭의 역사적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이 개관으로 볼 때 다음의 사실들은 명백하다. 1885년 4월 영국 정부는 조선 영토의 일부이자 ‘해밀턴 항’으로 알려진 이 섬들을 조선이나 청국, 일본과의 어떤 사전 협상도 없이 점령해 버렸으며, 그렇게 실제로 점령한 후에도 위 세 국가의 정부에는, (다른 열강이 이곳을 점령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자국이 그런 행보를 보였다는 식으로, 예상할 수 없는 우연에 기댄 매우 불확실한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대영제국 정부는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청국과 이 문제에 관해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으며, 조선과 청국 정부에 대한 일정한 지불을 조건으로 이 지역을 임시 점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조건은 그란빌 경과 쳉 후작이 1885년 4월 28일 체결한 협정안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청국 정부는 이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런던에 주재하는 자국 대표를 통해 이런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즉 거문도가 영국에 이양된다면 조선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겠다는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의 성명서를 볼 때, 청국 정부는 그와 같은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대영제국 정부가 이 섬들의 점령이 필요치 않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대영제국 깃발은 이미 거문도에 게양되었고, 영국인들은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뢰를 부설해 섬을 방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새 내각의 수장으로 있던 솔즈베리 경은 계속해서 합의를 시도하였고, [총리]아문이 합의에 이를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고려해 7월 7일 북경 주재 대영제국 대리공사 오코너에게 청국 정부와 협상을 재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솔즈베리 경이 말한 이 준비는 그러나 어떤 자료로도 확인된 바 없었다.
그 후로 협상은 몇 달 째(1885년 7월 13일부터 10월 14일까지) 중단되다가 1885년 10월 이홍장이 북경에 오면서 재개된다. 이홍장이 오코너와 만난 후 명백해진 사실은, 총독은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유일한 합의 수단으로 보았고, 그래서 당시 영국에서 진행된 의회 선거를 고려하여 1년 기한이 만료된 직후 대답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곳을 두고 떠나야만 한다는 데 승복한 것으로 보이는 영국 정부는 자신들의 요구를 바꾸어, 1886년에 자신들의 모든 협상에서 다음의 사항을 필수불가결한(sine qua non) 조건으로 내세우게 된다. 즉 다른 열강이 이 섬도, 전반적으로 조선 영토의 어떤 부분도 차지하지 않을 것임을 청국 측으로부터 보장 받는다는 조건이다. 이것은 따라서 조선 전체에 대한 불가침을 다루는 문제가 된다.
청국 정부는 처음에는 그런 것을 보장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곧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이홍장에게 맡긴 임무에 의거해 라디젠스키가, 영국이 거문도를 떠난다면 러시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고 무조건 약속한 덕분이다.
이것으로 협상이 종료되어, 1887년 2월 27일 영국 국기는 거문도에서 내려졌다.
〈Japan Mail〉지는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 경우 대영제국 정부가 쉽게 양보한 것은 청국-조선의 요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지역이 쓸모가 없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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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점령에 관한 교섭의 역사 자료번호 : kifr.d_0004_0210_0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