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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국(勿吉國)의 위치와 풍속

물길국주 001
번역주 001)
勿吉國 : 勿吉은 5~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북쪽 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으로, 肅愼, 挹婁의 후예, 靺鞨의 전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제3자의 판단일 뿐, 실제 계승 관계는 분명치 않다. 본전의 ‘勿吉國’이 여러 물길 부족들의 통합체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본전에서 “國有大水 … 名速末水”라고 했으므로, 물길 7부(粟末, 伯咄, 安車骨, 拂涅, 號室, 黑水, 白山) 중의 粟末部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粟末部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어 충돌이 잦았는데(『北史』 “與高麗接 … 每寇高麗”), 이는 본전에서 전하는 乙力支의 기술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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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옛날의 숙신국주 002
번역주 002)
肅愼國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단,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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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읍락마다 각기 수장이 있으며,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힘세고 사나워,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한데, 언어는 유독 다르다.주 003
번역주 003)
勿吉이 주변의 여타 ‘東夷’ 집단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종족계통일 가능성이 있다. 이에 高句麗, 夫餘 및 한반도 지역의 종족집단을 濊貊系로 보고, 반면에 肅愼에서 靺鞨로 이어지는 이 계통을 肅愼系로 분류하기도 하였다(三上次男,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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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주 004
번역주 004)
豆莫婁 : 6~8세기를 전후하여, 옛 北夫餘 지역에 존재한 나라이다. 『文獻通考』 四裔考 豆莫婁條에서는 두막루는 곧 옛 북부여라고 하였다(“豆莫婁國 … 舊北夫餘也”)라고 했으나, 그 계승 관계가 확실치는 않다. 또 『魏書』 豆莫婁傳에서는 勿吉의 북쪽 천여 리, 失韋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다(“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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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나라를 항상 업신여겨,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근심거리로 여긴다. 낙[양]에서 5,000리주 005
번역주 005)
北魏 시기 척도는 前尺, 中尺, 後尺으로 구분되는데, 본전에서 언급한 延興(471~475) 乙力支 사행연대를 감안하면, 후기에 사용한 後尺에 해당한다. 1尺=0. 296m, 1里=1,800尺이므로, 1里는 약 532.8m이며, 5,000리는 약 2,664km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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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있다. 화룡주 006
번역주 006)
和龍 : 大凌河 中流에 있는 지금의 遼寧省 朝陽市에 해당한다. ‘柳城’, ‘龍城’, ‘黃龍城’, ‘昌黎’, ‘龍山’, ‘營州’ 등으로 불렸는데, 南北朝 시기에는 前燕, 後燕, 北燕의 도성 혹은 陪都였다. 北魏는 이곳을 東北의 거점으로 삼아, 시라무렌(西拉木倫)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契丹과 경계를 마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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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200여 리에 선옥산주 007
번역주 007)
善玉山 : 지금의 遼寧省 朝陽市 북쪽 100리에 위치해 있는 大青山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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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는데, [그] 산에서 북쪽으로 13일주 008
번역주 008)
『文獻通考』 四裔考 勿吉條에는 ‘三十日’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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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면 기려산주 009
번역주 009)
祁黎山 : 遼寧과 內蒙古 접경지대의 努魯兒虎山일 것으로 추정한다. 『滿洲源流考』에서는 ‘祁黎山’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案和龍爲令土黙特右翼地 如洛瑰北史作洛懷 即老哈也 魏史所稱 皆未到勿吉國以前所經則善玉 祁黎二山 皆在今古東南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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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른다. 다시 북쪽으로 7일을 가면 여락괴수주 010
번역주 010)
如洛瓌水 : 본전의 뒷부분에 나오는 延興 年間에 乙力支의 조공 길에서 언급되고 있는 ‘洛孤水’와 같은 강으로 짐작된다. 津田左右吉은 시라무렌(西拉木倫)으로 추정하였다. 여러 문헌들에서 시라무렌을 弱洛水, 饒樂水, 澆洛水, 如洛瓌水로 다양하게 기록하였는데, 弱, 饒, 澆는 如와 같은 音이 전음된 것이다(津田左右吉,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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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는데, 강폭은 1리쯤이다. 다시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태로수주 011
번역주 011)
太魯水 : 嫩江의 지류인 지금의 洮兒河로, 內蒙古 興安盟과 吉林 서북부를 경유한다. ‘太 河’, ‘崛越河’,‘它漏河’, ‘挞鲁河’, ‘塔兒河’, ‘陀羅’, ‘陀喇’, ‘淘兒濤’. ‘桃兒’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기도 하였다. 『北史』 勿吉傳에서는 ‘太岳魯水’로 나온다. 乙力支의 朝貢路에 나오는 ‘太 河’가 바로 이 강이다. 池內宏은 太魯水를 興安嶺에서 發源하여 嫩江河流로 흘러 들어가는 洮兒河로 比定하였다(池內宏,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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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고, 다시 동북쪽으로 18일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그] 나라에는 큰 강이 있는데, 너비가 3리쯤이며, 이름은 속말수주 012
번역주 012)
速末水 : 지금의 松花江을 지칭한다. 松花江의 歷代 名稱을 보면 漢에서 晉代까지는 弱水(『後漢書』 夫餘傳 “夫餘北有弱水” ; 『晉書』 東夷傳 “肅愼民 在不咸山北 … 北極弱水”)로 불렸고, 魏代에는 難河(『魏書』 勿吉傳 “去延興中 遣使乙力支朝獻 … 初發其國 北船溯難河西上”), 速末水로 불렸으며, 隋·唐代에는 粟末水로, 遼代에는 混同江(『契丹國志』 “黑水發源於此 舊云粟末河 太宗破晉 改爲混同江”)으로 불렸다. 金代에는 宋瓦江, 烏剌江, 白江으로 불렸으며, 明代에 이르러서야 松花江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宋瓦’나 ‘松花’는 은하수를 뜻하는 만주어 ‘松嘎里烏喇’에서 전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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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 땅은 낮고 습하여, 성을 쌓아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집 모양은 무덤과 같고, 출입구를 위에 두고, 사다리를 이용해 드나든다.주 013
번역주 013)
『三國志』, 『後漢書』의 挹婁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극심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땅을 파고 혈거하는데, 깊은 것일수록 좋으며, 좋은 집은 사다리 9개를 이용해서 진입한다고 전한다(『三國志』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後漢書』 “處於山林之閒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1973년에 黑龍江省 綏濱縣 黑龍江 南岸의 同仁遺蹟에서 주거유적 3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F3 유구가 北朝 말기 勿吉의 주거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楊虎·譚英傑·林秀貞,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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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 소는 없고 수레와 말은 있는데, 밭을 갈 때는 [두 사람이] 짝지어 갈고,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닌다. [곡식은] 조와 보리·기장이 있고, 채소는 아욱이 있다. 물에 소금기가 있고, 소금은 나무에서 생산되며,주 014
번역주 014)
木鹽樹를 말한다. 이 樹種은 黑龍江과 吉林省 접경지대에 분포해 있는데, 여름철에 배출된 樹液이 마르면 소금이 된다. 따라서 『北史』 勿吉傳에서는 “生鹽於木皮之上”이라 하여 나무껍질에서 소금이 난다고 하였다. 또 『新唐書』 靺鞨傳에서 “有鹽泉 氣蒸薄 鹽凝樹顚”이라고 하여, 소금이 나는 특이한 수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소금기가 있는 물이 증발하여 나뭇가지에 염분이 생겨난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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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기가 있는 못도 있다. 돼지는 많으나주 015
번역주 015)
『三國志』에서는 읍루인이 돼지 키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돼지를 衣, 食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其俗好養豬 食其肉 衣其皮 冬以豬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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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 없다. 쌀을 씹어 술을 빚는데주 016
번역주 016)
씹어서 술을 빚는 방식을 ‘嚼酒’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침(saliva)의 효소를 이용해 발효시키는 술 양조법이다. 작주 전통은 중국 동북 지역과 대만, 일본의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 태평양 연안 일대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凌純聲,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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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면 많이 취할 수 있다. 부인은 베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남자는 돼지·개 가죽옷을 입는다.주 017
번역주 017)
『北史』 勿吉傳에는 문장의 앞에 ‘婚嫁’라는 2字가 더 있는데, 이를 혼인할 때 복식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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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첫날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잡았다가 놓으면, 이로써 [혼인이] 정해지고, 이에 부부가 된다.주 018
번역주 018)
남자가 여자의 유방을 잡아보는 것은 多産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북방 퉁구스(Tungus) 사회에서는 여성에게서 중요한 것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 즉,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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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속에 사람의 오줌으로 손과 얼굴을 씻고,주 019
번역주 019)
소변을 사용하여 세척하는 풍속은 3~8세기에 걸쳐 挹婁, 勿吉, 靺鞨의 여러 종족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그러한 풍속은 오늘날도 길랴크족(Gilyak)과 관계가 깊은 북극 연안의 주민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풍속에 대해, 중원 지역의 기록자는 “於諸夷最爲不潔”(『北史』 勿吉傳)이라 하여, 아주 불결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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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호랑이·표범의 꼬리를 꽂는다. 활사냥을 잘 하는데, 활의 길이는 3자이고, 화살 길이는 1자 2치이며,주 020
번역주 020)
『國語』 魯語下에서 肅愼의 화살 길이를 ‘1자 8치(尺有咫)’라 했고, 『三國志』에서는 挹婁人들이 사용한 활과 화살의 크기를 각각 ‘4尺’, ‘尺8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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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화살촉을 만든다.주 021
번역주 021)
『三國志』에서는 挹婁人들이 ‘青石’이라는 돌로 화살촉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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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모가 봄·여름에 죽으면 곧바로 묻고,주 022
번역주 022)
『北史』 獠傳의 “죽으면 관을 세워 매장한다(死者 豎棺而埋之).”는 기록을 근거로, 원문의 ‘立’字를 ‘세우다’는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 북방 지역에서 시신을 세워서 묻는 풍속이 문헌이나 고고학 발견을 통해 밝혀진 바는 없다. 봄·여름과 가을·겨울을 구분할 서술 형태로 본다면, 시신을 담비포획에 활용하지 않는 봄·여름에는 ‘곧바로’ 매장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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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위에 지붕을 지어 비에 젖지 않게 한다. 만약 가을·겨 울에 죽으면, 그 시신으로 담비를 포획하는데,주 023
번역주 023)
『三國志』에서는 挹婁人들이 담비 사냥을 좋아하였다고 전한다(“好貂 今所謂挹婁貂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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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비가 그 육신을 뜯어먹다가 많이 잡힌다. 항상 7·8월이면 독약을 만들어 화살에 바르는데, 새나 짐승을 쏘아 맞으면 바로 죽는다. [독]약을 달일 때의 독기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주 024
번역주 024)
勿吉人이 사냥을 할 때 毒矢를 사용한 것은 肅愼, 挹婁와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毒矢를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지역의 여러 민족에게 일반화되고 있으나, 『三國志』 挹婁傳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史料인데, 挹婁는 원래 森林地域에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毒矢가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勿吉이 毒矢를 사용한 것은 挹婁人이 毒矢를 사용하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毒矢는 『本草綱目』에 의하면 毒草類 가운데 烏頭라는 풀에서 줄기의 汁을 짜서 햇빛에 말려 사냥할 때에 이것을 화살에 발라서 쏘는데,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고 한다. 鳥頭는 滿洲와 沿海州 일대에 많이 자라는데, 勿吉人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독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三上次男,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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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남쪽에는 도태산주 025
번역주 025)
徒太山 : 徒太山을 현재의 ‘白頭山’에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인데, 중국에서는 遼·金 이래 淸代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長白山’으로 부르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5~6세기 勿吉의 중심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吉林省과 黑龍江省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張廣才嶺 중심의 大禿頂子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김락기, 2009). 『北史』 및 『太平御覽』 卷784 四夷部5 所引 『後魏書』에는 ‘從太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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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황’주 026
번역주 026)
太皇 : 『위서』 급고각본·백납본에는 ‘太白’으로 되어 있지만, 남감본·무영전본과 『북사』·『太平御覽』 卷784 四夷部5 所引 『後魏書』에는 ‘太皇’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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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호랑이·표범·큰곰·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주 027
번역주 027)
『北史』 勿吉傳에서는 “산 위에 곰·큰곰·표범·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 역시 감히 [이들 짐승을] 죽이지 못한다(上有熊羆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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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산에서 배변할 수 없으며, [산을] 질러갈 경우, 모두 [오물을] 물건에 담는다.주 028
번역주 028)
이 내용과 관련해서 『北史』 勿吉傳에서 “俗甚敬畏之 人不得山上溲汚 行經山者 以物盛去”라 하여 좀 더 자세히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전에는 언급이 없으나, 勿吉의 풍속에 徒太山을 경외하여 더럽히는 행위를 금기시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成海應의 「少華風俗攷」(『硏經齋全集外集』 卷53 故事類)에서도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확인된다. 즉 “魏書勿吉傳曰 太白有虎豹羆狼 不害人 人不得上山溲汙 太白山卽白頭山 人若汚穢 則風雲晦冥 尙今猶然”이라고 하여, 만약 그곳을 더럽히면 [산이 노하여] 곧장 바람과 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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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勿吉國 : 勿吉은 5~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북쪽 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으로, 肅愼, 挹婁의 후예, 靺鞨의 전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제3자의 판단일 뿐, 실제 계승 관계는 분명치 않다. 본전의 ‘勿吉國’이 여러 물길 부족들의 통합체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본전에서 “國有大水 … 名速末水”라고 했으므로, 물길 7부(粟末, 伯咄, 安車骨, 拂涅, 號室, 黑水, 白山) 중의 粟末部를 지칭할 가능성이 있다. 粟末部는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어 충돌이 잦았는데(『北史』 “與高麗接 … 每寇高麗”), 이는 본전에서 전하는 乙力支의 기술과도 일치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肅愼國 : 숙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竹書紀年』의 “帝舜二十五年 息愼來朝 貢弓矢”이다. 『史記』 卷1, 五帝本紀 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고 하여 여기서의 息愼이 곧 肅愼의 이칭임을 알 수 있다. 단, 先秦 시기의 숙신은 그 위치가 동방인지, 북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에 대해 肅愼·息愼 혹은 稷愼 등은 고대 중국인들이 중국의 북방 혹은 동북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保井克己, 1982). 더욱이 주 성왕 이후 후한대까지 숙신의 공헌기록이 보이지 않아, 후한대까지는 숙신을 특정 주민집단과 연결시키는 인식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沈一民, 2009). 한편,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숙신과 관련된 挹婁의 열전이 등장하여, 3세기에는 숙신이라는 이름이 이미 읍루로 대체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周代에는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曹魏와 고구려의 전쟁 이후 이 지방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때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집단을 肅愼 대신 挹婁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池內宏은 중국 古典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三國時代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挹婁가 마침 楛矢·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挹婁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池內宏, 1951). 이후 『宋書』와 『晉書』, 『北齊書』 등의 중국 정사와 『三國史記』, 〈광개토왕비〉 등의 국내 사료에서도 숙신의 명칭이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勿吉이 주변의 여타 ‘東夷’ 집단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종족계통일 가능성이 있다. 이에 高句麗, 夫餘 및 한반도 지역의 종족집단을 濊貊系로 보고, 반면에 肅愼에서 靺鞨로 이어지는 이 계통을 肅愼系로 분류하기도 하였다(三上次男, 1966).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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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豆莫婁 : 6~8세기를 전후하여, 옛 北夫餘 지역에 존재한 나라이다. 『文獻通考』 四裔考 豆莫婁條에서는 두막루는 곧 옛 북부여라고 하였다(“豆莫婁國 … 舊北夫餘也”)라고 했으나, 그 계승 관계가 확실치는 않다. 또 『魏書』 豆莫婁傳에서는 勿吉의 북쪽 천여 리, 失韋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다(“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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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魏 시기 척도는 前尺, 中尺, 後尺으로 구분되는데, 본전에서 언급한 延興(471~475) 乙力支 사행연대를 감안하면, 후기에 사용한 後尺에 해당한다. 1尺=0. 296m, 1里=1,800尺이므로, 1里는 약 532.8m이며, 5,000리는 약 2,664km에 해당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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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和龍 : 大凌河 中流에 있는 지금의 遼寧省 朝陽市에 해당한다. ‘柳城’, ‘龍城’, ‘黃龍城’, ‘昌黎’, ‘龍山’, ‘營州’ 등으로 불렸는데, 南北朝 시기에는 前燕, 後燕, 北燕의 도성 혹은 陪都였다. 北魏는 이곳을 東北의 거점으로 삼아, 시라무렌(西拉木倫)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契丹과 경계를 마주하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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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玉山 : 지금의 遼寧省 朝陽市 북쪽 100리에 위치해 있는 大青山으로 보기도 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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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獻通考』 四裔考 勿吉條에는 ‘三十日’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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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祁黎山 : 遼寧과 內蒙古 접경지대의 努魯兒虎山일 것으로 추정한다. 『滿洲源流考』에서는 ‘祁黎山’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案和龍爲令土黙特右翼地 如洛瑰北史作洛懷 即老哈也 魏史所稱 皆未到勿吉國以前所經則善玉 祁黎二山 皆在今古東南境”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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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如洛瓌水 : 본전의 뒷부분에 나오는 延興 年間에 乙力支의 조공 길에서 언급되고 있는 ‘洛孤水’와 같은 강으로 짐작된다. 津田左右吉은 시라무렌(西拉木倫)으로 추정하였다. 여러 문헌들에서 시라무렌을 弱洛水, 饒樂水, 澆洛水, 如洛瓌水로 다양하게 기록하였는데, 弱, 饒, 澆는 如와 같은 音이 전음된 것이다(津田左右吉, 1915).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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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魯水 : 嫩江의 지류인 지금의 洮兒河로, 內蒙古 興安盟과 吉林 서북부를 경유한다. ‘太 河’, ‘崛越河’,‘它漏河’, ‘挞鲁河’, ‘塔兒河’, ‘陀羅’, ‘陀喇’, ‘淘兒濤’. ‘桃兒’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기도 하였다. 『北史』 勿吉傳에서는 ‘太岳魯水’로 나온다. 乙力支의 朝貢路에 나오는 ‘太 河’가 바로 이 강이다. 池內宏은 太魯水를 興安嶺에서 發源하여 嫩江河流로 흘러 들어가는 洮兒河로 比定하였다(池內宏, 1951).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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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速末水 : 지금의 松花江을 지칭한다. 松花江의 歷代 名稱을 보면 漢에서 晉代까지는 弱水(『後漢書』 夫餘傳 “夫餘北有弱水” ; 『晉書』 東夷傳 “肅愼民 在不咸山北 … 北極弱水”)로 불렸고, 魏代에는 難河(『魏書』 勿吉傳 “去延興中 遣使乙力支朝獻 … 初發其國 北船溯難河西上”), 速末水로 불렸으며, 隋·唐代에는 粟末水로, 遼代에는 混同江(『契丹國志』 “黑水發源於此 舊云粟末河 太宗破晉 改爲混同江”)으로 불렸다. 金代에는 宋瓦江, 烏剌江, 白江으로 불렸으며, 明代에 이르러서야 松花江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宋瓦’나 ‘松花’는 은하수를 뜻하는 만주어 ‘松嘎里烏喇’에서 전음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三國志』, 『後漢書』의 挹婁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극심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땅을 파고 혈거하는데, 깊은 것일수록 좋으며, 좋은 집은 사다리 9개를 이용해서 진입한다고 전한다(『三國志』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後漢書』 “處於山林之閒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1973년에 黑龍江省 綏濱縣 黑龍江 南岸의 同仁遺蹟에서 주거유적 3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F3 유구가 北朝 말기 勿吉의 주거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楊虎·譚英傑·林秀貞, 2006).바로가기
  • 번역주 014)
    木鹽樹를 말한다. 이 樹種은 黑龍江과 吉林省 접경지대에 분포해 있는데, 여름철에 배출된 樹液이 마르면 소금이 된다. 따라서 『北史』 勿吉傳에서는 “生鹽於木皮之上”이라 하여 나무껍질에서 소금이 난다고 하였다. 또 『新唐書』 靺鞨傳에서 “有鹽泉 氣蒸薄 鹽凝樹顚”이라고 하여, 소금이 나는 특이한 수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소금기가 있는 물이 증발하여 나뭇가지에 염분이 생겨난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三國志』에서는 읍루인이 돼지 키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돼지를 衣, 食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其俗好養豬 食其肉 衣其皮 冬以豬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바로가기
  • 번역주 016)
    씹어서 술을 빚는 방식을 ‘嚼酒’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침(saliva)의 효소를 이용해 발효시키는 술 양조법이다. 작주 전통은 중국 동북 지역과 대만, 일본의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 태평양 연안 일대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凌純聲, 1957).바로가기
  • 번역주 017)
    『北史』 勿吉傳에는 문장의 앞에 ‘婚嫁’라는 2字가 더 있는데, 이를 혼인할 때 복식이라고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남자가 여자의 유방을 잡아보는 것은 多産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북방 퉁구스(Tungus) 사회에서는 여성에게서 중요한 것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 즉,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소변을 사용하여 세척하는 풍속은 3~8세기에 걸쳐 挹婁, 勿吉, 靺鞨의 여러 종족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그러한 풍속은 오늘날도 길랴크족(Gilyak)과 관계가 깊은 북극 연안의 주민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풍속에 대해, 중원 지역의 기록자는 “於諸夷最爲不潔”(『北史』 勿吉傳)이라 하여, 아주 불결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國語』 魯語下에서 肅愼의 화살 길이를 ‘1자 8치(尺有咫)’라 했고, 『三國志』에서는 挹婁人들이 사용한 활과 화살의 크기를 각각 ‘4尺’, ‘尺8寸’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三國志』에서는 挹婁人들이 ‘青石’이라는 돌로 화살촉을 만들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北史』 獠傳의 “죽으면 관을 세워 매장한다(死者 豎棺而埋之).”는 기록을 근거로, 원문의 ‘立’字를 ‘세우다’는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 북방 지역에서 시신을 세워서 묻는 풍속이 문헌이나 고고학 발견을 통해 밝혀진 바는 없다. 봄·여름과 가을·겨울을 구분할 서술 형태로 본다면, 시신을 담비포획에 활용하지 않는 봄·여름에는 ‘곧바로’ 매장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三國志』에서는 挹婁人들이 담비 사냥을 좋아하였다고 전한다(“好貂 今所謂挹婁貂是也”).바로가기
  • 번역주 024)
    勿吉人이 사냥을 할 때 毒矢를 사용한 것은 肅愼, 挹婁와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毒矢를 사용하는 방법은 북방 지역의 여러 민족에게 일반화되고 있으나, 『三國志』 挹婁傳의 기사가 가장 오래된 史料인데, 挹婁는 원래 森林地域에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수렵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毒矢가 발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勿吉이 毒矢를 사용한 것은 挹婁人이 毒矢를 사용하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毒矢는 『本草綱目』에 의하면 毒草類 가운데 烏頭라는 풀에서 줄기의 汁을 짜서 햇빛에 말려 사냥할 때에 이것을 화살에 발라서 쏘는데,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고 한다. 鳥頭는 滿洲와 沿海州 일대에 많이 자라는데, 勿吉人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독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三上次男, 1966).바로가기
  • 번역주 025)
    徒太山 : 徒太山을 현재의 ‘白頭山’에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인데, 중국에서는 遼·金 이래 淸代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長白山’으로 부르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5~6세기 勿吉의 중심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吉林省과 黑龍江省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張廣才嶺 중심의 大禿頂子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김락기, 2009). 『北史』 및 『太平御覽』 卷784 四夷部5 所引 『後魏書』에는 ‘從太山’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太皇 : 『위서』 급고각본·백납본에는 ‘太白’으로 되어 있지만, 남감본·무영전본과 『북사』·『太平御覽』 卷784 四夷部5 所引 『後魏書』에는 ‘太皇’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北史』 勿吉傳에서는 “산 위에 곰·큰곰·표범·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 역시 감히 [이들 짐승을] 죽이지 못한다(上有熊羆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라고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이 내용과 관련해서 『北史』 勿吉傳에서 “俗甚敬畏之 人不得山上溲汚 行經山者 以物盛去”라 하여 좀 더 자세히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전에는 언급이 없으나, 勿吉의 풍속에 徒太山을 경외하여 더럽히는 행위를 금기시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成海應의 「少華風俗攷」(『硏經齋全集外集』 卷53 故事類)에서도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확인된다. 즉 “魏書勿吉傳曰 太白有虎豹羆狼 不害人 人不得上山溲汙 太白山卽白頭山 人若汚穢 則風雲晦冥 尙今猶然”이라고 하여, 만약 그곳을 더럽히면 [산이 노하여] 곧장 바람과 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진다고 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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