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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고구려로 도망간 문통(文通) 사건으로 고구려를 토벌하려고 함

그 후, 공물과 사신이 자주 왕래하여, 해마다 황금 200근, 백은 400근을 바쳤다.주 001
번역주 001)
北魏 초기 1斤은 현재의 220g에 해당했으나, 중기에 이르러서는 400g 전후였으며, 孝文帝 도량형 개혁 이후에는 440g으로 고정되었다. 해당 기사의 내용이 대략 430년대를 반영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계산해보면, 황금 200근은 약 80~88kg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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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풍문통(馮弘, ?~438)주 002
번역주 002)
馮文通 : 文通은 北燕의 마지막 군주 昭成皇帝 馮弘의 字이다. 그는 長樂 信都(지금의 河北省 冀州) 출신으로, 北燕 太祖 馮跋의 동생이다. 풍발이 사망하자 태자 馮翼을 제거하고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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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주 003
번역주 003)
太興 2年(432)에 北魏 太武帝 拓跋燾가 친히 북연 정벌에 나서자, 營丘, 遼東, 成周, 樂浪, 帶方, 玄菟 등 여섯 郡이 항복하였다. 太興 6年(436)에 북위가 다시 공격해오자 풍홍은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출병하여 풍홍을 비롯한 북연의 백성을 대거 고구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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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산기상시주 004
번역주 004)
散騎常侍 : 北魏代에는 集書省에 소속되어 圖書와 文翰을 담당하였다. 2品下이었다가, 太和 末에 從3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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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발을 파견하여 련에게 조서를 내려 [풍]문통을 보낼 것을 명하였는데, 련은 글을 올려 [풍]문통과 더불어 왕화를 받들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보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들을 토벌하러 가려고 하였으나, 낙평왕 [탁발]비(?~444)주 005
번역주 005)
拓跋丕 : 北魏 明元帝(太宗) 拓跋嗣의 차남으로, 太武帝(世祖) 拓跋燾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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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기다렸다가 훗날에 거병할 것을 의논하니, 세조가 이에 그만 두었다.주 006
번역주 006)
『魏書』 卷17, 列傳5, 樂平王에서는 丕의 간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丕上疏 以爲和龍新定 宜優復之 使廣修農殖 以饒軍實 然後進圖 可一舉而滅 帝納之 乃止” 또 『資治通鑑』 卷123, 宋紀5, 文帝元嘉13年(436) 9月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高麗不送燕王於魏 遣使奉表 稱當與馮弘俱奉王化 魏主以高麗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騎卒 劉絜曰 秦·隴新民 且當優復 俟其饒實 然後用之 樂平王丕曰 和龍新定 宜廣修農桑以豐軍實 然後進取 則高麗一擧可滅也 魏主乃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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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통 역시 얼마 후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번역주 001)
    北魏 초기 1斤은 현재의 220g에 해당했으나, 중기에 이르러서는 400g 전후였으며, 孝文帝 도량형 개혁 이후에는 440g으로 고정되었다. 해당 기사의 내용이 대략 430년대를 반영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계산해보면, 황금 200근은 약 80~88kg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馮文通 : 文通은 北燕의 마지막 군주 昭成皇帝 馮弘의 字이다. 그는 長樂 信都(지금의 河北省 冀州) 출신으로, 北燕 太祖 馮跋의 동생이다. 풍발이 사망하자 태자 馮翼을 제거하고 즉위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太興 2年(432)에 北魏 太武帝 拓跋燾가 친히 북연 정벌에 나서자, 營丘, 遼東, 成周, 樂浪, 帶方, 玄菟 등 여섯 郡이 항복하였다. 太興 6年(436)에 북위가 다시 공격해오자 풍홍은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출병하여 풍홍을 비롯한 북연의 백성을 대거 고구려로 옮겼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散騎常侍 : 北魏代에는 集書省에 소속되어 圖書와 文翰을 담당하였다. 2品下이었다가, 太和 末에 從3品이 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拓跋丕 : 北魏 明元帝(太宗) 拓跋嗣의 차남으로, 太武帝(世祖) 拓跋燾의 동생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魏書』 卷17, 列傳5, 樂平王에서는 丕의 간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丕上疏 以爲和龍新定 宜優復之 使廣修農殖 以饒軍實 然後進圖 可一舉而滅 帝納之 乃止” 또 『資治通鑑』 卷123, 宋紀5, 文帝元嘉13年(436) 9月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高麗不送燕王於魏 遣使奉表 稱當與馮弘俱奉王化 魏主以高麗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騎卒 劉絜曰 秦·隴新民 且當優復 俟其饒實 然後用之 樂平王丕曰 和龍新定 宜廣修農桑以豐軍實 然後進取 則高麗一擧可滅也 魏主乃止”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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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로 도망간 문통(文通) 사건으로 고구려를 토벌하려고 함 자료번호 : jd.k_0010_0100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