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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敖)가 평양성을 다녀와 고구려의 풍속 및 제도에 대해 보고함

[이]오가 그 나라의 도읍인 평양성주 001
번역주 001)
平壤城 : 현재 평양시 동북쪽의 大城山城과 安鶴宮, 청암리토성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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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그 나라의 일을 살피고 [귀국하여] 말하였다. “[평양성은]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책성주 002
번역주 002)
柵城 : 『三國史記』는 太祖大王 46년에 王이 東쪽으로 柵城을 순수하였다고 하였다. 일찍부터 동쪽 변경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 시기 책성을 어느 성에 비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吉林省 圖們市 城子山山城(河龍古城 등을 포함)·琿春市 薩其城·溫特赫部城의 3곳이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朴眞奭, 1985 ; 嚴長錄·鄭永振, 1989 ; 李宗勛,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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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에 이르며, 북쪽은 옛 부여에 이른다.주 003
번역주 003)
『周書』 高麗傳에서는 고구려 북쪽 경계에 대해 “北隣靺鞨千餘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舊夫餘’란 부여 초기 중심지인 현재 吉林省 吉林市 일대일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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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수는 전위(조위) 시기보다 3배이다. 그 땅은 동서 2,000여 리이고 남북 1,000여 리이다. 민은 모두 토착하여 산과 계곡을 따라 거주하고, 삼베와 비단 및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토지가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로는 스스로 공급하기에 부족하므로 그 [나라] 사람들은 마시고 먹는 것을 절약한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하며 밤이면 남녀가 무리지어 어울려 논다. 귀천의 등급이 없으나, 각자 신분에 걸맞은 도의를 지켜 스스로 좋아한다.주 004
번역주 004)
원문의 “潔淨自喜”는 『孟子』 萬章 上의 “歸潔其身而已矣”에서 나온 표현으로, 스스로 고결함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즉 귀천의 구별이 없이 어울리기는 하나, 각자 신분에 걸맞은 도의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 비슷한 의미로 ‘潔身自好’가 있으며, 반대 의미로는 ‘同流合汚’라는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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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은 궁실 꾸미기를 좋아한다.주 005
번역주 005)
이상의 고구려 풍속에 관한 언급은 3세기에 찬술된 『三國志』 高句麗傳에 수록된 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평양으로 천도한 후이고, 사신이 國內城이 아니라 평양성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본전의 기술자가 앞선 문헌의 내용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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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관명에는 알사주 006
번역주 006)
謁奢 : 『翰苑』 所引 『高麗記』에 의하면, 謁奢는 正三品에 비견되는 大夫使者의 이칭이다. 한편, ‘大夫使者’는 『周書』, 『隋書』, 『北史』, 『新唐書』 등에 나오는 ‘太大使者’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9). 『통전』과 『태평환우기』에는 ‘太大夫使者’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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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주 007
번역주 007)
太奢 : 『翰苑』 所引 『高麗記』에 의하면, 正四品에 비견되는 大使者를 일명 大奢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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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주 008
번역주 008)
大兄 : 『翰苑』 所引 『高麗記』에는 正五品에 비견되는 大兄加가 나오며, 일명 纈支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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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주 009
번역주 009)
小兄 : 『翰苑』 所引 『高麗記』에 의하면, 小兄은 正七品에 비견되고 일명 失支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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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호가 있다.주 010
번역주 010)
고구려 官에 대해 『魏書』에서 전하는 내용은 앞서 『三國志』와 『後漢書』에서 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며, 이후의 사서들에서 볼 수 있는 관명이 처음 등장한다. 단, 사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翰苑』 所引 『高麗記』에서는 9등으로 설명하는 반면, 『周書』에서는 13등으로, 『舊唐書』·『新唐書』에서는 12등으로 설명한다. 한편, 『魏書』에 나오는 謁奢(太大使者)·太奢(大使者)·大兄·小兄은 모든 사서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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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절풍주 011
번역주 011)
折風 : 절풍은 고구려 고유의 冠帽이다.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에는 “其小加著折風 形如弁”이라는 기록이 있어, 小加들이 쓰던 것으로 전한다. 李白의 詩 「高句驪」에도 ‘金花折風帽’라는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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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쓰니, 그 모양이 변과 비슷하며, 옆에 새의 깃을 꽂는데, 귀천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주 012
번역주 012)
鳥羽冠에 관해서는 『周書』 卷49, 列傳41, 異域上, 高麗의 “其冠曰骨蘇多以紫羅爲之 雜以金銀爲飾 其有官品者 又揷二鳥羽於其上以顯異之”라는 기록, 『隋書』 卷81, 列傳46, 東夷, 高麗의 “人皆皮冠使人加揷鳥羽 貴者冠用紫羅 飾以金銀”이라는 기록, 『北史』 卷94, 列傳82, 高麗의 “士人加揷二鳥羽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二鳥羽”라는 기록,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高麗의 “次以緋羅 揷二鳥羽及金銀爲飾”이라는 기록 등이 있다.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5세기에 조영된 무용총 벽화의 「狩獵圖」와 쌍영총 벽화의 「騎馬人物圖」 등에 묘사된 인물 가운데 頭飾에 새의 깃털을 꽂은 모습이 확인되고, 唐代 閻立本의 「王會圖」에도 고구려 사신이 착용한 ‘鳥羽冠’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중국의 경우, 秦漢 시기 武官이 착용한 ‘鶡冠’에도 좌우에 꿩(鶡)의 깃털을 꽂아 용맹함을 나타내기도 하였다(『後漢書』 志30, 輿服下 “武冠 俗謂之大冠 環纓無蕤 以青系爲緄 加雙鶡尾 豎左右 爲鶡冠云 五官 左右虎賁 羽林 五中郞將 羽林左右監皆冠鶡冠 紗縠單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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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있을 때는 뒷짐을 지고, 꿇어 앉아 절할 때는 다리 하나를 폈으며,주 013
번역주 013)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跪拜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고, 『後漢書』 卷85, 高句驪에는 “跪拜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다. ‘펴다(申)’와 ‘끌다(曳)’의 차이인데, 자형이 유사한 데서 비롯된 오사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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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는 달리듯 빨리 간다.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나라 안에 크게 모인다. 그 공회에서는 모두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꾸몄다.주 014
번역주 014)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 金銀以自飾”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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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터 앉기주 015
번역주 015)
蹲踞 : 蹲踞는 정좌하지 않고 걸터앉는 것이다. 『淮南子』 說山訓의 “以非義爲義 以非禮爲禮 譬犹倮走而狂人 盗財而予乞者 窃簡而寫法律 蹲踞而誦詩書”라는 기록과 『周書』 于翼傳의 “狄人雖蹲踞無節 然咸憚翼之禮法 莫敢違犯”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蹲踞는 非漢人의 무례한 행동거지로 평가된다. 일본 古墳時代의 埴輪 토기 가운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댄 자세를 표현한 토기를 근거로 하여 蹲踞를 ‘양 무릎을 꿇고 허리를 낮추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井上秀雄,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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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좋아한다. 식사에 조궤주 016
번역주 016)
俎几 : 제사나 燕饗 때 사용하는 禮器이다. 한편,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夫餘에는 “食飮皆用俎豆”라는 기록이 있고,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는 “東夷飮食類皆用俎豆”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俎豆’는 단지 제기만을 뜻하지 않고, 禮文과 儀式에 관한 규범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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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한다. 키가 석 자 되는 말이 나는데, 옛날 주몽이 탔던 [말]이라고 하니, [그] 말의 종자가 곧 과하[마]주 017
번역주 017)
果下馬 :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濊에 ‘果下馬’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裵松之가 주석을 붙여, “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故謂之果下”라고 하였다. 또 「魏都賦」에도 “馳道周屈於果下”라는 기록이 있는데, 劉逵의 「魏都賦注」에서 이르기를 “漢廐 舊有樂浪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明 黃洪憲 朝鮮國紀云 產果下馬 長尾雞 貂豽 海豹皮 姜西溟曰 定張車 果下馬 皆宮內所用”이라고 하였다. 단, 果下馬와 주몽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은 『위서』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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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 번역주 001)
    平壤城 : 현재 평양시 동북쪽의 大城山城과 安鶴宮, 청암리토성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柵城 : 『三國史記』는 太祖大王 46년에 王이 東쪽으로 柵城을 순수하였다고 하였다. 일찍부터 동쪽 변경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 시기 책성을 어느 성에 비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吉林省 圖們市 城子山山城(河龍古城 등을 포함)·琿春市 薩其城·溫特赫部城의 3곳이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朴眞奭, 1985 ; 嚴長錄·鄭永振, 1989 ; 李宗勛, 1999).바로가기
  • 번역주 003)
    『周書』 高麗傳에서는 고구려 북쪽 경계에 대해 “北隣靺鞨千餘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舊夫餘’란 부여 초기 중심지인 현재 吉林省 吉林市 일대일 것으로 짐작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원문의 “潔淨自喜”는 『孟子』 萬章 上의 “歸潔其身而已矣”에서 나온 표현으로, 스스로 고결함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즉 귀천의 구별이 없이 어울리기는 하나, 각자 신분에 걸맞은 도의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 비슷한 의미로 ‘潔身自好’가 있으며, 반대 의미로는 ‘同流合汚’라는 표현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이상의 고구려 풍속에 관한 언급은 3세기에 찬술된 『三國志』 高句麗傳에 수록된 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평양으로 천도한 후이고, 사신이 國內城이 아니라 평양성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본전의 기술자가 앞선 문헌의 내용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謁奢 : 『翰苑』 所引 『高麗記』에 의하면, 謁奢는 正三品에 비견되는 大夫使者의 이칭이다. 한편, ‘大夫使者’는 『周書』, 『隋書』, 『北史』, 『新唐書』 등에 나오는 ‘太大使者’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武田幸男, 1989). 『통전』과 『태평환우기』에는 ‘太大夫使者’가 나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太奢 : 『翰苑』 所引 『高麗記』에 의하면, 正四品에 비견되는 大使者를 일명 大奢라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大兄 : 『翰苑』 所引 『高麗記』에는 正五品에 비견되는 大兄加가 나오며, 일명 纈支라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小兄 : 『翰苑』 所引 『高麗記』에 의하면, 小兄은 正七品에 비견되고 일명 失支라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고구려 官에 대해 『魏書』에서 전하는 내용은 앞서 『三國志』와 『後漢書』에서 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며, 이후의 사서들에서 볼 수 있는 관명이 처음 등장한다. 단, 사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翰苑』 所引 『高麗記』에서는 9등으로 설명하는 반면, 『周書』에서는 13등으로, 『舊唐書』·『新唐書』에서는 12등으로 설명한다. 한편, 『魏書』에 나오는 謁奢(太大使者)·太奢(大使者)·大兄·小兄은 모든 사서에 등장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折風 : 절풍은 고구려 고유의 冠帽이다.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에는 “其小加著折風 形如弁”이라는 기록이 있어, 小加들이 쓰던 것으로 전한다. 李白의 詩 「高句驪」에도 ‘金花折風帽’라는 언급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鳥羽冠에 관해서는 『周書』 卷49, 列傳41, 異域上, 高麗의 “其冠曰骨蘇多以紫羅爲之 雜以金銀爲飾 其有官品者 又揷二鳥羽於其上以顯異之”라는 기록, 『隋書』 卷81, 列傳46, 東夷, 高麗의 “人皆皮冠使人加揷鳥羽 貴者冠用紫羅 飾以金銀”이라는 기록, 『北史』 卷94, 列傳82, 高麗의 “士人加揷二鳥羽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二鳥羽”라는 기록,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高麗의 “次以緋羅 揷二鳥羽及金銀爲飾”이라는 기록 등이 있다.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5세기에 조영된 무용총 벽화의 「狩獵圖」와 쌍영총 벽화의 「騎馬人物圖」 등에 묘사된 인물 가운데 頭飾에 새의 깃털을 꽂은 모습이 확인되고, 唐代 閻立本의 「王會圖」에도 고구려 사신이 착용한 ‘鳥羽冠’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중국의 경우, 秦漢 시기 武官이 착용한 ‘鶡冠’에도 좌우에 꿩(鶡)의 깃털을 꽂아 용맹함을 나타내기도 하였다(『後漢書』 志30, 輿服下 “武冠 俗謂之大冠 環纓無蕤 以青系爲緄 加雙鶡尾 豎左右 爲鶡冠云 五官 左右虎賁 羽林 五中郞將 羽林左右監皆冠鶡冠 紗縠單衣”).바로가기
  • 번역주 013)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跪拜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고, 『後漢書』 卷85, 高句驪에는 “跪拜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다. ‘펴다(申)’와 ‘끌다(曳)’의 차이인데, 자형이 유사한 데서 비롯된 오사일 가능성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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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 金銀以自飾”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蹲踞 : 蹲踞는 정좌하지 않고 걸터앉는 것이다. 『淮南子』 說山訓의 “以非義爲義 以非禮爲禮 譬犹倮走而狂人 盗財而予乞者 窃簡而寫法律 蹲踞而誦詩書”라는 기록과 『周書』 于翼傳의 “狄人雖蹲踞無節 然咸憚翼之禮法 莫敢違犯”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蹲踞는 非漢人의 무례한 행동거지로 평가된다. 일본 古墳時代의 埴輪 토기 가운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댄 자세를 표현한 토기를 근거로 하여 蹲踞를 ‘양 무릎을 꿇고 허리를 낮추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井上秀雄, 1974).바로가기
  • 번역주 016)
    俎几 : 제사나 燕饗 때 사용하는 禮器이다. 한편,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夫餘에는 “食飮皆用俎豆”라는 기록이 있고,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는 “東夷飮食類皆用俎豆”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俎豆’는 단지 제기만을 뜻하지 않고, 禮文과 儀式에 관한 규범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果下馬 :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濊에 ‘果下馬’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裵松之가 주석을 붙여, “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故謂之果下”라고 하였다. 또 「魏都賦」에도 “馳道周屈於果下”라는 기록이 있는데, 劉逵의 「魏都賦注」에서 이르기를 “漢廐 舊有樂浪獻果下馬 高三尺 以駕輦車明 黃洪憲 朝鮮國紀云 產果下馬 長尾雞 貂豽 海豹皮 姜西溟曰 定張車 果下馬 皆宮內所用”이라고 하였다. 단, 果下馬와 주몽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은 『위서』가 처음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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