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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가을에 흉노가 침입해 잡아갔던 것을 한나라 임금이 출격해 도로 얻음

  • 국가
    흉노(匈奴)
그 해 가을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太初 3年(전102)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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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정양[군], 운중[군]으로주 002
각주 002)
『漢書』에는 “雲中·定襄·五原·朔方”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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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거 [침입해] 들어와 수천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이천 석[의 고관] 몇 명이 [이끄는 군사를] 격파한 뒤 돌아가면서 광록[훈 서자위]가 구축한 성채와 망루마저주 003
각주 003)
『漢書』에는 “城鄣列亭”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적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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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하였다. 또한 [흉노는] 우현왕을 시켜 주천[군], 장액[군](張掖郡) 주 004
각주 004)
張掖 : 郡 명칭으로 武帝 元鼎 6년(전111)에 武威郡에서 분리되어 설치되었다. “張國臂掖”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치소는 觻得縣(지금의 甘肅省 張掖市 서북 40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甘肅省 高臺縣 이동 弱水 상류와 內蒙古自治區 額濟納旗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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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들어와 수천 명을 잡아갔다. 마침 [한나라 장수] 임문(任文) 주 005
각주 005)
任文 : 漢나라의 장군이다. 그는 玉門關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貳師將軍의 뒤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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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격해 [이들을] 구출하니 [흉노가] 얻은 것을 모두 다시 잃고 돌아갔다. 이 해주 006
각주 006)
漢 武帝 太初 3년(전102)이다. 『漢書』에는 “是歲”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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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군 [이광리]가 대완을 격파해 그 왕을 베고 돌아왔다. 흉노가 [그의 귀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이르지 못했다.주 007
각주 007)
『漢書』에는 “匈奴欲遮之, 不能至”를 “匈奴欲遮之, 不敢”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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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흉노가] 수항성을 공격하고자 했는데, 마침 선우가 병에 걸려 죽었다.주 008
각주 008)
漢 武帝 太初 4년(전101)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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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漢 武帝 太初 3年(전102)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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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漢書』에는 “雲中·定襄·五原·朔方”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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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漢書』에는 “城鄣列亭”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적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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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張掖 : 郡 명칭으로 武帝 元鼎 6년(전111)에 武威郡에서 분리되어 설치되었다. “張國臂掖”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치소는 觻得縣(지금의 甘肅省 張掖市 서북 40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甘肅省 高臺縣 이동 弱水 상류와 內蒙古自治區 額濟納旗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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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任文 : 漢나라의 장군이다. 그는 玉門關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貳師將軍의 뒤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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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 武帝 太初 3년(전102)이다. 『漢書』에는 “是歲”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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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漢書』에는 “匈奴欲遮之, 不能至”를 “匈奴欲遮之, 不敢”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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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漢 武帝 太初 4년(전101)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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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서자위, 임문(任文), 이광리
지명
정양[군], 운중[군], 주천[군], 장액[군](張掖郡), 한나라, 대완, 수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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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흉노가 침입해 잡아갔던 것을 한나라 임금이 출격해 도로 얻음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