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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고조(高祖)와 흉노의 묵특선우가 전투한 뒤 화친조약을 맺음

  • 국가
    흉노(匈奴)
이 무렵주 001
각주 001)
匈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점은 위에서 설명한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匈奴의 冒頓單于가 동쪽으로 東胡와 서쪽으로 月氏를 격파한 다음 남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이다. 즉, 전204년에서 전203년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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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주 002
각주 002)
이 시점은 高祖 5年(전202) 십이월에 項羽가 垓下에서 죽은 다음 正月에 諸侯와 將相들이 모두 漢王을 皇帝로 추대하자 이월 甲午(初3日)에 劉邦이 汜水의 북쪽에서 皇帝에 즉위한 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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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韓王) 신(信) 주 003
각주 003)
韓王 信(? ~ 전196년) : 본래 韓 襄王 서얼의 손자로, 키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었다. 項梁이 楚의 후손인 襄王을 세웠을 즈음에 燕, 齊, 趙, 魏에 과거의 왕을 다시 왕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오직 韓나라만이 후사가 없어 왕을 세울 수가 없었다. 橫陽君 成을 만나 韓王으로 삼을 수가 있었는데 項梁이 定陶(山東省)에서 패전해 죽었다. 이후 劉邦이 군사를 이끌고 와 陽城(河南省 登封縣)을 치고 張良으로 하여금 그 지역을 진무케 할 때 信이 張良을 만나 그에 투항했다. 信은 그의 병사들을 데리고 劉邦을 따라 武關(陝西省 商縣)으로 들어갔다. 劉邦이 자립하여 漢王이 되자 漢中으로 들어갔다가 三秦을 평정하자 信은 韓의 太尉가 되어 옛 땅을 공략하고 韓王이 되었다. 그는 이후 楚나라의 습격을 받고 항복했다가 나중에 도망하여 다시 漢나라로 돌아갔다. 劉邦은 다시 그를 세워 韓王으로 봉했고, 결국 項羽를 격파해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헌했다. 高祖는 割符를 갈라 信을 정식으로 韓王에 봉하고 潁川(河南省)에 도읍하게 했다. 이후 太原 일대의 왕으로 삼아 북방에 대비하게 하면서 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이후 도읍을 馬邑으로 옮겨 갔는데, 그 해 가을 匈奴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그는 高祖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匈奴에 투항해 太原을 공격했다. 그 이후 직접 원정을 지휘한 高祖가 白登山에서 패배하자 匈奴를 위해 변경을 왕래하면서 漢나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또한 王黃 등을 시켜 漢나라의 陳豨를 설득해 漢나라에 모반하도록 했다가 실패했다. 高祖 11년(전196) 三合(山西省 陽高縣)에서 匈奴의 기병과 함께 漢나라에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 이후에 그의 아들과 손자가 漢나라로 항복해 돌아와서 侯로 봉해졌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1 ~ 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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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옮겨 마읍(馬邑) 주 004
각주 004)
馬邑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山西省 朔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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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하게 했다. [그런데] 흉노가 크게 공격해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 이 흉노에게 투항하였다.주 005
각주 005)
이 사건은 漢 高祖 6년(전203) 구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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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한왕] 을 잡자 이를 기회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구주[산](句注山) 주 006
각주 006)
句注 : 雁門山을 지칭한다(주1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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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넘어 태원[군](太原郡) 주 007
각주 007)
太原 : 郡 명칭으로 秦나라 莊襄王 4년(전246)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晉陽(지금의 太原市 서남쪽)이었다. 관할구역은 지금 山西省 五臺山과 管涔山 이남, 霍山 이북이다. 前漢시대 이후에 축소되어 文帝시대에는 國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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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해 진양[성](晉陽城) 밑까지 왔다. [한나라의] 고제(高帝) 주 008
각주 008)
高帝(재위 전202 ~ 전195) : 漢나라를 건국한 劉邦(전256 ~ 전195)의 시호로 廟號는 高祖이고 高皇帝라고도 칭해진다. 진나라 말기 泗水 沛縣(지금의 江蘇省 지역) 사람이다. 字는 季이다. 일찍이 亭長을 맡았다. 秦 二世皇帝 元年(전209)에 陳勝 吳廣의 봉기에 호응하여 沛公이라고 칭하였다. 項羽가 秦나라의 주력부대와 대결을 벌일 때 潁川, 南陽을 거쳐 關中으로 들어갔다. 전206년에 咸陽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법을 폐지하고 關中의 父老와 法三章을 약속하였다. 이후에 項羽가 입관하자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복속되어 그로부터 漢王의 칭호를 얻고 漢中으로 들어갔다. 이후 項羽와 4년간의 대결을 벌여 垓河에서 격파하고 칭제하였다. 한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長安에 세웠다. 건국 이후에는 제도를 완비하고 전후의 사회적 안정을 꾀하였을 뿐만 아니라 異姓 諸侯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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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손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자 했다. 때마침주 009
각주 009)
漢 高祖 7년(전204) 冬 시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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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 아주 춥고 눈까지 내려 병사들이 [동상으로] 손가락을 잃는 자가 열 명 중에 두세 명 되자 이에 묵특이 [이런 사정을 간파하고] 져서 도망가는 척하면서주 010
각주 010)
『漢書』에는 “詳”이 “陽”으로 되어 있는데, ‘詳’은 ‘佯’과 통하기 때문에 양으로 읽을 수 있어 『漢書』에 ‘陽’으로 되어 있다. (주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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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여 한나라의 군대를 유인했다. 한나라의 군대가 묵특을 추격해 오자 묵특은 그의 정예부대를 감추어 두고 [그 중에서] 노약한 [병사들을] 드러나 보이게 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모든 군대를 모아 대부분 보병으로서 32만이었는데, 북으로 [흉노 군대를] 추격했다. 고조가 먼저 평성(平城) 주 011
각주 011)
平城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山西省 大同市 동북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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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하였는데, 보병들이 아직 모두 도착하지 못하자 [이에] 묵특이 정예병 40만 기(騎)를 풀어 고조백등(白登)[산] 주 012
각주 012)
白登山 : 산 명칭으로 지금의 山西省 大同市 동쪽, 즉 과거 平城 동남쪽에 17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다. 그 위에 白登臺가 있었다. 顔師古는 平城에서 10여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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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에워쌌고, 이레 동안 한나라 군대는 [포위망의] 안팎에서 서로 구원하거나 식량을 보급할 수가 없었다. 흉노의 기병들은 서쪽 부대가 모두 흰색 말[白馬], 동쪽 부대가 모두 푸른색 말[靑駹馬]주 013
각주 013)
靑駹馬 : 푸른색의 말을 뜻한다. ‘駹’은 ‘얼굴과 이마가 흰 푸른말’, 또는 ‘얼굴이 흰 검은말’ 등을 뜻하기도 한다. 『漢書』에는 “駹”로 줄여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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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부대가 모두 검정색 말(烏驪馬)주 014
각주 014)
烏驪馬 : 검정색의 말을 뜻한다. 『漢書』에는 ‘驪’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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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부대가 모두 적황색 말[騂馬]주 015
각주 015)
騂馬 : 적황색의 말을 뜻한다. 顔師古는 赤馬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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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조는 사신을 몰래 보내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연지가 이에 묵특에게 말하였다. “두 나라 임금이 서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 거기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한나라 왕에게 신비한 [힘]이 있을지 모르니 선우께서는 [이 점을] 잘 살피십시오.” [마침] 묵특은 한왕 의 장군 왕황(王黃) 주 016
각주 016)
王黃 : 匈奴 사람으로 韓王 信의 부장이었다. 이후에 韓王 信이 匈奴에 투항하자 趙利를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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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趙利) 주 017
각주 017)
趙利 : 戰國時代 趙나라의 후예로 韓王 信이 匈奴에 도망가자 曼丘臣과 王黃 등에게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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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공격하기로 미리] 약속하였는데, 기일이 되어도 [왕]황[조]리의 군대 또한주 018
각주 018)
『史記』의 원문은 “又”이나, 이를 “久”로 쓴 『漢書』가 그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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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자 그들이 한나라와 음모를 [획책했을까] 의심하여, 연지의 말대로 포위망의 한쪽을 풀어 주었다.주 019
각주 019)
韓信列傳에는 匈奴와 漢나라의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해(전203년)] 가을에 匈奴 冒頓[單于]가 대대적인 작전으로 [韓]信을 에워쌌다. [韓]信은 여러 번 사자를 보내 匈奴와 화친을 구하였다. 한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구원하였으나 [韓]信이 여러 차례 사자를 [匈奴에] 보낸 것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韓]信을 꾸짖었다. [韓]信이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여 匈奴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할 것을 약속하고 반란을 일으켜 馬邑을 가진 채 匈奴에 항복하고 太原을 공격했다. [高祖] 7년(전200) 겨울에 황제가 직접 가서 공격을 하여 [韓]信의 군대를 銅鞮에서 격파하고 그의 部將 王喜를 베자 [韓]信이 匈奴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의 장수인 白土 출신인 曼丘臣과 王黃 등이 이 때 趙나라 [후예] 趙利를 세워 王으로 삼고 [韓]信의 패잔병까지 긁어모은 다음 [韓]信, 冒頓[單于]와 모의하여 漢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匈奴는 左賢王과 右賢王에게 기병 만여 명을 주어 王黃 등과 함께 廣武에 진을 치게 한 뒤 남하하여 晉陽에 와서 漢나라 군대와 싸웠다. 그러나 오히려 匈奴軍이 크게 패해 離石까지 추격당해 다시 격파 당했다. 匈奴는 다시 樓煩 서북쪽에서 군사를 정비하니 漢나라에서 車騎將軍이 와서 匈奴를 격파하였다. 匈奴가 늘 패해 달아나자 漢나라 군대는 승세를 타 북으로 추격하여 冒頓[單于]가 代의 [上]谷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高祖가 晉陽에 있다가 사람을 시켜 冒頓[單于]를 살피게 하니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였다. “공격할 수 있겠습니다.” 황제가 마침내 平城에 도착했다. 황제가 白登山으로 나아가자 匈奴의 기병들이 상을 에워쌌는데, 황제가 바로 사람을 시켜 閼氏에게 사람을 시켜 후한 선물을 주었다. 이에 閼氏가 冒頓[單于]를 설득하여 말하였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양국의 군주가 서로 괴롭혀야 될 까닭도 없습니다.” 이레를 머물다가 匈奴의 기병이 점차 물러나 갔다. 이 때 하늘에서 짙은 안개가 내려오니 한나라 사신이 갔다 왔다 해도 匈奴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護軍中尉 陳平을 황제에게 말하였다. “匈奴는 화살을 쏘는 부대이니 强弓에 화살 두 개씩을 장치해 밖으로 향하게 한 다음에 천천히 가면 포위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평성에 들어갔을 때 한나라 구원 부대가 또한 도착하니 흉노의 기병이 [포위를] 풀고 갔다. 한나라 역시 군대를 물려 돌아왔다. 韓信이 匈奴를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변경을 공격하였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3 ~ 2634).
이와 동일한 내용은 『史記』의 기록(권93 「韓信廬綰列傳」 “護軍中尉陳平言上曰 胡者全兵, 請令彊弩傳兩矢外鄕, 徐行出圍.” : 2634)과 『漢書』의 기록(권41 「樊酈滕灌傳靳周傳」 “高帝出欲馳, 嬰固徐行, 弩皆持滿外鄕, 卒以得脫.” : 2078)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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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조는 병사들에게 명하여 모두 활시위를 한껏 당긴 채 화살을 메겨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여주 020
각주 020)
『漢書』에서 顔師古는 ‘傅’를 ‘附’로, ‘鄕’을 ‘嚮’으로 읽어 활시위를 한껏 당긴 채 화살을 메겨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여 포위가 풀린 쪽으로 바로 도망쳐 나아간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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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가 풀린 쪽으로 바로 도망쳐 나가 마침내 자신의 대군과 만나게 되자 묵특도 바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한나라 [고조] 역시 군대를 이끌어 물러나면서 유경(劉敬) 주 021
각주 021)
劉敬 : 齊나라 사람으로 원래의 성이 婁氏였는데, 劉氏 성을 받아 劉敬이 되었다. 漢나라 高祖 5년(전202)에 隴西의 수비병으로 가다가 劉邦을 만나 郎中에 임명되었고 奉春君이라 불렸다. 高祖가 匈奴를 공격할 때 정확한 적정 분석과 조언으로 중용되었다. 高祖가 白登山에서 겨우 돌아온 이후 封領으로 2천 호를 덧붙여 關內侯에 봉해지고 建信侯라 불렸다. 그리고 匈奴에 대한 和親政策을 주청하고 匈奴에 가서 조약을 맺었다. 그 다음에 돌아와 과거 戰國時代의 貴族들을 제압하기 위해 10만여 명을 關中에 徙民하게 하도록 하는 등 强幹弱枝政策을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史記』 권99 『劉敬叔孫通列傳』 : 2715 ~ 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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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켜 화친조약을 맺도록 했다.주 022
각주 022)
公主를 匈奴에 시집보냄으로써 그와 화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劉敬列傳」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황제가 걱정을 하여 劉敬에게 물었다. 劉敬이 대답하였다. “천하가 안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졸들이 전투에 지쳐 있어 다시 무력으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冒頓[선우]가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 즉위하여 여러 계모들을 처로 삼고 힘으로서 누른 것은 仁義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먼 자손을 신하로 만들 수 있는 계책이 있으나 아마도 폐하께서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잘 할 수 있다. 어찌 할 수 없겠는가! 무슨 계책인가?” 劉敬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폐하께서 정말로 嫡出 중에서 큰 公主를 시집보내는데, 후하게 받들어 보낸다면 그들이 한나라 적출 공주가 후하게 보내져 온 것을 알고 오랑캐들은 반드시 받들어 閼氏로 삼을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태자가 되어 單于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匈奴가] 한나라의 푸짐한 선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매년 한나라에서 남는데 그들에게 없는 것을 문안 편지와 함께 보내고 그와 함께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내 예절을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冒頓[單于]가 있는 동안은 사위가 되고, 죽으면 외손자가 單于가 되는 것입니다. 외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예를 거스르는 것을 일찍이 들어본 바 없습니다.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도 [匈奴를] 점차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폐가께서 큰 공주를 보내지 못하시겠다면 宗室 내지는 後宮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 보냈는데, 그들이 알게 되면 귀하고 살갑게 대하지 않을 것이니 효과가 없습니다.” 高帝가 말하였다. “좋다.” 큰 공주를 보내려고 하였다. 呂后가 낮밤을 울면서 말하였다. “첩에게는 태자와 하나의 딸만 있는데, 어찌하여 匈奴에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마침내 공주를 보낼 수 없게 되자 서민의 딸을 골라 큰 공주라고 하여 單于에게 시집보냈다. 劉敬을 사자로 보내 화친을 맺고 결혼을 약속하게 하였다(『史記』 권99 「劉敬叔孫通列傳」 : 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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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匈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점은 위에서 설명한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匈奴의 冒頓單于가 동쪽으로 東胡와 서쪽으로 月氏를 격파한 다음 남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이다. 즉, 전204년에서 전203년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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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이 시점은 高祖 5年(전202) 십이월에 項羽가 垓下에서 죽은 다음 正月에 諸侯와 將相들이 모두 漢王을 皇帝로 추대하자 이월 甲午(初3日)에 劉邦이 汜水의 북쪽에서 皇帝에 즉위한 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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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韓王 信(? ~ 전196년) : 본래 韓 襄王 서얼의 손자로, 키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었다. 項梁이 楚의 후손인 襄王을 세웠을 즈음에 燕, 齊, 趙, 魏에 과거의 왕을 다시 왕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오직 韓나라만이 후사가 없어 왕을 세울 수가 없었다. 橫陽君 成을 만나 韓王으로 삼을 수가 있었는데 項梁이 定陶(山東省)에서 패전해 죽었다. 이후 劉邦이 군사를 이끌고 와 陽城(河南省 登封縣)을 치고 張良으로 하여금 그 지역을 진무케 할 때 信이 張良을 만나 그에 투항했다. 信은 그의 병사들을 데리고 劉邦을 따라 武關(陝西省 商縣)으로 들어갔다. 劉邦이 자립하여 漢王이 되자 漢中으로 들어갔다가 三秦을 평정하자 信은 韓의 太尉가 되어 옛 땅을 공략하고 韓王이 되었다. 그는 이후 楚나라의 습격을 받고 항복했다가 나중에 도망하여 다시 漢나라로 돌아갔다. 劉邦은 다시 그를 세워 韓王으로 봉했고, 결국 項羽를 격파해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헌했다. 高祖는 割符를 갈라 信을 정식으로 韓王에 봉하고 潁川(河南省)에 도읍하게 했다. 이후 太原 일대의 왕으로 삼아 북방에 대비하게 하면서 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이후 도읍을 馬邑으로 옮겨 갔는데, 그 해 가을 匈奴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그는 高祖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匈奴에 투항해 太原을 공격했다. 그 이후 직접 원정을 지휘한 高祖가 白登山에서 패배하자 匈奴를 위해 변경을 왕래하면서 漢나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또한 王黃 등을 시켜 漢나라의 陳豨를 설득해 漢나라에 모반하도록 했다가 실패했다. 高祖 11년(전196) 三合(山西省 陽高縣)에서 匈奴의 기병과 함께 漢나라에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 이후에 그의 아들과 손자가 漢나라로 항복해 돌아와서 侯로 봉해졌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1 ~ 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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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馬邑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山西省 朔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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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이 사건은 漢 高祖 6년(전203) 구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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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句注 : 雁門山을 지칭한다(주1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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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太原 : 郡 명칭으로 秦나라 莊襄王 4년(전246)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晉陽(지금의 太原市 서남쪽)이었다. 관할구역은 지금 山西省 五臺山과 管涔山 이남, 霍山 이북이다. 前漢시대 이후에 축소되어 文帝시대에는 國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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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高帝(재위 전202 ~ 전195) : 漢나라를 건국한 劉邦(전256 ~ 전195)의 시호로 廟號는 高祖이고 高皇帝라고도 칭해진다. 진나라 말기 泗水 沛縣(지금의 江蘇省 지역) 사람이다. 字는 季이다. 일찍이 亭長을 맡았다. 秦 二世皇帝 元年(전209)에 陳勝 吳廣의 봉기에 호응하여 沛公이라고 칭하였다. 項羽가 秦나라의 주력부대와 대결을 벌일 때 潁川, 南陽을 거쳐 關中으로 들어갔다. 전206년에 咸陽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법을 폐지하고 關中의 父老와 法三章을 약속하였다. 이후에 項羽가 입관하자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복속되어 그로부터 漢王의 칭호를 얻고 漢中으로 들어갔다. 이후 項羽와 4년간의 대결을 벌여 垓河에서 격파하고 칭제하였다. 한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長安에 세웠다. 건국 이후에는 제도를 완비하고 전후의 사회적 안정을 꾀하였을 뿐만 아니라 異姓 諸侯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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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漢 高祖 7년(전204) 冬 시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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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漢書』에는 “詳”이 “陽”으로 되어 있는데, ‘詳’은 ‘佯’과 통하기 때문에 양으로 읽을 수 있어 『漢書』에 ‘陽’으로 되어 있다. (주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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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平城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山西省 大同市 동북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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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白登山 : 산 명칭으로 지금의 山西省 大同市 동쪽, 즉 과거 平城 동남쪽에 17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다. 그 위에 白登臺가 있었다. 顔師古는 平城에서 10여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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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靑駹馬 : 푸른색의 말을 뜻한다. ‘駹’은 ‘얼굴과 이마가 흰 푸른말’, 또는 ‘얼굴이 흰 검은말’ 등을 뜻하기도 한다. 『漢書』에는 “駹”로 줄여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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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烏驪馬 : 검정색의 말을 뜻한다. 『漢書』에는 ‘驪’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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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騂馬 : 적황색의 말을 뜻한다. 顔師古는 赤馬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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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王黃 : 匈奴 사람으로 韓王 信의 부장이었다. 이후에 韓王 信이 匈奴에 투항하자 趙利를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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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趙利 : 戰國時代 趙나라의 후예로 韓王 信이 匈奴에 도망가자 曼丘臣과 王黃 등에게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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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史記』의 원문은 “又”이나, 이를 “久”로 쓴 『漢書』가 그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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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韓信列傳에는 匈奴와 漢나라의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해(전203년)] 가을에 匈奴 冒頓[單于]가 대대적인 작전으로 [韓]信을 에워쌌다. [韓]信은 여러 번 사자를 보내 匈奴와 화친을 구하였다. 한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구원하였으나 [韓]信이 여러 차례 사자를 [匈奴에] 보낸 것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韓]信을 꾸짖었다. [韓]信이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여 匈奴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할 것을 약속하고 반란을 일으켜 馬邑을 가진 채 匈奴에 항복하고 太原을 공격했다. [高祖] 7년(전200) 겨울에 황제가 직접 가서 공격을 하여 [韓]信의 군대를 銅鞮에서 격파하고 그의 部將 王喜를 베자 [韓]信이 匈奴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의 장수인 白土 출신인 曼丘臣과 王黃 등이 이 때 趙나라 [후예] 趙利를 세워 王으로 삼고 [韓]信의 패잔병까지 긁어모은 다음 [韓]信, 冒頓[單于]와 모의하여 漢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匈奴는 左賢王과 右賢王에게 기병 만여 명을 주어 王黃 등과 함께 廣武에 진을 치게 한 뒤 남하하여 晉陽에 와서 漢나라 군대와 싸웠다. 그러나 오히려 匈奴軍이 크게 패해 離石까지 추격당해 다시 격파 당했다. 匈奴는 다시 樓煩 서북쪽에서 군사를 정비하니 漢나라에서 車騎將軍이 와서 匈奴를 격파하였다. 匈奴가 늘 패해 달아나자 漢나라 군대는 승세를 타 북으로 추격하여 冒頓[單于]가 代의 [上]谷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高祖가 晉陽에 있다가 사람을 시켜 冒頓[單于]를 살피게 하니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였다. “공격할 수 있겠습니다.” 황제가 마침내 平城에 도착했다. 황제가 白登山으로 나아가자 匈奴의 기병들이 상을 에워쌌는데, 황제가 바로 사람을 시켜 閼氏에게 사람을 시켜 후한 선물을 주었다. 이에 閼氏가 冒頓[單于]를 설득하여 말하였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양국의 군주가 서로 괴롭혀야 될 까닭도 없습니다.” 이레를 머물다가 匈奴의 기병이 점차 물러나 갔다. 이 때 하늘에서 짙은 안개가 내려오니 한나라 사신이 갔다 왔다 해도 匈奴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護軍中尉 陳平을 황제에게 말하였다. “匈奴는 화살을 쏘는 부대이니 强弓에 화살 두 개씩을 장치해 밖으로 향하게 한 다음에 천천히 가면 포위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평성에 들어갔을 때 한나라 구원 부대가 또한 도착하니 흉노의 기병이 [포위를] 풀고 갔다. 한나라 역시 군대를 물려 돌아왔다. 韓信이 匈奴를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변경을 공격하였다(『史記』 권93 「韓信盧綰列傳」 : 2633 ~ 2634).
    이와 동일한 내용은 『史記』의 기록(권93 「韓信廬綰列傳」 “護軍中尉陳平言上曰 胡者全兵, 請令彊弩傳兩矢外鄕, 徐行出圍.” : 2634)과 『漢書』의 기록(권41 「樊酈滕灌傳靳周傳」 “高帝出欲馳, 嬰固徐行, 弩皆持滿外鄕, 卒以得脫.” : 2078)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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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漢書』에서 顔師古는 ‘傅’를 ‘附’로, ‘鄕’을 ‘嚮’으로 읽어 활시위를 한껏 당긴 채 화살을 메겨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여 포위가 풀린 쪽으로 바로 도망쳐 나아간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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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劉敬 : 齊나라 사람으로 원래의 성이 婁氏였는데, 劉氏 성을 받아 劉敬이 되었다. 漢나라 高祖 5년(전202)에 隴西의 수비병으로 가다가 劉邦을 만나 郎中에 임명되었고 奉春君이라 불렸다. 高祖가 匈奴를 공격할 때 정확한 적정 분석과 조언으로 중용되었다. 高祖가 白登山에서 겨우 돌아온 이후 封領으로 2천 호를 덧붙여 關內侯에 봉해지고 建信侯라 불렸다. 그리고 匈奴에 대한 和親政策을 주청하고 匈奴에 가서 조약을 맺었다. 그 다음에 돌아와 과거 戰國時代의 貴族들을 제압하기 위해 10만여 명을 關中에 徙民하게 하도록 하는 등 强幹弱枝政策을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史記』 권99 『劉敬叔孫通列傳』 : 2715 ~ 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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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公主를 匈奴에 시집보냄으로써 그와 화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劉敬列傳」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황제가 걱정을 하여 劉敬에게 물었다. 劉敬이 대답하였다. “천하가 안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졸들이 전투에 지쳐 있어 다시 무력으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冒頓[선우]가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 즉위하여 여러 계모들을 처로 삼고 힘으로서 누른 것은 仁義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먼 자손을 신하로 만들 수 있는 계책이 있으나 아마도 폐하께서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잘 할 수 있다. 어찌 할 수 없겠는가! 무슨 계책인가?” 劉敬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폐하께서 정말로 嫡出 중에서 큰 公主를 시집보내는데, 후하게 받들어 보낸다면 그들이 한나라 적출 공주가 후하게 보내져 온 것을 알고 오랑캐들은 반드시 받들어 閼氏로 삼을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태자가 되어 單于를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匈奴가] 한나라의 푸짐한 선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매년 한나라에서 남는데 그들에게 없는 것을 문안 편지와 함께 보내고 그와 함께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내 예절을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冒頓[單于]가 있는 동안은 사위가 되고, 죽으면 외손자가 單于가 되는 것입니다. 외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예를 거스르는 것을 일찍이 들어본 바 없습니다.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도 [匈奴를] 점차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폐가께서 큰 공주를 보내지 못하시겠다면 宗室 내지는 後宮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 보냈는데, 그들이 알게 되면 귀하고 살갑게 대하지 않을 것이니 효과가 없습니다.” 高帝가 말하였다. “좋다.” 큰 공주를 보내려고 하였다. 呂后가 낮밤을 울면서 말하였다. “첩에게는 태자와 하나의 딸만 있는데, 어찌하여 匈奴에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마침내 공주를 보낼 수 없게 되자 서민의 딸을 골라 큰 공주라고 하여 單于에게 시집보냈다. 劉敬을 사자로 보내 화친을 맺고 결혼을 약속하게 하였다(『史記』 권99 「劉敬叔孫通列傳」 : 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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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신(信), , , 고제(高帝), 묵특, 묵특, 묵특, 고조, 묵특, 고조, 고조, 묵특, 묵특, , 왕황(王黃), 조리(趙利), [왕]황, [조]리, 고조, 묵특, [고조], 유경(劉敬)
지명
한나라, 대[군], 마읍(馬邑), 마읍, 구주[산](句注山), 태원[군](太原郡), 진양[성](晉陽城),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평성(平城), 백등(白登)[산],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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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고조(高祖)와 흉노의 묵특선우가 전투한 뒤 화친조약을 맺음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