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타가 한나라의 번신(藩臣)으로서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안에서는 황제의 칭호를 계속 사용함
효문제(孝文帝)
주 001는 즉위 원년(전180)에 처음으로 천하를 호령하면서 제후왕(諸侯王)과 사이(四夷)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대왕(代王)에서 천자의 위에 오르게 되었음을 알리고 황제의 크나큰 덕을 일깨워 주었다.주 002이어서 조타의 선친 무덤이 진정(眞定)에 있었으므로 그곳에 수읍(守邑)주 003
“만이(蠻夷)의 대장(大長)주 009노부(老夫) 신(臣) 타(佗)는 지난날 고후께서 남월과 거리를 두며 차별을 하여 이는 장사왕이 신을 참소하였기 때문이라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후께서 신(臣) 타(佗)의 친족을 모조리 죽이고 선친의 묘를 파내어 불질러 버렸다는 소식을 멀리서 풍문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장사국의 변방 국경을 침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방은 지대가 낮고 기후는 습한 곳으로 만이(蠻夷)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동쪽의 민월(閩越)은 겨우 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왕을 칭하고 있으며 서쪽의 구(甌)와 락(駱)주 010은 벌거벗고 다니는 나라[裸國]주 011인데도 역시 왕을 칭하고 있습니다. 노신(老臣)이 외람되게 감히 황제를 칭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스스로 재미삼아 해 본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천왕(天王)주 012에게 알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는 머리를 조아려 사죄를 하며 앞으로 영원히 번신(藩臣)으로서 직무를 다하고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하였다. 곧 이어 온 나라에 명을 내려 “내가 듣기로 두 영웅은 함께 설 수 없고 두 현인(賢人)은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황제(皇帝)란 현명한 천자이다.주 013
각주 003)
을 설치하여 세시(歲時)마다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또한 조타의 종형제들을 불러 벼슬을 높여주고 많은 선물을 하사하여 그들을 후대하였다. 효문제가 조를 내려 승상이었던 진평(陳平)
주 004등에게 남월에 사신을 갈 만한 사람을 추천토록 하자, 진평은 호치(好畤)현
주 005守邑 : 守邑이란 묘를 지키고 제사를 받드는 데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읍을 말한다. 秦始皇 때부터 능 옆에 陵邑을 조성하여 천하 부호들을 이곳에 천사시켰는데, 漢代에도 이를 계승하여 황제의 능 옆에는 陵邑을 조성하고 선대 황제와 관련 있는 功臣들이나 고위 관리들, 부호들을 이곳에 천사시켜 일종의 제국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漢書』 「地理志」에는 “漢이 일어난 뒤 長安에 도읍을 정한 뒤 楚昭王, 屈王, 景王 및 여러 공신들이 長陵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후대에는 二千石의 관리들과 부호들을 여러 릉 옆에 천사시켰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능읍은 황제의 능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守邑도 歲時마다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기능상으로는 능읍과 동일하다. 다만, 이를 陵邑이라 하지 않고 守邑이라 한 사례는 「南越列傳」에 처음 등장하여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알 수 없다.
각주 005)
의 육가(陸賈)가 선제(先帝)주 006때 일찍이 남월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어 그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육가를 불러 태중대부(太中大夫)주 007好畤 : 好畤는 원래 秦대 雍 동쪽에 있던 제사터로 폐지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던 곳으로, 漢代 현이 설치되면서 그대로 縣名이 되었다. 현재의 陝西省 乾縣 동쪽에는 故城이 남아 있다. 陸賈를 ‘好畤의 陸賈’라고 부른 데에는 呂后가 집권하면서 呂氏집안 사람들을 漢의 王에 봉하고자 계획하니 陸賈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好畤의 田地가 좋아 귀향한 데에서 기인한다(“孝惠時, 呂太后用事, 欲王諸呂, 畏大臣及有口者. 賈自度不能爭之, 乃病免. 以好畤田地善, 往家焉”(『漢書』 「陸賈」傳). 이 때문에 ‘好畤田’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정계를 떠나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는 말로 비유되었다.
각주 007)
에 임명하여 남월에 사신으로 보냈다. [육가는] 조타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그 동안 한 번도 사신을 보내 보고하지 않은 일을 꾸짖었다.주 008
육가가 남월에 도착하자 남월왕은 매우 두려워하며 글을 지어 사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太中大夫 :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郎中令 소속으로 大夫는 의론을 담당하는데, 太中大夫, 中大夫, 諫大夫가 있다. 皇帝의 자문에 응대하는 일과 황제의 명을 받들어 出使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太中大夫는 秩 比千石, 中大夫는 武帝 太初 원년에 光祿大夫로 명칭을 바꾸면서 秩이 比2천석이 되었고, 諫大夫는 원래는 秦官이었는데, 漢初에 폐지되었다가 武帝 元狩 5년에 다시 설치되면서 秩 比8백 석이 되었다. 漢代 조정의 법령과 정책은 모두 이들에 의해 만들어져 나온 경우가 많은데, 陸賈를 비롯하여 賈誼, 竈錯, 董仲舒 등 大夫를 역임한 자들이 적지 않다.
“만이(蠻夷)의 대장(大長)주 009노부(老夫) 신(臣) 타(佗)는 지난날 고후께서 남월과 거리를 두며 차별을 하여 이는 장사왕이 신을 참소하였기 때문이라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후께서 신(臣) 타(佗)의 친족을 모조리 죽이고 선친의 묘를 파내어 불질러 버렸다는 소식을 멀리서 풍문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장사국의 변방 국경을 침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방은 지대가 낮고 기후는 습한 곳으로 만이(蠻夷)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동쪽의 민월(閩越)은 겨우 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왕을 칭하고 있으며 서쪽의 구(甌)와 락(駱)주 010은 벌거벗고 다니는 나라[裸國]주 011인데도 역시 왕을 칭하고 있습니다. 노신(老臣)이 외람되게 감히 황제를 칭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스스로 재미삼아 해 본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천왕(天王)주 012에게 알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는 머리를 조아려 사죄를 하며 앞으로 영원히 번신(藩臣)으로서 직무를 다하고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하였다. 곧 이어 온 나라에 명을 내려 “내가 듣기로 두 영웅은 함께 설 수 없고 두 현인(賢人)은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황제(皇帝)란 현명한 천자이다.주 013
각주 013)
그러니 지금 이후로는 황제란 칭호를 쓰지도, 제(制)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황옥(黃屋)과 좌독(左纛)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육가가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하니 효문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후 효경제(孝景帝)
주 014때까지 신하를 칭하며 사신을 보내 조청(朝請)주 015賢天子 : 이 구절에서 ‘賢天子’의 의미는 『史記』의 문맥을 보면, 영웅은 둘이 될 수 없으며 현인, 즉 성인은 한 세상에 둘이 나올 수 없다는 故事를 전제로 한 것을 미루어볼 때, 皇帝란 모름지기 賢人 天子, 즉 聖人天子이므로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漢書』 「兩越」傳에는 ‘皇帝’ 앞에 ‘漢’이 덧붙여져 ‘漢皇帝, 賢天子’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漢의 皇帝’라고 ‘漢’을 덧붙인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史記會注考證』도 ‘漢’자가 뒤에 덧붙여진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史記會注考證』, 4653쪽)
각주 015)
하였다. 그러나 남월은 그 나라 안에서는 여전히 이전과 같이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천자에게 사신을 보낼 때에는 다른 제후들처럼 왕을 칭하며 조정의 명을 받들었다. 건원(建元) 4년(전137)에 죽었다.주 016
朝請 : 봄에 황제에게 문안인사하는 것을 ‘朝’, 가을에 인사하는 것을 ‘請’이라 한다. 이는 漢律에 규정되어 있던 제도로 『周禮』의 春朝秋覲의 禮를 말한다. 『史記』 「吳王濞列傳」 “吳王恐, 爲謀滋甚. 及後使人爲秋請”의 『集解』에 인용된 孟康의 말에 의하면, “律, 春曰朝, 秋曰請, 如古諸侯朝聘也”라고 하였고, 『說文解字』에는 “請, 謁也”이라 하였으며, 그 段玉裁注에 “周禮, 春朝秋覲, 漢改爲春朝秋請”라고 하였다. 漢律로 규정된 것은 그만큼 漢代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뜻하는데, 제도의 기원은 段玉裁가 지적하듯 漢代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史記』 「貨殖列傳」에 朝請의 사례가 이미 보이고 있어 漢 이전 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로 추정하기도 한다(張豐乾, 「‘朝請’, ‘諸侯’與竹簡〈文子〉的撰作年代」, 『簡帛硏究』, 2001년 11월15일). ‘朝請’은 漢 조정이 지방 제후들을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방 제후들이 朝請, 不朝請함으로써 중앙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후대에 ‘奉朝請’이라는 명예직으로 지속되는데, 朝覲이 제후에 한정되었다고 한다면 朝請은 秦漢시대 중요 대신들로 확대되었고 통일 후 군현제적 통치하에서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들과 상응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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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守邑 : 守邑이란 묘를 지키고 제사를 받드는 데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읍을 말한다. 秦始皇 때부터 능 옆에 陵邑을 조성하여 천하 부호들을 이곳에 천사시켰는데, 漢代에도 이를 계승하여 황제의 능 옆에는 陵邑을 조성하고 선대 황제와 관련 있는 功臣들이나 고위 관리들, 부호들을 이곳에 천사시켜 일종의 제국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漢書』 「地理志」에는 “漢이 일어난 뒤 長安에 도읍을 정한 뒤 楚昭王, 屈王, 景王 및 여러 공신들이 長陵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후대에는 二千石의 관리들과 부호들을 여러 릉 옆에 천사시켰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능읍은 황제의 능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守邑도 歲時마다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기능상으로는 능읍과 동일하다. 다만, 이를 陵邑이라 하지 않고 守邑이라 한 사례는 「南越列傳」에 처음 등장하여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알 수 없다.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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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好畤 : 好畤는 원래 秦대 雍 동쪽에 있던 제사터로 폐지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던 곳으로, 漢代 현이 설치되면서 그대로 縣名이 되었다. 현재의 陝西省 乾縣 동쪽에는 故城이 남아 있다. 陸賈를 ‘好畤의 陸賈’라고 부른 데에는 呂后가 집권하면서 呂氏집안 사람들을 漢의 王에 봉하고자 계획하니 陸賈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好畤의 田地가 좋아 귀향한 데에서 기인한다(“孝惠時, 呂太后用事, 欲王諸呂, 畏大臣及有口者. 賈自度不能爭之, 乃病免. 以好畤田地善, 往家焉”(『漢書』 「陸賈」傳). 이 때문에 ‘好畤田’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정계를 떠나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는 말로 비유되었다.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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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太中大夫 : 『漢書』 「百官公卿表」에 의하면, 郎中令 소속으로 大夫는 의론을 담당하는데, 太中大夫, 中大夫, 諫大夫가 있다. 皇帝의 자문에 응대하는 일과 황제의 명을 받들어 出使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太中大夫는 秩 比千石, 中大夫는 武帝 太初 원년에 光祿大夫로 명칭을 바꾸면서 秩이 比2천석이 되었고, 諫大夫는 원래는 秦官이었는데, 漢初에 폐지되었다가 武帝 元狩 5년에 다시 설치되면서 秩 比8백 석이 되었다. 漢代 조정의 법령과 정책은 모두 이들에 의해 만들어져 나온 경우가 많은데, 陸賈를 비롯하여 賈誼, 竈錯, 董仲舒 등 大夫를 역임한 자들이 적지 않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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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賢天子 : 이 구절에서 ‘賢天子’의 의미는 『史記』의 문맥을 보면, 영웅은 둘이 될 수 없으며 현인, 즉 성인은 한 세상에 둘이 나올 수 없다는 故事를 전제로 한 것을 미루어볼 때, 皇帝란 모름지기 賢人 天子, 즉 聖人天子이므로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漢書』 「兩越」傳에는 ‘皇帝’ 앞에 ‘漢’이 덧붙여져 ‘漢皇帝, 賢天子’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漢의 皇帝’라고 ‘漢’을 덧붙인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고 할 수 있다. 『史記會注考證』도 ‘漢’자가 뒤에 덧붙여진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史記會注考證』, 4653쪽)
-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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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5)
朝請 : 봄에 황제에게 문안인사하는 것을 ‘朝’, 가을에 인사하는 것을 ‘請’이라 한다. 이는 漢律에 규정되어 있던 제도로 『周禮』의 春朝秋覲의 禮를 말한다. 『史記』 「吳王濞列傳」 “吳王恐, 爲謀滋甚. 及後使人爲秋請”의 『集解』에 인용된 孟康의 말에 의하면, “律, 春曰朝, 秋曰請, 如古諸侯朝聘也”라고 하였고, 『說文解字』에는 “請, 謁也”이라 하였으며, 그 段玉裁注에 “周禮, 春朝秋覲, 漢改爲春朝秋請”라고 하였다. 漢律로 규정된 것은 그만큼 漢代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뜻하는데, 제도의 기원은 段玉裁가 지적하듯 漢代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史記』 「貨殖列傳」에 朝請의 사례가 이미 보이고 있어 漢 이전 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로 추정하기도 한다(張豐乾, 「‘朝請’, ‘諸侯’與竹簡〈文子〉的撰作年代」, 『簡帛硏究』, 2001년 11월15일). ‘朝請’은 漢 조정이 지방 제후들을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방 제후들이 朝請, 不朝請함으로써 중앙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후대에 ‘奉朝請’이라는 명예직으로 지속되는데, 朝覲이 제후에 한정되었다고 한다면 朝請은 秦漢시대 중요 대신들로 확대되었고 통일 후 군현제적 통치하에서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들과 상응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효문제(孝文帝), 조타, 조타, 효문제, 진평(陳平), 진평, 육가(陸賈), 육가, 육가, 조타, 타(佗), 고후, 고후, 타(佗), 육가, 효문제, 효경제(孝景帝)
- 지명
- 진정(眞定), 남월, 호치(好畤)현, 남월, 남월, 육가, 남월, 남월, 장사국, 남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