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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 사신의 연회에 대한 한림학사 전유연(錢惟演)의 상언

  • 날짜
    1019년 12월 (음)(天禧 3年(1019) 12月 丙午)
  • 출전
    卷94 天禧 3年(1019) 12月 丙午
한림학사(翰林學士)주 001
각주 001)
翰林學士 : 북송의 관직. 唐代 현종 開元 26年(738)에 翰林供奉을 學士로 고쳤고, 오로지 內命을 관장하고 기밀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唐代에는 正官이기보다는 임시직의 성격이 강했다. 五代後晉 시기에 翰林學士院이 설치되면서 이후 거란(요)과 송에서도 이 제도를 계승했다. 송의 제도에서 한림학사는 翰林承旨의 아래였고 知制誥보다는 상위인 正3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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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연(錢惟演)주 002
각주 002)
錢惟演 : 962∼1034, 북송의 관인. 杭州 錢塘(치소는 현재 중국 浙江省 杭州) 사람으로 字는 希聖이다. 吳越王 錢俶의 차남이다. 아버지를 따라 송에 귀부하여 여러 차례 발탁의 과정을 거쳐 右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진종 시기에 直秘閣, 知制誥, 翰林學士, 樞密副使 등의 직을 역임했다. 인종이 즉위한 이후에 樞密使로 승진했다. 당시 권신 丁謂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丁謂와 함께 寇準을 축출하기도 했다. 乾興 元年(1022)에는 태후와 혼인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保大軍節度使 겸 知河陽府가 되었다. 同中書門下平章事의 호칭이 더해졌고, 判許州 등의 직을 역임하고 崇信軍節度使로 관직 경력을 끝맺었다. 이후에 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金坡遺事』, 『家王故事』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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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언하기를, “엎드려 보건대 거란(요), 고려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실 때마다 그 악인의 가사 다수가 매우 조잡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외국사신에게 주연을 베풀 때에는 그 악인의 말을 교방(敎坊)주 003
각주 003)
敎坊 : 북송의 관청. 관청의 명칭으로 敎坊司라고도 칭한다. 唐, 五代 시기에 설치되었다. 송에서는 太常寺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연회를 위한 樂舞를 관장했다. 使가 1인이고 副使가 2인이었으며, 그 아래에는 都色長, 色長 등이 있었다. 金代에는 宣徽院에 소속되었고, 元代에는 禮部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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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인원(舍人院)주 004
각주 004)
舍人院 : 북송의 관청. 송대에는 中書省에 소속되었다. 詔令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관장했다. 송대 초기에는 中書舍人만이 있었고 별도의 직무 분담이 없었지만, 후에 知制誥와 直舍人院을 두면서 翰林學士와 함께 임무를 맡았다. 元豐 연간의 관제 개혁이 이루어질 때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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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하여금 짓고, 경부아전(京府衙前)주 005
각주 005)
京府衙前 : 京師에 있는 府城을 京府라고 칭했는데, 이 명칭은 송대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京府衙前은 京府에서 일하는 衙前들을 지칭하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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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각관(館閣官)주 006
각주 006)
館閣官 : 송대 초기에 唐, 五代의 제도를 이어받아 昭文館, 史館, 集賢院을 三館이라고 했다. 太平興國 3年(978)에 새로 三館을 짓고 이를 崇文院이라고 통칭했다. 端拱 元年(988)에는 숭문원 내에 秘閣을 두었고 이후 三館秘閣이라 불렀다. 이를 줄여서 館閣이라 부른 것이며, 여기에 있는 관원들을 館閣官이라고 한 것이다. 궁정에 있는 서적 편찬, 교정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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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하여금 짓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것을 따랐다. 곧바로 지제고(知制誥)주 007
각주 007)
知制誥 : 북송의 관직. 唐代에 설치되어 중요한 詔令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관장했다. 中書省에 소속되어 舍人들로 충임하다가 開元 초기가 되면 翰林學士와 그 외의 文官들로 충임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른 관료가 詔勅, 策命을 관장하면 兼知制誥라 칭했다. 송대에는 翰林學士들이 모두 知制誥의 직함을 더해서 가졌고, 內制라고 칭했다. 한림학사가 아닌 다른 관료가 知制誥가 되면, 이는 外制라고 불렀다. 내제와 외제를 합쳐서 兩制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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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晏殊)주 008
각주 008)
晏殊 : 991∼1055. 북송의 관인. 撫州 臨川(현재 중국 江西省 撫州) 사람으로 字는 同叔이다. 景德 2年(1005)에 同進士出身을 하사받고 秘書省正字에 발탁되었다. 天禧 연간에 여러 번 승진하여 知制誥, 翰林學士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명을 받들어 『眞宗實錄』을 함께 찬수했다. 天聖 3年(1025)에는 樞密副使에 발탁되었다. 天聖 5年(1027)에 탄핵되어 知宣州로 좌천되었고 곧 知應天府가 되었다. 여기에서 학교를 일으켜 范仲淹에게 학생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明道 元年(1031)에 參知政事까지 되었지만, 인종이 親政을 하면서 知亳州로 좌천되었다. 寶元 元年(1038)에는 三司使에 제수되었고, 康定 元年(1040)에는 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가 곧 樞密使가 되었다. 慶曆 4年(1044)에는 탄핵을 받아 知潁州로 좌천되었다. 이후 병이 들어 京師로 돌아왔고, 사망한 이후 司空 겸 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元獻이다. 저술로는 『珠玉詞』, 『元獻遺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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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글을 올려 전례와 고사를 인용하여 그 폐단을 힘써 비판했다. 이에 조칙을 내려 교방이 글 짓는 것을 멈추고 사인원이 책을 바치게 했다.

  • 각주 001)
    翰林學士 : 북송의 관직. 唐代 현종 開元 26年(738)에 翰林供奉을 學士로 고쳤고, 오로지 內命을 관장하고 기밀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唐代에는 正官이기보다는 임시직의 성격이 강했다. 五代後晉 시기에 翰林學士院이 설치되면서 이후 거란(요)과 송에서도 이 제도를 계승했다. 송의 제도에서 한림학사는 翰林承旨의 아래였고 知制誥보다는 상위인 正3品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錢惟演 : 962∼1034, 북송의 관인. 杭州 錢塘(치소는 현재 중국 浙江省 杭州) 사람으로 字는 希聖이다. 吳越王 錢俶의 차남이다. 아버지를 따라 송에 귀부하여 여러 차례 발탁의 과정을 거쳐 右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진종 시기에 直秘閣, 知制誥, 翰林學士, 樞密副使 등의 직을 역임했다. 인종이 즉위한 이후에 樞密使로 승진했다. 당시 권신 丁謂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丁謂와 함께 寇準을 축출하기도 했다. 乾興 元年(1022)에는 태후와 혼인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保大軍節度使 겸 知河陽府가 되었다. 同中書門下平章事의 호칭이 더해졌고, 判許州 등의 직을 역임하고 崇信軍節度使로 관직 경력을 끝맺었다. 이후에 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金坡遺事』, 『家王故事』 등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敎坊 : 북송의 관청. 관청의 명칭으로 敎坊司라고도 칭한다. 唐, 五代 시기에 설치되었다. 송에서는 太常寺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연회를 위한 樂舞를 관장했다. 使가 1인이고 副使가 2인이었으며, 그 아래에는 都色長, 色長 등이 있었다. 金代에는 宣徽院에 소속되었고, 元代에는 禮部에 소속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舍人院 : 북송의 관청. 송대에는 中書省에 소속되었다. 詔令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관장했다. 송대 초기에는 中書舍人만이 있었고 별도의 직무 분담이 없었지만, 후에 知制誥와 直舍人院을 두면서 翰林學士와 함께 임무를 맡았다. 元豐 연간의 관제 개혁이 이루어질 때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京府衙前 : 京師에 있는 府城을 京府라고 칭했는데, 이 명칭은 송대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京府衙前은 京府에서 일하는 衙前들을 지칭하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館閣官 : 송대 초기에 唐, 五代의 제도를 이어받아 昭文館, 史館, 集賢院을 三館이라고 했다. 太平興國 3年(978)에 새로 三館을 짓고 이를 崇文院이라고 통칭했다. 端拱 元年(988)에는 숭문원 내에 秘閣을 두었고 이후 三館秘閣이라 불렀다. 이를 줄여서 館閣이라 부른 것이며, 여기에 있는 관원들을 館閣官이라고 한 것이다. 궁정에 있는 서적 편찬, 교정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知制誥 : 북송의 관직. 唐代에 설치되어 중요한 詔令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관장했다. 中書省에 소속되어 舍人들로 충임하다가 開元 초기가 되면 翰林學士와 그 외의 文官들로 충임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른 관료가 詔勅, 策命을 관장하면 兼知制誥라 칭했다. 송대에는 翰林學士들이 모두 知制誥의 직함을 더해서 가졌고, 內制라고 칭했다. 한림학사가 아닌 다른 관료가 知制誥가 되면, 이는 外制라고 불렀다. 내제와 외제를 합쳐서 兩制라고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晏殊 : 991∼1055. 북송의 관인. 撫州 臨川(현재 중국 江西省 撫州) 사람으로 字는 同叔이다. 景德 2年(1005)에 同進士出身을 하사받고 秘書省正字에 발탁되었다. 天禧 연간에 여러 번 승진하여 知制誥, 翰林學士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명을 받들어 『眞宗實錄』을 함께 찬수했다. 天聖 3年(1025)에는 樞密副使에 발탁되었다. 天聖 5年(1027)에 탄핵되어 知宣州로 좌천되었고 곧 知應天府가 되었다. 여기에서 학교를 일으켜 范仲淹에게 학생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明道 元年(1031)에 參知政事까지 되었지만, 인종이 親政을 하면서 知亳州로 좌천되었다. 寶元 元年(1038)에는 三司使에 제수되었고, 康定 元年(1040)에는 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가 곧 樞密使가 되었다. 慶曆 4年(1044)에는 탄핵을 받아 知潁州로 좌천되었다. 이후 병이 들어 京師로 돌아왔고, 사망한 이후 司空 겸 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元獻이다. 저술로는 『珠玉詞』, 『元獻遺文』 등이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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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신의 연회에 대한 한림학사 전유연(錢惟演)의 상언 자료번호 : jt.k_0003_0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