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순(天順) 원년 서역과의 통교 논의가 위리 장소(張昭)의 소(疏)에 의거 중지되었는데, 중하(中夏)가 안정되자 무신(武臣)을 보내 효유케 한 일
영종(英宗)이 나이가 어리고, 대신(大臣)은 휴양생식(休養生息)에 힘써, 중국을 피로하게 하면서까지 외번(外蕃)을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 지방에서 통교하고 조공하려는 나라가 매우 적었다. 천순(天順) 원년(1457)에 이르러 다시 서역과의 통교를 논의하였다. 대신(大臣)들 가운데 아무도 감히 진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충성스럽고 의로운 위리(衛吏) 장소(張昭)가 소(疏)를 올려 직언(直言)하여 통렬히 간언(諫言)하니, 통교의 일은 비로소 중지되었다. [천순] 7년(1463)에 천순제는, 중하(中夏)주 001가 안정되었는데 원방(遠方)의 번국(蕃國)[에서 보내는] 조공사절이 이르지 않는다 하여, 나누어 무신(武臣)을 보내어 새서와 채폐를 가지고 가서 효유케 하였다. 이에 도지휘 해영(海榮)·지휘 마전(馬全)이 합렬로 갔다.주 002 그러나 이로부터 내조하는 사신이 몹시 적었고, 합렬 또한 때에 맞추어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색인어
- 이름
- 영종(英宗), 장소(張昭), 천순제, 해영(海榮), 마전(馬全)
- 지명
- 중국, 서역, 합렬, 합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