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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실위(南室韋)는 거란 북쪽에 있는데 토지가 낮고 습하며 여름이면 북쪽 2개의 큰 산으로 이동해 살고 철(鐵)이 없어 고려에서 취함

  • 국가
    실위국(室韋國)
남실위(南室韋)거란 북쪽으로 3천리에 있는데, 토지는 [지대가] 낮고 습하며,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한다. 대발산(貸勃山) 주 001
각주 001)
貸勃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新巴爾虎左旗 동남쪽 大興安領 북부의 特爾莫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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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대산(欠對山) 주 002
각주 002)
欠對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鄂溫旗族 自治縣 동남쪽 大興安領 북부의 甫喀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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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산에 풀과 나무가 많고, 짐승이 넉넉하며, 또한 모기와 파리가 많아 사람들은 모두 나무 위의 집에 살며 그 [모기와 파리 떼의] 근심을 피한다. 점차 25부로 나뉘어 매부에는 몇몇의 막불만돌(莫弗瞞咄)이 있었는데, 마치 추장(酋長)과 같다. [막불만돌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그것을 잇고, 후계자가 끊기면 어질고 기백 있는 자를 택해서 [막불만돌로] 세운다. 그 풍속이 성년 남자는 모두 피발(被髮)주 003
각주 003)
被髮: 披髮과 같다. 『南齊書』에 탁발선비족은 披髮左衽하였다고 되어 있다. 披髮은 拓跋鮮卑의 대표적인 머리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헤친 것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간혹 머리를 일정 정도 길러서 묶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본래 室韋人은 索髮을 한다고 하였고, 索髮과 索頭 및 披髮(또는 被髮)은 모두 같은 형태로 추정된다. 拓跋鮮卑와 같은 연원을 갖는 柔然은 不絆髮인데 이것 역시 披髮이다. 또한 烏洛侯의 두발은 繩髮이라 하는데, 이것 또한 索髮과 같은 형태로서, 결국 披髮(또는 被髮)·索髮·繩髮은 모두 같거나 비슷한 두발형태로 생각된다. 따라서 拓跋鮮卑·室韋·柔然 및 烏洛侯는 같은 머리 모양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契丹·烏桓은 髡髮, 즉 머리카락을 두 가닥으로 땋아 두귀의 앞이나 뒤로 늘어뜨리고 이마에는 머리카락을 기르거나 혹은 기르지 않는 형태이다. 그러나 披髮·索髮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견은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李一友, 1984; 孫進己·于志耿, 1984; 鄭英德, 1984; 程溯洛, 1991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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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고], 부녀자는 반발(盤髮)주 004
각주 004)
盤髮: 머리를 둘둘 감아 또아리를 틀어 놓은 모양이다. 『魏書』에는 “束髮, 作叉手髻”라 하고, 『隋書』에는 “槃髮”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모두 같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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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며], 의복은 거란과 같다. 소[가 끄는] 수레에 타는데, 거제(蘧蒢)주 005
각주 005)
蘧蒢: 질긴 풀이나 풀뿌리 및 갈대 또는 대나무로 짠 거친 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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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덮개를 만들었고, 돌궐[이 쓰는] 전거(氈車)주 006
각주 006)
氈車: 펠트로 덮개를 만든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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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양과 같다.주 007
각주 007)
匈奴·烏桓·鮮卑·高車·柔然·突厥 등의 펠트(felt)와 목재로 만든 이동식 주거 형태로서 居室部와 車部로 이루어진 穹廬이다. 둥근 천정의 穹廬는 지붕이 마치 하늘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동시에는 穹廬를 해체하여 가재도구와 함께 수레에 실어 운반하고 때로는 애당초 지붕을 설치한 수레 안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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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건널 때에는 섶나무로 동여매어 뗏목을 만들거나, 혹은 가죽으로 배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말[을 탈 때]에는 곧 풀을 꼬아 안장을 만들고, 새끼줄을 매듭지어 고삐를 만든다. 잠자리를 꾸밀 때면 나무를 구부려서 방으로 삼고,주 008
각주 008)
『隋書』에는 “寢則屈爲屋”이라 하여 ‘匡’字가 없으며, ‘室’字는 ‘屋’자로 되어 있다. ‘匡’字가 없어야 해석이 더 자연스러울 듯한데, 여기서는 ‘匡’을 ‘꾸민다’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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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蘧蒢)로 위를 덮으며, 이동할 때는 [수레에] 싣고 간다. 돼지가죽으로 자리를 만들고, 나무를 얽어서 깔개를 만든다. 부녀자는 모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앉는다. 기후가 대부분 추워서 밭에서 거두는 것은 매우 적다. 양은 없고 말은 적으며 돼지와 소가 많다. 말갈(靺鞨) 주 009
각주 009)
靺鞨: 隋唐時代 滿州와 韓半島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주민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지역에 따라 수렵, 목축, 반농반목, 농경 등 다양한 생활양식을 보여주었다. 周代에 肅愼, 漢代에 挹婁라 불리는 집단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松花江 유역의 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勿吉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靺鞨이라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이후 高句麗, 渤海 등에 복속했었으며, 그 이후 遼代에는 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滿州라 불린 집단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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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풍속이 같은데, 혼인법에 양쪽 집이 서로 허락을 마치면, 바로 부인을 훔쳐 가고, 그러한 후에 [신랑 집에서] 소와 말을 보내 빙재[聘]주 010
각주 010)
聘: 聘財를 가리킨다.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財貨로서 娉財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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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으며, 다시 장차 부인은 [친정] 집으로 돌아가서 임신하기를 기다렸다가 [임신하면 신랑] 집으로 함께 따라 돌아오는 것은 서로 허락한다.주 011
각주 011)
『隋書』에는 “婚嫁之法, 二家相許, 壻輒盜婦將去, 然後送牛馬爲娉, 更將歸家. 待有娠, 乃相隨還舍.”로 되어 있어 몇 글자 차이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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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재가(再嫁)할 수 없는데, 죽은 사람의 처(妻)라 함께 살기가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락에는 모두 큰 시렁을 만들어 사람이 죽으면 그 위에 [시체를] 두었다. 상(喪)은 3년을 치르고, 한해에 오직 4번만 곡한다. 그 나라에는 철(鐵)이 없어 고려(高麗)에서 취한다. 담비가 많다.

  • 각주 001)
    貸勃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新巴爾虎左旗 동남쪽 大興安領 북부의 特爾莫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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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欠對山: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鄂溫旗族 自治縣 동남쪽 大興安領 북부의 甫喀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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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被髮: 披髮과 같다. 『南齊書』에 탁발선비족은 披髮左衽하였다고 되어 있다. 披髮은 拓跋鮮卑의 대표적인 머리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헤친 것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간혹 머리를 일정 정도 길러서 묶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본래 室韋人은 索髮을 한다고 하였고, 索髮과 索頭 및 披髮(또는 被髮)은 모두 같은 형태로 추정된다. 拓跋鮮卑와 같은 연원을 갖는 柔然은 不絆髮인데 이것 역시 披髮이다. 또한 烏洛侯의 두발은 繩髮이라 하는데, 이것 또한 索髮과 같은 형태로서, 결국 披髮(또는 被髮)·索髮·繩髮은 모두 같거나 비슷한 두발형태로 생각된다. 따라서 拓跋鮮卑·室韋·柔然 및 烏洛侯는 같은 머리 모양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契丹·烏桓은 髡髮, 즉 머리카락을 두 가닥으로 땋아 두귀의 앞이나 뒤로 늘어뜨리고 이마에는 머리카락을 기르거나 혹은 기르지 않는 형태이다. 그러나 披髮·索髮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견은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李一友, 1984; 孫進己·于志耿, 1984; 鄭英德, 1984; 程溯洛, 1991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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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盤髮: 머리를 둘둘 감아 또아리를 틀어 놓은 모양이다. 『魏書』에는 “束髮, 作叉手髻”라 하고, 『隋書』에는 “槃髮”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모두 같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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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蘧蒢: 질긴 풀이나 풀뿌리 및 갈대 또는 대나무로 짠 거친 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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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氈車: 펠트로 덮개를 만든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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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匈奴·烏桓·鮮卑·高車·柔然·突厥 등의 펠트(felt)와 목재로 만든 이동식 주거 형태로서 居室部와 車部로 이루어진 穹廬이다. 둥근 천정의 穹廬는 지붕이 마치 하늘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동시에는 穹廬를 해체하여 가재도구와 함께 수레에 실어 운반하고 때로는 애당초 지붕을 설치한 수레 안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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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隋書』에는 “寢則屈爲屋”이라 하여 ‘匡’字가 없으며, ‘室’字는 ‘屋’자로 되어 있다. ‘匡’字가 없어야 해석이 더 자연스러울 듯한데, 여기서는 ‘匡’을 ‘꾸민다’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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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靺鞨: 隋唐時代 滿州와 韓半島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주민들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지역에 따라 수렵, 목축, 반농반목, 농경 등 다양한 생활양식을 보여주었다. 周代에 肅愼, 漢代에 挹婁라 불리는 집단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松花江 유역의 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勿吉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靺鞨이라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이후 高句麗, 渤海 등에 복속했었으며, 그 이후 遼代에는 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滿州라 불린 집단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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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聘: 聘財를 가리킨다.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財貨로서 娉財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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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隋書』에는 “婚嫁之法, 二家相許, 壻輒盜婦將去, 然後送牛馬爲娉, 更將歸家. 待有娠, 乃相隨還舍.”로 되어 있어 몇 글자 차이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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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남실위(南室韋), 거란, 대발산(貸勃山), 흠대산(欠對山), 거란, 돌궐, 말갈(靺鞨), 고려(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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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실위(南室韋)는 거란 북쪽에 있는데 토지가 낮고 습하며 여름이면 북쪽 2개의 큰 산으로 이동해 살고 철(鐵)이 없어 고려에서 취함 자료번호 : jo.k_0015_0094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