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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대반숙녜(大伴宿禰; 오토모노스쿠네)

천신(天神)
 
대반숙녜(大伴宿禰; 오토모노스쿠네)
 고황산령존(高皇產靈尊; 다카미무스비노미코토)의 5세손 천압일명(天押日命; 아마노오시히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처음에 천손(天孫) 언화경경저존(彦火瓊瓊杵尊; 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이 땅에 내려오실 때 천압일명(天押日命; 아마노오시히노미코토)과 대래목부(大來目部; 오쿠메라)가 먼저 출발하여 일향(日向)의 고천수봉(高千穗峯)으로 내려갔다. 그 후 대래목부가 천차부(天靫部)가 되었다. 차부(靫負)라는 칭호가 이로부터 말미암았다. 웅략천황(雄略天皇) 대에 입부차부(入部靫負)를 대련공(大連公)에게 사여하자, 대련공은 “위문(衛門)을 열고 닫는 임무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한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저의 아들 어(語; 가타리)가 함께 좌우에서 지킬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천황이 “상주한 대로 하라.”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대반씨(大伴氏)와 좌백씨(佐伯氏)가 좌우에서 문을 개폐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연유이다.
 
【주석】
1. 대반숙녜(大伴宿禰)
대반(大伴; 오토모)이라는 씨명은 대반부(大伴部; 오토모노베)를 관장한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13년(684) 12월 기묘조에 따르면 새로운 사성 정책에 따라 50씨에 달하는 제씨에게 숙녜의 성을 주었는데, 그중에 대반련도 포함되어 있다. 대반숙녜의 옛 씨성이 대반련(大伴連; 오토모노무라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모두 23명의 대반련씨가 보인다. 최초는 『일본서기』 수인기 25년 2월갑자조에 보이는 무일(武日)이다. 수인천황이 5명의 대부를 불러 신기(神祇)를 잘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는데, 그중에 대반련의 원조(遠祖) 무일이 등장한다. 무일은 경행천황 대에는 일본무존을 도와 동국의 하이를 치고 있다. 이후 중애 9년 2월조에 4명의 대부 중에 대반련무이(大伴連武以)가 보인다. 이후 대반련씨가 다시 보이는 것은 윤공 대의 대반련실옥(大伴連室屋)이다. 실옥은 웅략 대에 대련(大連)이 된 후, 청녕, 현종, 무열 대에 대련을 역임하였다.
대반련실옥의 아들 대반련담(大伴連談)은 웅략천황의 명으로 그의 종인(從人) 대반련진마려(大伴連津麻呂)와 함께 신라를 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대반련실옥의 손자 금촌(金村)은 인현천황이 죽은 후 태자[무열천황]의 명으로 대신 평군진조((平群眞鳥) 부자를 치고, 그 공으로 무열 대에 대련이 되었다. 무열의 사후에 계체을 영입하고, 대련이 되었다. 이후 안한, 선화, 흠명 대에도 대련이었으나, 흠명 초에 백제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을 받고 실각하였다.
선화 대에는 금촌대련(金村大連)의 아들 반(磐)이 축자에서 삼한을 대비하였고, 다른 아들 협수언(狹手彦)이 신라에 침공당한 임나를 도우러 파견되어, 임나 지역을 진압하고 백제를 구원하였다. 선화 대에는 금촌대련이 화(火) 지역의 위북국조(葦北國造)의 아들 일라(日羅)를 백제 조정에 파견하였다. 일라는 백제에서 달솔까지 올라갔다. 협수언은 흠명 대인 562년에는 대장군으로서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의 계략으로 고구려를 쳐서 이겼다고 한다. 민달천황 대에는 백제에서 벼슬하던 일라를 귀국시켰는데, 이때 대반련강수(大伴連糠手)가 그를 접대하고 국정에 대해 물었다. 강수의 딸 소수자(小手子)는 숭준이 즉위한 후 비(妃)가 되었다.
용명 대에는 소아마자대신의 측근으로 대반련비라부(大伴連比羅夫)가 보이며, 숭준 대인 590년에는 협수언의 딸 선덕(善德)이 대반련박(大伴連狛)의 부인 등과 함께 출가하였다고 한다.
숭준 즉위전기에서는 대반련교(大伴連嚙)가 대신 소아신마자(蘇我臣馬子) 측에서 활약하여 숭준천황 즉위에 공을 세우고, 숭준 4년에 임나를 세우기 위해 축자에 군대를 보낼 때 4명의 대장군 중 한 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반련교는 추고 9년 3월 갑신삭 무자조에서는 임나를 세우기 위해 고구려에 파견되었다가, 다음해 6월에 백제에서 돌아왔다. 추고 16년 8월에는 수의 사신 배세청의 국서를 추고천황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추고 18년 10월에는 신라와 임나의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에 참가하였다.
그 후 대반련마사(大伴連馬飼)가 서명, 황극, 효덕 대에 활약하였다. 서명 4년 10월에 당의 사신 고표인을 접대하였다. 황극 원년 12월에는 서명천황의 장례에서 소덕(小德)으로 조사를 읽었다. 황극천황 3년 6월에는 백합을 헌상하였다. 그는 을사의 정변으로 즉위한 효덕의 즉위식에서 효덕천황이 단에 올랐을 때 호위하였다. 이때부터는 마사 대신에 장덕(長德)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대화 5년 4월에 대자(大紫) 좌대신이 되어, 신하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이후 제명천황 대와 천지천황 대에는 대반련씨가 보이지 않는다. 대반련씨가 다시 보이는 것은 천무천황 대이다. 672년 6월 22일 대해인황자[천무천황]가 임신의 난을 일으킨 후 사인(舍人) 대반련우국(大伴連友國)과 대반련마래전(大伴連馬來田)이 함께 하였고, 엽사(獵師)의 수령인 대반박본련대국(大伴朴本連大國)이 합류하였다. 또한 대반련취부(大伴連吹負)는 대해인황자 측의 장군이 되었고, 대반련안마려(大伴連安麻呂) 등도 대해인황자 측에서 활약하였다. 671년 7월 말 임신의 난에서 대해인황자가 승리하여 다음해 2월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천무천황 대인 683년 6월과 8월에 마래전과 취부는 죽는데, 임신년의 공적으로 각각 대자(大紫), 대금중(大錦中)을 추증받았다. 천무 대에는 675년 3월에 소금상(小錦上) 대반련어행(大伴連御行)이 병정차관(兵政次官)으로 임명되었다. 679년 6월에는 대금상(大錦上) 대반련두옥(大伴連杜屋)이 죽었다. 천무천황 13년(684) 2월에는 소금중 대반련안마려가 도읍 예정지를 살피고 있다.
천무천황 13년 2월에 대반련은 숙녜를 사성받아 대반숙녜가 된다. 천무천황에게 대반숙녜를 사성받은 사람은 안마려와 어행(御行)이었다. 어행은 천무천황 14년 9월에 천무천황에게 옷을 하사받았다. 686년 9월 천무 사후에 지통천황이 칭제하였는데 이때 차려진 천무천황의 빈궁(殯宮)에서 안마려는 직광삼으로서 대장(大藏)과 관련된 조사(弔辭)를 읽었다. 지통천황 2년(690) 8월과 11월에도 안마려는 천무천황의 빈궁에서 조사를 읽었다. 어행은 691년 정월에 직대이(율령제의 종4위상)로서 봉호 80호를 받아 전의 봉호와 합쳐 300호를 받게 되었다. 어행은 694년 정월에는 정광사(율령제의 종3위)로 승서되었다. 696년 10월에는 대납언으로 자인(資人) 80인을 사여받았다. 689년 6월에 무대삼 대반숙녜수박(大伴宿禰手拍)이 찬선언사(撰善言司)로 임명되었고, 692년 4월에 대반숙녜우국(大伴宿禰友國)은 직대이를 추증받았다. 693년 3월에는 무대이(務大貳)대반숙녜자군(大伴宿禰子君)이 신라에 파견되는 사신으로서 비단, 비단솜, 포를 사여받았다. 그해 4월에는 내장료윤(內藏寮尹) 대반숙녜남인(大伴宿禰男人)이 장물죄로 처벌받았다.
『속일본기』에는 모두 60명의 대반숙녜씨가 보이며, 『일본후기』에는 26명의 대반숙녜씨가 보인다. 『일본후기』 홍인 14년(823) 하4월 임자조에 의하면 대반숙녜는 반숙녜(伴宿禰)로 씨명을 고쳤다. 823년 4월에 즉위한 대반친왕(大伴親王, 淳和天皇)의 이름과 같아서 기휘(忌諱)한 것이었다. 그 후 『속일본후기』와 『일본문덕천황실록』에는 모두 35명의 반숙녜씨가 보이고, 『일본삼대실록』에는 24명의 반숙녜씨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인물은 인화(仁和) 2년(886) 2월에 산위 종5위하로서 승진하여 형부소보(刑部少輔)에 보임된 반숙녜충행(伴宿禰忠行)이다.
『공경보임』에 의하면 대반숙녜씨는 8세기 전반에 어행(御行)과 안마려(安麻呂), 여인(旅人)이 대납언, 도족(道足), 우양(牛養)이 중남언, 형마(兄麿)가 참의로 임명되어 의정관으로 활약하였으나, 순인천황 대 후기 등원중마려정권 시대와 칭덕천황 대에는 의정관으로 임명된 대반숙녜씨가 보이지 않는다. 대반숙녜씨가 다시 의정관으로 임명된 것은 광인천황 대 후기다. 준하마(駿河麿), 백마(伯麿)가 참의로 임명되었고, 환무천황 대에는 가지(家持), 결족(潔足)이 참의가 되었다. 이후 평성천황과 차아천황 대에는 의정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없었으나, 순화천황 대에 국도(國道)가 참의로 임명되었다. 천장 5년에 국도가 죽은 후 다시 참의로 임명된 것은 인명천황 대인 승화 15년(849)으로 국도의 아들 반숙녜선남(伴宿禰善男)이 참의로 임명되었다. 선남은 청화천황 대인 864년에 대납언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866년에 응천문의 변이 일어나자 주모자로 붙잡혀 유배되었다. 이후 반숙녜씨가 의정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천경 2년(939)이다. 『공경보임』에 의하면 주작천황 천경(天慶) 2년(939)에 반보평(伴保平, 73세)이 참의로 임명되었고, 천경 5년(942) 7월 임인에 참의 반숙녜보평(伴宿禰保平)이 숙녜를 조신으로 고쳤다고 하므로 반숙녜씨가 반조신씨(伴朝臣氏)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
고황산령존(高皇產靈尊; 다카미무스비노미코토)은 『고사기(古事記)』에서는 고어산소일신(高御産巢日神; 다카미무스비노미코토), 고목신(高木神; 다카기노카미)으로 표기되었다. 『고사기』에서는 천지가 처음 출현하였을 때 천지어중주신(天之御中主神) 다음에 신산소일신(神産巢日神; 가무무수히노카미)과 함께 고어산소일신이 생겼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천지개벽 관련 기사의 본문에는 보이지 않고 「일서(一書)」 에만 등장하고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일서」의 천손강림신화에서 천손을 지상에 내려가도록 명하는 사령신(司令神)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 천압일명(天押日命)
천압일명(天押日命; 아마노오시히노미코토)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천인일명(天忍日命; 아마노오시히노미코토)으로 표기되었다. 이들 사서에서 천인일명은 천손 경경저존(瓊瓊杵尊)이 강림할 때 함께 내려왔다고 적고 있다. 『고사기』 신대 천손강림단에서는 천인일명이 대반련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으며, 『일본서기』 신대 천손강림조에서는 분주로 인용된 「일서」 에서 천인일명이 대반련의 먼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모두 천인일명을 대반련의 조상으로 적고 있지만, 천인일명이 누구의 후손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천인일명을 고황산령신의 후손으로 제시한 계보는 『신찬성씨록』 의 이 조문 이외에 『고어습유(古語拾遺)』에 보인다. 다만 『고어습유』에서는 천인일명이 고황산령신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어, 고황산령신의 5세손이라고 하는 본조의 주장과는 다르다. 『고어습유』 는 일본 조정의 제사를 담당한 재부(齋部)씨 출신의 재부광성(齋部廣成)이 807년경에 저술한 책이다. 『신찬성씨록』 이 편찬된 것이 815년이므로, 거의 같은 시기에 대반씨의 조상 천압일명의 계보에 대해 두 가지의 계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천손(天孫) 언화경경저존(彦火瓊瓊杵尊)
천손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손자라는 뜻이다. 천조대신은 『고사기』에서는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 『일본서기』에서는 천조대신, 대일운귀신(大日雲貴神; 오히루메노무치노카미) 등으로 표기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천지가 생겨난 최초의 천상계인 고천원(高天原; 다카마가하라)에 천지어중주신(天之御中主神;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 고어산소일신(高御産巢日神; 다카미무수히노카미), 신산소일신(神産巢日神; 가무무수히노카미)이 생겨났고, 이어서 우마지아사가비비고지신(宇摩志阿斯訶備比古遲神; 우마시아시카히히코지노카미)과 천지상립신(天之常立神; 아메노토코타치노카미)이 생겼고, 이어서 국지상립신(國之常立神)과 풍운야신(豐雲野神; 도요쿠모노노카미)이 생겼다. 그리고 이어서 우비지지신(宇比地遲神; 우히지히노카미)과 수비지지신(須比智遲神; 수히지노카미)을 비롯한 다섯 쌍의 남녀신이 생겨났다. 다섯 쌍의 남녀신 중에 아사나기신(伊邪那岐神; 아자나기노카미)과 이사나미신(伊邪那美神; 이자나미노카미)이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의 「일서(一書)」 에서는 이사나미가 죽어서 지중계(地中界)인 근국(根國; 네노쿠니)으로 간 뒤에 이사나기가 이사나미를 만나러 근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물로 몸을 닦고 나서 그의 왼쪽 눈에서 천조대어신(대일운귀신), 오른쪽 눈에서 월독명(月讀命; 츠쿠요미노미코토), 코에서 건속수좌지남명(建速須佐之男命; 다케하야수사노오노미코토)이 태어났다고 적고 있으나, 『일본서기』 의 본문에서는 이사나기와 이사나미가 자연신을 낳은 후에 대일운귀신을 낳았다고 적고 있다.
『고사기』에서는 이사나기가 천조대어신에게 고천원(高天原), 월독명에게 밤의 식국(食國), 건속수좌지남명에게 해원(海原)을 다스리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해원을 다스리라는 명을 받은 수좌지남명이 어머니 이사나미가 있는 근국에 가고 싶다고 계속 울었으므로, 이사나기가 그를 추방하였다. 수좌지남명은 근국에 가기 전에 누나 천조대어신을 만나려고 고천원으로 갔으나, 천조대신은 수좌지남명이 고천원을 빼앗으러 온 줄 알고 무장하였다. 수좌지남명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천조대신과 서약하였다. 이때 천조대신의 다섯 남신과 수좌지세 여신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 후 수좌지남명이 고천원에서 다시 난폭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천조대신이 천암호에 숨어 버려, 세상이 컴컴해졌다. 그러자 고황산령신의 아들 사겸신(思兼神; 오모이카네노카미)과 천아옥명신이 『고사기』에서는 천조대어신과 고목신(高木神; 다카기노카미)이 천조대어신의 아들 정승오승승속일천인수이명(正勝吾勝勝速日天忍穗耳命) 아들에게 “위원중국(葦原中國)을 평정하였으니 이전에 위임한 대로 지상으로 내려가 위원중국을 다스려라”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천인수이명은 “지상으로 내려가려고 준비하던 중에 아들 일자번능이이예명(日子番能邇邇藝命)이 태어났으므로, 이 아이를 내려 보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이예명은 3종의 신기를 가지고 천아옥명 등의 신들과 함께 고천원에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 도중에 원전비고신이 안내 역을 맡았고 마침내 이이예명은 축자(筑紫)의 고천수(高千穗; 다카치호)에 내려갔다고 한다.
5. 대래목부(大來目部)
대래목부는 대래목(大來目; 오쿠메), 구미부(久米部; 구메라), 구미명(久米命; 구메노미코토) 등으로 표기한다. 구미직(久米直; 구메노아타히), 내목부(來目部; 구메베) 등의 조상이다. 『고사기』에서는 신대 천손강림단에서 천손 강림 때에 대반련 등의 조상 천인일명(天忍日命)과 구미직(久米直; 구메노아타히) 등의 조상 천진구미명(天津久米命; 아마츠쿠메노미코토)이 활과 칼을 들고 먼저 축자 일향(日向) 고천수(高千穗; 다카치호)의 구사포류다기에 내려갔다고 적고 있다.
『신찬성씨록』 의 이 조문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대반련 등의 조상 천인일명과 대등하게 천손강림 때에 활약한 천진구미명(天津久米命; 아마츠쿠메노미코토)을 조상으로 가진 구미직씨 출신으로 활약하는 사람은 『고사기』 나 『일본서기』에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대반련씨의 먼 조상이 내목부씨의 먼 조상을 인솔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 신대(神代) 하(下) 제9단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일서(一書)」 에서 고황산령신(高皇産靈神)이 천손 경경저존(瓊瓊杵尊)에게 이불[眞床覆衾]을 덮어 하늘의 돌문[天岩戶]을 열고 겹겹의 구름을 헤치고 내려가게 하였다. 그때 대반련의 먼 조상 천인일명이 내목부의 먼 조상 천환진대래목(天槵津大來目; 아메쿠시노오쿠메)을 인솔하여 활과 칼로 무장하고 고천수(高千穗)의 이상봉(二上峯; 후타가미노타케)에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신무천황 즉위전기 무오년 10월 계사삭조에서는 즉위 이전의 신무천황이 도신명에게 대래목부(大來目部; 오쿠메라)를 인솔하여 인판읍(忍坂邑)에 큰 집을 짓고서 연회로 오랑캐를 유인하여 잡으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무천황 원년 정월 경신삭조에서도 대반씨의 원조 도신명이 대래목부를 이끌고 신무천황의 밀책을 받들어 풍자하는 노래를 불러 요기를 소탕하였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후에도 내목부씨가 대반련씨의 지휘를 받았음을 말해 주는 기사가 보인다. 즉 웅략천황 2년 추7월조에서는 백제의 지진원(池津媛)이 웅략천황의 뜻을 거부하고 석천순(石川楯)과 결혼하자 웅략천황이 대반실옥대련(大伴室屋大連)에게 명하여 이 부부의 화형을 내목부가 집행하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내목부씨 중에서 사서에 활약상이 보이는 사람은 『일본서기』 의 청녕천황 대와 현종천황 대에 활약하는 내목부소순(來目部小楯, 또는 磐楯)이 유일하다. 그는 이예국(伊豫國) 출신으로 청녕천황 2년 11월에 파마국(播磨國)에 파견되었다가 거기에서 이중천황의 두 손자를 발견하여 모시고 돌아왔다. 후사가 없던 청녕천황이 죽자 그중의 한 명이 천황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현종천황이다. 현종이 즉위하자 소순에게 산부련(山部連)을 사성하여 내목부소순은 산부련의 조상이 되었다.
6. 천차부(天靫部)
천차부는 이곳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차부에 수식어로 천(天)을 붙여 천차부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차는 화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도록 만든 화살통을 가리킨다. 따라서 차부(靫部)는 궁수 부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 경행 40년 시세조에서 차부(靫部)를 대반련의 먼 조상 무일(武日)에게 사여하였다고 적고 있는 것이 차부에 관한 최초의 기사다. 그 후 청녕 2년 2월조에서 대반실옥대련을 제국에 파견하여 백발부사인(白髮部舍人), 백발부선부(白髮部膳夫), 백발부차부(白髮部靫負)를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백발은 청녕천황의 이름이다. 대반실옥대련이 청녕천황을 위해 사인, 선부, 부차를 전국에서 선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계체천황 원년 2월 경자조에서는 대반금촌대련이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그는 백발천황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조부 대반대련실옥이 주(州)마다 3종의 백발부를 설치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기사의 분주에서는 3종이 백발부사인(白髮部舍人), 백발부공선(白髮部供膳), 백발부차부(白髮部靫負)라고 적고 있다.
그 후 안한 2년 4월 정축삭조에서는 구사인부(勾舍人部)와 구차부(勾靫部)를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구천황(勾天皇, 안한천황)을 위해 사인부(舍人部)와 차부(靫部)를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입부차부(入部靫負)
입부라는 말은 『일본서기』 대화(大化) 2년(646) 3월 임오조에서 보인다. 이에 따르면 효덕천황은 옛 천황 대에 설치한 자대입부(子代入部), 황자 등이 사유한 어명입부(御名入部), 황조대형(언인대형황자, 황극천황·효덕천황·천지천황의 조부)의 어명입부와 둔창을 그대로 둘 것인지 여부를 중대형황자에게 상의하였는데, 중대형황자는 이에 대해 입부와 봉민 중에서 사정(仕丁)을 뽑도록 하고 사사롭게 부려먹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건의하면서 입부 524구와 둔창 181개소를 헌납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입부는 자대입부와 어명입부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천황에 소속된 자대입부와 황자 등에 소속된 어명입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부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궁수 부대이다. 따라서 입부차부는 천황이나 황자에게 소속된 궁수 부대를 가리킨다.
대반씨와 입부차부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집해(令集解)』 직원령(職員令) 좌위사부(左衛士府)조에 인용된 홍인(弘仁) 2년(811) 11월 28일자 태정관부에 보인다. 여기에서는 산위 종5위하 대반숙녜목마려(大伴宿禰木麻呂)와 우병위고두(右兵衛庫頭) 종5위하 좌백숙녜금산(佐伯宿禰金山) 등이 해(解)를 올려 “우리들의 조상 실옥대련공(室屋大連公)이 차부(靫負) 3천 명을 이끌고 좌우에서 지켰으므로 위문(衛門)을 열고 닫는 일을 대대로 이어왔다”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8. 대련공(大連公)
여기에서 대련공은 웅략천황 대에 대련이었던 대반실옥대련을 가리킨다.
9. 어(語)
『일본서기』에서는 담(談; 가타리)라고 적고 있다. 웅략천황 9년(465) 3월조에 신라를 치기 위해 파견되어 전사한 대반담련(大伴談連)이 보인다. 대반씨 계보인 『반계도』에서는 실옥(室屋)의 아들로 담(談)과 어물(御物)을 배치하고, 담(談)의 아들로 금촌(金村)을 배치하였다. 한편 또 다른 대반씨 계보인 『고옥가가보(古屋家家譜)』에서는 건지련공(建持連公)의 아들로 실옥대련공(室屋大連公), 담련공(談連公), 장목련공(長目連公)을 배치하고, 실옥대련공의 아들로 금촌대련공을 배치하였다. 『반계도』와 『고옥가가보』에서는 모두 웅략천황이 신라를 쳤을 때 담련공이 전사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고옥가가보』에서는 담련공이 일봉련(日奉連)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10. 대반씨(大伴氏) 좌백이씨(佐伯二氏) 장좌우개합지연야(掌左右開闔之緣也)
『신찬성씨록』 의 이 조문에서는 웅략천황이 입부차부를 대반실옥(大伴室屋)에게 사여하자 그가 위문을 열고 닫는 임무는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아들 어(語)와 함께 이를 담당하게 해 달라고 웅략천황에게 요구하여 허가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대반씨와 좌백씨가 좌우에서 문을 개폐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연유라고 적고 있다. 대반실옥이 궁문 개폐를 담당한 후 대반씨와 좌백씨가 이 일을 계속 이어간 것은 앞에서 언급한 홍인 2년의 태정관부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속일본기』 보귀(寶龜) 2년(771) 11월 계묘조에서 광인천황 즉위 후 거행된 대상(大嘗) 때에 대화수(大和守) 종4위상 대반숙녜고자비(大伴宿禰古慈斐)와 좌대변 겸 파마수(播磨守) 종4위상 좌백숙녜금모인(佐伯宿禰今毛人)이 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연희식(延喜式)』(927) 좌위문부(左衛門府) 대의(大儀)조에 반씨(伴氏) 5위 1명과 좌백씨 1명이 문부(門部) 3명씩 인솔하여 궁문으로 들어가 회창문 안의 왼쪽 행랑에 가서 때가 되면 문을 열도록 명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의 천조대상제(踐祚大嘗祭)반폐(班幣)조에서는 반(伴)과 좌백(佐伯) 각각 두 명이 남문 좌우의 행랑으로 가서 때가 되면 문을 연다고 적고 있다. 또한 같은 책 유(油) 이하 조에서는 반씨와 좌백씨 각 두 명이 대상궁(大嘗宮)의 남문을 연다고 적고 있다. 같은 책 진일(辰日)조에서는 제사가 끝나고 백관이 물러가면 반씨와 좌백씨가 문을 닫는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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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숙녜(大伴宿禰; 오토모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