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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화기조신(和氣朝臣; 와케노아소미)

화기조신(和氣朝臣; 와케노아소미)
 수인천황(垂仁天皇; 스이닌텐노)의 황자 탁석별명(鐸石別命; 누데시와케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벌하고 개선하였다. 다음해 황후가 도읍으로 돌아갈 때 인웅별황자(忍熊別皇子; 오시쿠마와케노미코) 등이 몰래 역모를 꾸며 명석(明石; 아카시)의 나루터에 병사를 준비하고 기다렸다. 황후가 이를 알고 제언왕(弟彦王; 오토히코노미코)을 침간길비(針間吉備; 하리마기비)의 경계에 파견하여 관(關)을 지어 방어하게 하였다. 이른바 화기관(和氣關; 와케노세키)이 이것이다. 진압한 뒤에 천황을 따른 공을 기록하고 봉지를 주었다. 이로 인해 길비의 반리현(磐梨縣; 이와나시노아가타)을 받아 비로소 가(家)를 이루고, 광인천황(光仁天皇) 보귀(寶龜) 5년에 다시 화기조신(和氣朝臣)이라는 성을 받았다. 『속일본기』와 합치한다.
 
【주석】
1. 화기조신(和氣朝臣)
화기(和氣; 와케)라는 씨명은 율령제 비전국(備前國)의 반리군(磐梨郡) 화기(和氣; 와케)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강산현(岡山縣) 화기군(和氣郡) 일대에 해당된다.
『속일본기(續日本紀)』 보귀(寶龜) 5년(774) 9월 갑자조에 종5위하 화기숙녜청마려(和氣宿禰清麻呂)와 화기숙녜광충(和氣宿禰廣蟲)에게 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속일본기』에 기재된 화기조신청마려(和氣朝臣清麻呂)의 졸전(卒傳)에 의하면 청마려의 본성(本姓) 즉 본래 씨성(氏姓)은 반리별공(磐梨別公; 이와나수와케노키미)이었으나 뒤에 등야화기진인(藤野和氣眞人; 후지노와케노마히토)으로 개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화기조선청마려의 원래 씨성이 반리별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리(磐梨)나 등야(藤野는모두 비전국(備前國)의 지명으로 청마려가 비전국 호족 출신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본조에 기재된 수인천황 황자 탁석별명의 후손 제언왕(弟彦王)이 길비의 경계에 관(關)을 세운 것이나 길비의 반리 지역에 가를 이루었다는 전승에도 기술되어 있다.
『속일본기』에 청마려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5) 정월 기해조이다. 여기에는 종6위상 등야별진인청마려(吉備藤野別眞人淸麻呂; 후지노와케노마히토키요마로)로 나온다. 이때 그는 천평보자 8년(764) 9월에 일어난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 후지와라노나카마로)의 난 때 세운 공으로 누나 종5위하 등야별진인광충(藤野別眞人廣蟲, 혹은 등야별진인광충녀[藤野別眞人廣蟲女]라고도 표기)과 함께 칭덕천황에게 훈6등을 사여 받았다. 등야별진인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마려가 765년 1월 이전의 어느 시기엔가 등야별진인이라는 씨성을 사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등야별진인이라는 씨성을 가진 사람으로 사서에 이름이 보이는 사람은 청마려와 그의 누나 광충 뿐이다. 이것은 등야별진인이 이 2사람을 대상으로 한 사성임을 나타낸다. 진인(眞人)이라는 성은 ‘천무8성’ 가운데 가장 높은 성으로, 6세기 제26대 계체(繼體)천황 이후 천황의 근친이나 자손에게 주로 사여되었다. 청마려가 반리별공(磐梨別公)이 계체천황 이후의 천황에게서 갈라져 나왔다는 계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칭덕천황(稱德天皇, 재위; 764~770)에게 등야별진인이라는 씨성이 내려졌을 것이다. 이 2인은 반리별공에서 등야별진인으로 개성한 뒤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4) 3월 갑진조 이후 길비등야화기진인(吉備藤野和氣眞人; 기비노후지노와케노마히토),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5월 을미조 이후 보치능진인(輔治能眞人; 후지노마히토), 신호경운 3년 9월 기축조 이후 별부(別部; 와케베), 보귀 2년(771) 3월 병술조 이후 화기공(和氣公; 와케노키미), 같은 해 9월 기해조 이후 화기숙녜(和氣宿禰; 와케노스쿠네), 보귀(寶龜) 5년(774) 9월 갑자조 이후 화기조신(和氣朝臣; 와케노아소미) 등으로 기술된 특이한 씨족이다. 이러한 개성과 폄성(貶姓)은 칭덕조에서 환무조에 걸친 청마려와 광충의 관인으로서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청마려와 광충이 칭덕천황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일본후기』 연력(延暦) 18년(799)정월 을축조의 화기조신광충(和氣朝臣廣蟲)의 졸전에는 “광충은 젊었을 때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고야천황(高野天皇, 효겸천황[孝謙天皇], 칭덕천황[稱德天皇]으로 중조[重祚])을 모셨다. 인품이 정순하고 절조가 있었다. 그녀의 사적에 대해서는 청마려의 전기에 실려 있다. 환무천황이 신뢰하여 중용하였고, 순화천황(淳和天皇)은 그녀 생전의 근무와 공적을 생각하여 정3위를 추증하였다. 향년 70세다.”라고 적혀 있다. 광충이 칭덕천황에게 특별히 중용된 것은 칭덕천황의 출가와 관련이 있다. 칭덕천황은 성무천황(聖武天皇)의 양위를 받아 749년에 즉위하였는데, 이때의 그녀를 효겸천황이라고 부른다. 효겸천황은 천평보자 2년(758) 8월 모후 광명황태후(光明皇太后)의 병간호를 위해 대취왕(大炊王, 순인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천평보자 4년(760) 7월에 광명황태후가 죽고, 근강국에 새로 건설 중이던 보량궁(保良宮)에 함께 머물렀다. 이 때 효겸상황과 순인천황이 효겸상황을 간병하였던 승려 도경(道鏡; 도쿄) 문제로 사이가 나빠져 천평보자 6년(762) 5월 23일에 두 사람은 평성경(平城京)으로 돌아갔다. 순인천황은 평성궁의 중궁원(中宮院)으로, 효겸상황은 출가하여 법화사(法華寺)에 들어갔다. 법화사는 광명황후가 자신의 황후궁(皇后宮)을 천평(天平) 10년(745) 5월에 비구니사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효겸상황이 출가한 천평보자 6년 5월에 광충도 함께 출가한 것이다. 이후 광충은 법균(法均)이라는 법명도 가지게 되었다. 또 764년 9월에 일어난 등원중마려의 난을 효겸상황 측이 진압하고 10월에 효겸상황이 다시 천황(칭덕천황)으로 즉위한 뒤 법균도 비구니로서 칭덕천황의 측근에서 여관으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칭덕천황이 청마려와 그의 누나 법균(광충)에게 등야별진인이라는 씨성을 내린 것이다. 또 『속일본기』 천평신호 원년 3월 갑진조에 칭덕천황이 등원별진인청마려(藤野別眞人淸麻呂)와 광충(법균)에게 길비등야별진인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길비를 씨성 앞에 추가할 수 있게 한 것은 길비국의 대표적인 씨족임을 보증한 것이다. 『속일본기』 신호경운 3년(769)년 5월 을미조에는 길비등야별진인청마려 등에게 보치능진인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한다. 보치능(輔治能; 후지노)은 등야(藤野; 후지노)를 다른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속일본기』 신호경운 3년 9월 기축조에 이러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킨 사건이 기재되어 있다. 미혼의 여성천황이었던 칭덕천황이 황태자를 책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호경운 3년(769)에 대재부(大宰府)의 주신(主神) 습의아증마려(習宜阿曾麻呂; 스게노아소마로)가 도경을 천황으로 삼으면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는 우좌팔번궁(宇佐八幡宮)의 신탁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확인하는 절차로 칭덕천황이 신뢰하던 청마려를 파견하였다. 청마려가 대재부에서 돌아와 “신하가 천황이 된 경우는 없으며, 무도한 사람을 물리치라.”라는 신탁을 들었다고 보고하였다. 칭덕천황은 청마려의 관위를 박탈하고 별부예마려(別部穢麻呂; 와케베노키타나마로)라고 부르게 하고, 그를 구주(九州)의 대우(大隅)로, 청마려의 누나 법균(광충)도 환속시켜 비후(備後)로 유배 보내었다. 칭덕천황이 그 다음해 8월에 죽고 백벽왕(白壁王, 뒤에 광인천황[光仁天皇])이 황태자가 된 뒤 청마려와 광중(광충)이 유배에서 풀려나 평성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 별부예마려의 씨명 별부(別部; 와케베)를 화기(和氣; 와케)로 고치고 이름도 원래 이름인 청마려로 불리게 되었다. 770년 10월에 백벽왕(白壁王, 광인천황[光仁天皇])이 즉위하였다. 『속일본기』에는 보귀(寶龜) 2년(771) 9월 기해조에 화기숙녜라는 씨성을 내리고 이어서 보귀 5년(774) 9월 갑자조에 화기조신을 사여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화기조신을 사성 받는 과정에서 청마려는 자신의 조상계보를 새로 만들어 제출하였을 것이다. 이 계보는 청마려의 졸전에 보이는 11대 수인천황의 후손이라는 계보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청마려와 누나 광충은 조신이라는 성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화기조신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보귀 5년(774) 9월 갑자조의 조신 성을 받은 종5위하(極位) 화기숙녜청마려(和氣宿禰淸麻呂)와 광충(廣蟲), 『일본후기』 연력 16년(797) 2월계해조의 종5위상(극위) 화기조신광자(和氣朝臣廣子)가 있으며, 대동(大同) 원년(806)5월 갑자삭조에 좌중변(左中辨)에 보임된 정5위하(극위) 화기조신광세(和氣朝臣廣世)는 대학두(大學頭)와 미작수(美作守)도 이전과 같이 겸임하였다. 또 대동(大同) 원년(806)4월 정미조에 무위에서 종5위하(극위)로 승서된 화기조신사자(和氣朝臣嗣子)가 있다. 화기조신사자는 화기조신광세의 어머니이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승화(承和) 13년(846) 9월 을축조에는 참의(參議) 종4위상(극위) 화기조신진강(和氣朝臣眞綱)의 졸전이 기록되어 있다. 진강은 고(故) 민부경(民部卿) 종3위 화기청마려(和氣淸麻呂)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연력 22년(803) 내사인(內舍人), 대동 4년(809) 치부중무승(治部中務丞), 홍인(弘仁) 6년(815)에 종5위하로 승진하여 좌우대소변(左右大少弁), 좌우중소장(左右中少將)을 거쳐 종4위에 이르렀고, 64세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속일본후기』 승화 원년(834) 2월 갑오조의 치부대보(治部大輔) 종4위하 화기조신중세(和氣朝臣仲世) 등이 있다. 『일본문덕천황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 인수(仁壽) 2년(852) 2월 병진조에 산위(散位) 종4위상 화기조신중세(和氣朝臣仲世)의 졸전이 기재되어 있다. 중세는 민부경 정3위 청만려(淸萬呂)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문장생(文章生)이 되었고, 대동 원년에 대학대윤(大學大允), 홍인 6년에 식부대승(式部大丞), 홍인 10년에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천장(天長) 원년에는 북륙도순찰사(北陸道巡察使) 천장 4년에는 근강개(近江介), 승화 4년에는 탄정대필(彈正大弼)이 되었다. 승화 7년에는 감해유장관(勘解由長官), 승화 11년에는 파마수(播磨守)로 활동하였다. 69세에 병사하자 국인들이 애통해하였다고 적혀 있다.
2. 수인천황(垂仁天皇)
『일본서기』에 수인이 제11대 천황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실존 여부에 관해서는 부정적이다. 『고사기(古事記)』숭신천황단에는 이구미입일자이사지명(伊玖米入日子伊沙知命; 이쿠메이리히코이사치노미코토), 수인천황단에는 이구미이리비고이좌지명(伊玖米伊理毗古伊佐知命; 이쿠메이리비코이사치노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수인’ 앞에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시(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諡)’라는 11글자가 있고, ‘수인’ 다음에 ‘천황(天皇)’이라는 2글자는 없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3. 탁석별명(鐸石別命)
수인천황의 황자이다. 『일본서기』에는 탁석별명(鐸石別命; 누데시와케노미코토), 『고사기』에는 소대별명(沼帯別命; 누타라시와케노미코토)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후기』 연력 18년(799) 2월 을미조에는 화기청마려(和氣淸麻呂)의 출자를 설명하면서 수인천황의 황자 탁석별명(鐸石別命)이라고 적고 있다. 『신찬성씨록』 좌경 황별(하) 「도성임생공(稻城壬生公)」 조에도 수인천황의 황자 탁석별명(鐸石別命; 누데시와케노미코토)의 후손이라는 계보 기사가 실려 있다. 또 섭진국 황별의 「산변공」 조에는 화기조신과 조상이 같으며 대탁석화거명(大鐸石和居命; 오누데시와케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적혀 있다. 좌경 황별(하) 「도성임생공(稻城壬生公)」 조(112)의 탁석별명 참조.
4. 신공황후정벌신라(神功皇后征伐新羅)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신공’ 앞에 기장족희황후시(氣長足姬皇后諡)」 라는 글자가 있고, 신공 다음의 ‘천황(天皇)’이라는 2글자는 없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일본후기』 연력(延曆) 18년(799) 2월 을미조에는 “화기조신청마려의 선조는 수인천황의 황자 탁석별명에서 나와 3세손 제언왕(弟彦王)이 신공황후를 따라 신라 정토에 출정하였다. 신라에서 개선한 다음 해에 인웅별황자가 반역하자 황후가 제언왕을 파견하여 파마국(播磨國)과 길비국의 경계에 있는 산에서 주살하였다. 이 군공에 의거해 제언왕에게 등원현(藤原縣)이 내려졌고 길비 지방에서 가(家)를 이루었다.”라고 적혀 있다.
5. 인웅별황자(忍熊別皇子)
중애천황의 황자이다. 『일본서기』 중애 2년 정월 갑자조에는 인웅황자(忍熊皇子; 오시쿠마노미코), 신공황후 섭정 원년 2월조에는 인웅왕(忍熊王; 오시쿠마노미코), 『고사기』에는 중애천황단에 인웅왕(忍熊王)으로 나온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원년 3월조에 의하면 신공황후의 명을 받은 무내숙녜(武內宿禰) 등이 이끈 정병에게 패배한 뒤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6. 제언왕(弟彦王)
수인천황의 황자이다. 『일본후기』 연력(延曆) 18년(799) 2월 을미조에는 수인천황의 황자 탁석별명의 3세손 제언왕(弟彦王)이라고 나온다. 〈화기씨계도(和氣氏系圖)〉(『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권171)에는 전수별왕(田守別王) 혹은 건진별왕(健眞別王)의 아들로 제언왕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7. 반리현(磐梨縣)
반리현은 율령제 비전국(備前國, 현재 강산현[岡山縣]) 등원군(藤原郡; 후지와라군) 일대에 해당된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양로(養老) 5년(721) 적판군(赤坂郡; 아카사카군)과 읍구군(邑久郡; 오쿠군)의 일부를 떼어내 등원군을 설치하였고, 신귀(神龜) 3년(726) 11월을해조에 등원군의 이름을 바꾸어 동야군(東野郡; 도노노군) 혹은 등야군(藤野郡; 후지노군)이라 불렀다.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6월 을축조에 개명하여 화기군(和氣郡; 와케군)이라 칭하였고, 연력 7년(788) 6월 계미조에 길정천(吉井川)의 이서 지역이 반리군(磐梨郡; 이와나시군)으로 이동 지역이 화기군(和気郡; 와케군)으로 분할되었다.
8. 광인천황(光仁天皇)
제49대 천황으로 770~781년까지 재위하였다. 원래 이름은 백벽왕(白壁王; 시라카베노오오키미, 709~782)이다. 천지천황(天智天皇)의 일곱째 아들 시기친왕(施基親王; 시키신노)의 여섯째 아들로 백벽왕이라 불렸다. 좌백유청(佐伯有淸)은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광인(光仁)’이라는 글자 앞에 ‘백벽천황시(白壁天皇諡)’ 혹은 ‘천종고소천황시(天宗高紹天皇諡)’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9. 보귀오년(寶龜五年)
『속일본기』 보귀 5년(774) 9월 갑자조에는 종5위하 화기숙녜청마려(和氣宿禰淸麻呂)와 광충(廣蟲)이 조신 성을 받았다고 적혀 있고, 『일본후기』 연력 18년(799) 2월 을미조에는 “보귀 원년(770)에 성군인 광인천황이 입경을 허가하였다. 화기조신을 사성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청마려가 유배처인 대우국(大隅國)으로부터 입경을 허가받은 것을 말한다. 화기조신 사성은 보귀 5년의 일인데 이에 관한 내용이 생략되어 일괄 기술된 것으로 이해된다.
10. 속일본기합(續日本紀合)
『속일본기』 보귀 5년(774) 9월 갑자조에 기재된 종5위하 화기숙녜청마려(和氣宿禰清麻呂)와 화기숙녜광충(和氣宿禰廣蟲)이 조신이라는 성을 받았다는 사성 기사와 합치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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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조신(和氣朝臣; 와케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9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