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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국(闍婆國) 조공사(朝貢使)의 복장

  • 국가
    사파(闍婆)
전에 조공사(朝貢使)들이 범선을 타고 60일 만에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 주 001
각주 001)
定海縣: 宋代 兩浙路 明州의 속현으로 甬江을 타고 내려가다가 바다로 진입하는 입구에 위치하여, 당시 명주에 설치된 市舶司가 위치하던 곳이다. 북송 대에 望海縣을 定海縣으로 개명하여 세워졌으며, 治所는 현 寧波市 동북방의 鎭海區에 위치했었다. 李心傳의 『建炎以來朝野雜記』 甲集 「兵馬·平江許浦水軍」에 “平江許浦水軍者, 本明州定海縣水軍也. 舊隸沿海制置司, 防托海道.”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는 명주 주둔 수군이 포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外交使節과 海商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安壽의 상주로 東海神祠가 설치된 이래로 媽祖廟·昭利廟 등 海神廟도 연이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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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달했을 때, 시박을 관장하던 감찰어사 장숙(張肅) 주 002
각주 002)
『乾道臨安志』 卷2 歷代沿革 편에는 송 太宗 淳化 3년(992) 4월에 提舉市舶衙를 杭州에서 明州 定海縣으로 옮기고 監察御史 張肅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提舉市舶衙舊在城中, 淳化三年四月庚午, 移杭州市舶司於明州定海縣, 以監察御史張肅領之.”)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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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선 역(驛)을 통해 사절단의 복장 형태가 전에 입공했던 페르시아[波斯]와 흡사하다고 상주하였다. 통역[譯者]은 “현재 선박을 책임지고 있는 대상인 모욱(毛旭)은 건계(建溪)주 003
각주 003)
建溪: 閩江의 북부 水源에 해당하는 복건성의 북부 지역으로 南浦溪·崇陽溪·松溪 등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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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수차례 본국을 왕래한 바 있어, 그를 향도로 삼아 내조하여 조공하게 되었다”고 밝혔다.주 004
각주 004)
이와 동일한 내용이 『文獻通考』 卷332 「四裔考」9 〈闍婆〉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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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나라의 국왕은 ‘하지마라야(夏至馬囉夜)’주 005
각주 005)
夏至馬囉夜: Haji Maha raja. Maha raja는 대왕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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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고, 왕비는 ‘낙견사파리(落肩娑婆利)’로 부르며, 본국에는 또한 각 부서가 설치되어 속료들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 나라 말[方言]로 박주(舶主)를 ‘발하(葧荷)’라고 칭하며, 박주의 처는 ‘발하비니속(葧荷比尼贖)’주 006
각주 006)
主妻曰葧荷比尼贖: ‘主’자를 현전하는 『宋史』 원문에서는 ‘王’자로 誤記하였다. 『東西洋考』 卷3에 의거하여 ‘主’로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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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그 배에 있던 부인 이름은 미주(眉珠)로서, 상투를 틀었으나 보석장식은 하지 않았고 만포(蠻布)로 몸을 휘감았는데 얼굴색은 청흑색이고 언어는 통하지 않았으며 절을 하는 것도 마치 남자들이 땅에 무릎을 꿇고 모배(膜拜)하는 것 같았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목에 금목걸이를 찼으며, 손에는 금팔찌를 하고 비단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름은 아로(阿嚕)라고 했다. 그 나라는 삼불제(三佛齊)국과는 원한이 있어서 서로 공격하여 전쟁을 벌인 바 있다.주 007
각주 007)
점차 자바에서 힌두교가 불교를 능가하게 되면서 불교왕국인 스리비쟈야는 마타람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갖게 된다. 신독왕(Sindok, 929~947) 시기에 마타람 왕실이 동부자바로 옮긴 것에 대해 Hall은 스리비쟈야의 위협 때문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마타람은 안정을 찾은 후 향료제도와 말레이, 수마트라 지역을 연결하는 동서교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992년 마침내 스리비자야를 공격하여 무역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는데, 1016년에는 오히려 스리비자야의 역공을 받아 몰락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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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는 산에 원숭이가 많았는데,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고, 소리를 내어 부르면 바로 나타났으며, 때때로 과일을 던지면, 두 마리 커다란 원숭이가 먼저 나타났는데, 현지인들은 그들을 후왕(猴王)과 후부인(猴夫人)으로 불렀으며, 그들이 식사를 끝내야 나머지 원숭이들이 남은 것을 먹었다. 사절이 도착하자 황상께서는 해당관리에게 융숭히 접대하라고 명했다. 오래 머무른 후에 사절단이 귀환했는데, 황금과 비단[金帛]을 매우 후하게 하사했으며, 그들의 청에 따라 또한 양마(良馬)와 병기[戎具]도 하사해주었다. 사절이 일컫기를: “옆 나라 이름이 파라문(婆羅門) 주 008
각주 008)
婆羅門: 현재 인도의 Manipur 인근 지역이나 Assam북부에서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新唐書』 「地理志」 〈安南通天竺道〉를 보면 “彌諾江水, 千里至大秦婆羅門國.”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樊綽의 『蠻書』 卷10에서도 “大秦婆婆羅門國在永昌西北, 正東與諾諾江安西城樓接界.”라고 그 위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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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인정(人情)을 살필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타인을 해치려 하면 모두 사전에 미리 알 수 있다”고 했다.

  • 각주 001)
    定海縣: 宋代 兩浙路 明州의 속현으로 甬江을 타고 내려가다가 바다로 진입하는 입구에 위치하여, 당시 명주에 설치된 市舶司가 위치하던 곳이다. 북송 대에 望海縣을 定海縣으로 개명하여 세워졌으며, 治所는 현 寧波市 동북방의 鎭海區에 위치했었다. 李心傳의 『建炎以來朝野雜記』 甲集 「兵馬·平江許浦水軍」에 “平江許浦水軍者, 本明州定海縣水軍也. 舊隸沿海制置司, 防托海道.”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는 명주 주둔 수군이 포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外交使節과 海商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安壽의 상주로 東海神祠가 설치된 이래로 媽祖廟·昭利廟 등 海神廟도 연이어 건립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乾道臨安志』 卷2 歷代沿革 편에는 송 太宗 淳化 3년(992) 4월에 提舉市舶衙를 杭州에서 明州 定海縣으로 옮기고 監察御史 張肅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提舉市舶衙舊在城中, 淳化三年四月庚午, 移杭州市舶司於明州定海縣, 以監察御史張肅領之.”)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建溪: 閩江의 북부 水源에 해당하는 복건성의 북부 지역으로 南浦溪·崇陽溪·松溪 등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와 동일한 내용이 『文獻通考』 卷332 「四裔考」9 〈闍婆〉에도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夏至馬囉夜: Haji Maha raja. Maha raja는 대왕이라는 의미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主妻曰葧荷比尼贖: ‘主’자를 현전하는 『宋史』 원문에서는 ‘王’자로 誤記하였다. 『東西洋考』 卷3에 의거하여 ‘主’로 고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점차 자바에서 힌두교가 불교를 능가하게 되면서 불교왕국인 스리비쟈야는 마타람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갖게 된다. 신독왕(Sindok, 929~947) 시기에 마타람 왕실이 동부자바로 옮긴 것에 대해 Hall은 스리비쟈야의 위협 때문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마타람은 안정을 찾은 후 향료제도와 말레이, 수마트라 지역을 연결하는 동서교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992년 마침내 스리비자야를 공격하여 무역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는데, 1016년에는 오히려 스리비자야의 역공을 받아 몰락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婆羅門: 현재 인도의 Manipur 인근 지역이나 Assam북부에서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新唐書』 「地理志」 〈安南通天竺道〉를 보면 “彌諾江水, 千里至大秦婆羅門國.”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樊綽의 『蠻書』 卷10에서도 “大秦婆婆羅門國在永昌西北, 正東與諾諾江安西城樓接界.”라고 그 위치를 밝히고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장숙(張肅), 모욱(毛旭), 미주(眉珠), 아로(阿嚕)
지명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 페르시아[波斯], 삼불제(三佛齊)국, 파라문(婆羅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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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국(闍婆國) 조공사(朝貢使)의 복장 자료번호 : jo.k_0020_0489_006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