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말 : 한나라가 화친정책을 폈으나 흉노가 약속을 여겨 화친의 무익함이 드러났음을 설명함
과거 화친의 논리는 유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천하가 갓 평정되었고 새롭게 평성의 곤경을 만난 탓에 그의 말을 따라 약속하여 화친을 맺고 선우에게 뇌물을 주어 변경의 안정을 바랐다.주 001
효혜제와 고후 시대에는 [화친의 약속을] 존중하고 어기지 않았으나, 흉노의 침략과 도적질이 줄어들거나 그치지 않았으며, 선우는 도리어 교만한 [태도를] 더하였다.주 002 효문제 때에 이르러서 관시를 열고, 한 [황실]의 딸을 처로 주었으며, 사여하는 재물도 많이 늘려 해마다 천금에 달하였다.주 003그러나 흉노는 여러 차례 약속을 어겼고 변경은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주 004이에 문제는 [재위 시기] 중간에 크게 발분하여 마침내 몸소 군복을 입고 친히 안장을 올린 말을 몰고, 6군주 005양가(良家)의 재력(材力) 있는 군사들을 따라 상림[원]에서 말달리며 활을 쏘고, 전투 대오를 강습하고, 천하의 날랜 병사를 모아 광무(廣武)[성] 주 006에 주둔하도록 하였다.주 007
이러한즉 화친의 무익함이 이미 밝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효혜제와 고후 시대에는 [화친의 약속을] 존중하고 어기지 않았으나, 흉노의 침략과 도적질이 줄어들거나 그치지 않았으며, 선우는 도리어 교만한 [태도를] 더하였다.주 002 효문제 때에 이르러서 관시를 열고, 한 [황실]의 딸을 처로 주었으며, 사여하는 재물도 많이 늘려 해마다 천금에 달하였다.주 003그러나 흉노는 여러 차례 약속을 어겼고 변경은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주 004이에 문제는 [재위 시기] 중간에 크게 발분하여 마침내 몸소 군복을 입고 친히 안장을 올린 말을 몰고, 6군주 005양가(良家)의 재력(材力) 있는 군사들을 따라 상림[원]에서 말달리며 활을 쏘고, 전투 대오를 강습하고, 천하의 날랜 병사를 모아 광무(廣武)[성] 주 006에 주둔하도록 하였다.주 007
각주 007)
[문제가 친정(親征)을 포기한 다음] 풍당(馮唐)
주 008에게 [개인적인 문제에 대하여] 물어보다가 더불어 장수(將帥)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크게 탄식하면서 과거의 명신을 생각하였다.주 009漢文帝 전원 14년(전166)의 일이다. 匈奴 老上單于가 14만기의 기병을 이끌고 침범하여 인민과 가축을 약탈하고 安定郡 彭陽縣까지 들어왔다. 이에 中尉 周舍와 郞中令 張武를 장군으로 삼고 車 1千乘, 騎卒 10만을 일으켜 長安을 방비하였다. 文帝도 친히 군대를 격려하고 병사들을 단속하며 敎令을 내려 스스로 匈奴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이 간쟁하고 皇太后의 만류가 있어 親征은 중단한다. 대신 張相如와 董赤, 欒布 등을 장군으로 삼아 공격하도록 하였다. 匈奴는 塞內에 한 달여 간 머물다가 돌아갔다(『漢書』 권4 「文帝紀」 : 125∼126).
각주 009)
직접 親征에 나서지 못한 文帝는 郞署에 들렀다. 文帝가 馮唐 부친의 집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馮唐은 代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文帝가 代에서 자랄 때, 조나라 장수 李齊의 賢함에 대하여 늘 들었노라고 말하였다. 이에 馮唐이 李齊가 廉頗와 李牧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文帝는 “아아, 나는 어째서 廉頗와 李牧을 장수로 갖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흉노를 근심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漢書』 권50, 「馮唐傳」 : 2312∼2313). 『漢書』 「馮唐傳」에서는 위 일화가 언제 발생한 일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資治通鑑』(권15 : 478)에서는 文帝 전원 14년 匈奴가 침공하고 문제가 親征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의 일로 나온다. 『資治通鑑』에서 이렇게 비정한 근거가 위 『漢書』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일단 『資治通鑑』에 근거해서 주해하였다.
이러한즉 화친의 무익함이 이미 밝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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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漢文帝 전원 14년(전166)의 일이다. 匈奴 老上單于가 14만기의 기병을 이끌고 침범하여 인민과 가축을 약탈하고 安定郡 彭陽縣까지 들어왔다. 이에 中尉 周舍와 郞中令 張武를 장군으로 삼고 車 1千乘, 騎卒 10만을 일으켜 長安을 방비하였다. 文帝도 친히 군대를 격려하고 병사들을 단속하며 敎令을 내려 스스로 匈奴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이 간쟁하고 皇太后의 만류가 있어 親征은 중단한다. 대신 張相如와 董赤, 欒布 등을 장군으로 삼아 공격하도록 하였다. 匈奴는 塞內에 한 달여 간 머물다가 돌아갔다(『漢書』 권4 「文帝紀」 : 125∼126).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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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직접 親征에 나서지 못한 文帝는 郞署에 들렀다. 文帝가 馮唐 부친의 집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馮唐은 代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文帝가 代에서 자랄 때, 조나라 장수 李齊의 賢함에 대하여 늘 들었노라고 말하였다. 이에 馮唐이 李齊가 廉頗와 李牧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文帝는 “아아, 나는 어째서 廉頗와 李牧을 장수로 갖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흉노를 근심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漢書』 권50, 「馮唐傳」 : 2312∼2313). 『漢書』 「馮唐傳」에서는 위 일화가 언제 발생한 일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資治通鑑』(권15 : 478)에서는 文帝 전원 14년 匈奴가 침공하고 문제가 親征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의 일로 나온다. 『資治通鑑』에서 이렇게 비정한 근거가 위 『漢書』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일단 『資治通鑑』에 근거해서 주해하였다.
색인어
- 이름
- 유경, 효혜제, 고후, 효문제, 문제, 문제, 풍당(馮唐)
- 지명
- 평성, 한, 광무(廣武)[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