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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하나라(夏) 멸망 이후 주나라(周) 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 국가
    흉노(匈奴)
하(夏)나라의 국운이 쇠락하자 공유(公劉) 주 001
각주 001)
公劉 : 周의 시조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后稷의 증손이다. 『史記』의 「周本記」에 따르면, 㮨官의 지위를 잃고 “戌狄”의 땅으로 옮긴 것은 公劉의 조부 不窋때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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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대대로 이어 내려온] 직관(稷官)g주 002
각주 002)
稷官 : ‘稷’은 본래 精米를 뜻하고 ‘稷官’은 농업을 관할하던 관리의 우두머리로 ‘稷正’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周의 시조 后稷이 唐堯 시기에 이 직임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그를 이어 관직을 세습하였다고 한다(『史記』 권1 「五帝本紀」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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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위를 잃고 서융(西戎)주 003
각주 003)
西戎 : 中國 古代 西北에 거주했던 戎狄에 대한 총칭이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甘肅省과 陝西省 일대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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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습속]을 따르게 되어주 004
각주 004)
公劉의 祖父가 稷官의 지위를 잃고 그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했다. 公劉는 그 뒤 戎狄들과 섞여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농업 생산을 하여 西戎의 풍속과 습관을 바꾸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顔師古의 설명처럼 公劉가 西戎의 풍속에 따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울러 『鹽鐵論』에서도 후자와 같은 해석을 하였다(『鹽鐵論』 「和親篇」 “故公劉處西戎, 戎狄化之.”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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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豳) 주 005
각주 005)
豳 : 지금의 陝西省 旬邑縣과 彬縣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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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마을을 만들어 살았다. 그 뒤 삼백여 년이 지나 융적(戎狄)주 006
각주 006)
戎狄 : 서쪽에 사는 다른 종족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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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단보(古公亶父) 주 007
각주 007)
太王亶父 : 古公亶父라고 한다. 여기에서 ‘父’는 ‘甫’와 통한다고 보아 통상 ‘보’로 읽는다 周의 우두머리로서 그 전설상 시조로 여겨지는 后稷의 12대손이고, 公劉의 9대손이다. 그가 岐로 도망오자 豳 땅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와 마을을 만들었다. 그는 文王의 조부로 周 武王 때에 太王으로 추존되었다. 그는 周의 무리를 이끌고 陝下로 옮겨 성곽과 집을 짓고 관리를 두어 戎狄의 풍습을 개혁하였고, 생산을 늘려 周의 번영을 이룩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13~ 115). 『史記』에는 大王亶父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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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격하였다. [고공]단보기[산](岐山) 주 008
각주 008)
岐山 : 지금의 陝西省 岐山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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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으로 달아났는데, 땅의 사람들이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와서 [그곳에] 마을을 만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 뒤 백여 년이 지나 주나라 서백창(西伯昌) 주 009
각주 009)
西伯昌 : 周 文王이다. 이름은 姬昌이다. 古公亶父에게는 세 아들 伯, 虞仲, 季歷이 있었다. 그중에 季歷은 周祀를 이었고, 商王은 그가 西方의 霸王이 되는 것을 인정하여 西伯이라 불리게 되었다. 계력의 아들 昌이 그 뒤를 이어서 西伯昌이라 불리게 되었다(『史記』 권4 「周本紀」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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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견이씨(畎夷氏)주 485
각주 485)
이들은 ‘畎戎’인데, 다르게는 ‘昆夷’라고도 한다. 이것은 昆이 混 또는 緄으로 쓰고 세 글자가 모두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畎夷氏 : 고대 종족 명칭의 하나로 犬戎을 통칭한다. 이들은 원래 周나라와 관계가 깊었는데, 周 文王이 西戎의 覇者로서 왕조의 기초를 쌓았고, 穆王이 犬戎을 정벌하여 太原으로 쫓은 이래 周나라는 犬戎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주나라 말기에 幽王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전771년 犬戎견이씨(畎夷氏)은 申侯와 연합하여 주를 공격, 유왕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周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후 犬戎은 涇水․渭水에 진출하여 周나라를 위협하다가 秦의 襄公․文公시기에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는 春秋時代에도 세력을 떨치다가 秦과 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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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벌[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의] 무왕(武王) 주 011
각주 011)
武王 : 周 武王 姬發이다. 그는 文王의 장자(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 伯邑考가 商 紂王에게 피살되자 文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姜太公을 國相에 그대로 연임키고, 그리고 동생 周公 旦과 召公 奭의 보좌를 받으면서 내정을 더욱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文王의 유지를 받들어 商나라 紂王 토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2년 후 봄 때가 무르익자 武王은 전차 300대, 무사 3,000명, 병사 45,000명을 직접 이끌고 인근 소국의 병력과 연합하였다. 정월 초하루에 출정식을 갖고 盟津에서 商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牧野에서 크게 승리한 후 啇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수도를 鎬京(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서남)에 정하고 이름을 宗周라 하였다. 이후 周王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기 위해 친족과 공신들을 책봉하고 그들에게 諸侯國을 세우도록 했다. 이에 姜太公을 營丘(지금의 山東省 淄博市)의 齊나라에, 周公 旦을 曲阜(지금의 山東省 曲阜縣)의 魯나라에, 召公 奭을 蓟丘(지금의 北京)의 燕나라에 각각 분봉하였다. 그리고 商나라의 잔여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侯에 봉하여 殷의 도성에 살게 하고, 형제 管叔鮮, 蔡叔度, 霍叔處를 三監으로 파견해 그를 감시하게 하였다. 周나라가 건국된 지 3년째 되던 해에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鎬京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시호를 武王이라 하였다(『史記』 권4 「周本紀」 : 1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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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商)의] 주왕(紂王) 주 012
각주 012)
紂王 : 商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姓이 子이고, 이름은 辛이다. 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商나라의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妲己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夏의 마지막 왕 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를 매달아 놓고[肉林], 妲己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7년에 걸쳐 거대한 호화궁전 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諸侯들의 맹주격인 姬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뒤 紂王은 鹿臺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史記』 권3 「殷本紀」 : 10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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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치고 난 다음 낙읍(雒邑) 주 013
각주 013)
雒邑 : 洛邑이며, 지금의 河南省 洛陽市에 해당한다. 周 武王이 죽은 뒤 나이 어린 成王이 제위에 오른 이후 攝政이 된 周公이 河南省 洛陽 부근인 洛邑(또는 成周)에 성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당시 商의 대표자인 武庚과 祿夫, 그리고 周公의 동생 管叔․蔡叔 등이 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키자 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난 다음 동방에 대한 지배를 본격화하기 위한 것과 관련되었다. 이곳은 이후 西周가 몰락하고 東周시대가 되면서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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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었고, 다시 풍호(酆鄗) 주 014
각주 014)
酆鄗 : ‘酆京’ 또는 ‘京’이라고도 지칭되는데, 西周시대의 수도였다. 周 文王이 灃水 西岸에 酆邑(지금의 陝西省 長安縣 서북쪽 灃河 西岸 馬王村, 西王村 일대)을 건립하고 수도로 삼았다. 周 武王은 商나라를 멸한 후에 鄗(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서쪽)에 수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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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으로 [되돌아와] 살며 융이(戎夷)를 경수(涇水)낙수(洛水) 주 015
각주 015)
涇水와 洛水 : 모두 陝西省 경내 渭河 西岸의 양대 지류이다. 涇水는 서쪽에, 洛水(지금의 北洛河)는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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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내쫓으니 [융이가 이로부터] 철따라 조공을 바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황복(荒服)주 016
각주 016)
荒服 : 중국 고대의 관념적 지역구분의 하나로, 邊疆의 외진 지역이면서도 능히 帝王에게 복종할 수 있는 땅을 뜻한다. 이것은 王畿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五服’을 둔 제도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周代에 每 500리를 1服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侯服, 甸服, 绥服, 要服, 荒服이었다. 대체적으로 荒服은 王畿로부터 2500리(일설에는 4500리에서 5000리라고도 한다) 밖의 지역으로 가장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질적인 종족이나 국가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周禮』「夏官․職方氏」에서는 中國의 구역을 首都로부터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이를 ‘九服’이라 했다. 그중에서 蠻服은 天子의 京畿로부터 4500리 떨어져 있는 여섯 번째 구역, 즉 夷보다 앞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여 다른 민족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동심원으로 형성된 中國의 지리 체계 내에 포함되기는 하나 정치적․도덕적 권위의 중심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리적 범주를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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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 뒤 이백여 년이 지나주 017
각주 017)
周 武王이 商을 무너뜨린 시점부터 周 穆王시대까지의 시차는 200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其後二百有餘年”이라고 한 것에서 ‘二’는 마땅히 ‘一’의 착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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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의 국운이 쇠약해졌으나 목왕(穆王) 주 018
각주 018)
穆王(재위 전1023~전982) : 이름이 姬滿으로 西周 5代 군주, 즉 成王의 손자이고 康王의 아들이다. 昭王의 아들로 기원전 10세기경 사람으로 50세 때 즉위하여 55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34). 西方의 犬戎을 토벌하려다가 실패하여 諸侯의 離反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周나라의 덕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한편 金文銘으로 보아 昭王, 穆王 시대에 법제가 정비되고 姬姓의 나라가 증가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주나라 국력이 확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5~ 136). 현존하는 『穆天子傳』은 穆王의 西遊의 이야기인데, 후세의 僞書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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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견융(畎戎)을 쳐서 네 마리의 흰 이리[狼]와 네 마리의 흰 사슴[鹿]을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주 019
각주 019)
이 說話는 말 그대로 犬戎의 수렵지로 들어가 진귀한 짐승을 사냥하였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리와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部族들을 征伐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리와 사슴 등과 같은 神話素가 북아시아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烏孫, 高車, 突厥, 蒙古 신화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북아시아 신화를 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몽골의 건국신화에서도 잿빛 이리와 하얀 사슴이 결합해서 건국자 칭기스 칸의 조상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原山煌, 1995 : 46~47). 이런 점에서 볼 때 周代에 犬戎으로 표현된 종족들과 후대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계통적인 연결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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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그 이후에 황복에서 [조공을 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주나라에서는 마침내 여형(呂刑)주 486
각주 486)
이것은 『尙書』 「呂刑」篇의 내용이다. 穆王은 外征 뒤 諸侯와 外蕃들 중에 周나라를 따르지 않는 이가 생기자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 贖法을 제정한 呂刑(甫刑)을 발포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이고 財政을 확보하려고 했다. 『史記』에는 “甫刑”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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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법[辟]을 만들었다. 목왕(穆王)의 손자인 의왕(懿王) 주 021
각주 021)
懿王 : 周나라의 7대 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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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대에 왕실이 마침내 쇠퇴하게 되어 융적이 서로 침입하여 중국을 괴롭혔다.주 022
각주 022)
『史記』는 “穆王之後二百有餘年”이라고 하여 『漢書』의 “至穆王之孫懿王時, 王室遂衰, 戎狄交侵, 暴虐中國.”이라는 穆王 이후 인근 종족 내지는 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는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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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그 고통을 당하게 되자 시인들이 비로소 [노래를] 지어 고통스러워하면서 노래했다. “처도 없고 가장도 없게 된 것은 험윤 때문이다.”주 023
각주 023)
征役이 정해진 시간을 넘겨서 집안에 부부의 도가 어그러지는 것은 獫允이 공격하여 괴롭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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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하루도 경계하지 않겠는가! 험윤의 [침입이] 심하고 급격한데.”주 024
각주 024)
『詩經』 「小雅 采薇」에 나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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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의 증손인 선왕(宣王)시대에 이르러 군대를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정벌하게 하니 시인들이 그 공을 크게 찬미하여 노래하였다. “험윤을 몰아내 태원(太原)에 이르렀네.”주 025
각주 025)
『詩經』 「小雅 六月」에 나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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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전차가 아주 가득하고”, “북녘 땅[朔方]에 성을 쌓았도다.”주 026
각주 026)
『詩經』 「小雅 出車」에 나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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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사이(四夷)들이 모두 복속하게 되니 중흥(中興)이라 칭하였다.주 027
각주 027)
『史記』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穆王의 손자인 懿王 시대가 아니라 西周가 멸망하고 난 뒤의 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詩經』에서 인용한 노래들이 역시 “中國에서는 [그것을]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에 시인들은 [그들에 대해] ‘戎狄을 이에 응징하였네.’, ‘玁狁을 쳐부수어 大原에 이르렀네.’, ‘떠나는 戰車가 [길에 아주] 가득하고, 저 북녘 땅(朔方)에 성을 쌓았도다.’라고 노래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이상의 노래는 원래 『詩經』 「小雅 六月」 “戎車旣安, 如輊如軒. 四牡旣佶, 旣佶且閑. 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와 『詩經』 「小雅 出車」 “王命南仲, 往城于方. 出車彭彭, 旂旐中央. 天子命我, 城彼朔方. 赫赫南仲, 玁狁于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저본에서는 축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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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公劉 : 周의 시조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后稷의 증손이다. 『史記』의 「周本記」에 따르면, 㮨官의 지위를 잃고 “戌狄”의 땅으로 옮긴 것은 公劉의 조부 不窋때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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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稷官 : ‘稷’은 본래 精米를 뜻하고 ‘稷官’은 농업을 관할하던 관리의 우두머리로 ‘稷正’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周의 시조 后稷이 唐堯 시기에 이 직임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그를 이어 관직을 세습하였다고 한다(『史記』 권1 「五帝本紀」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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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西戎 : 中國 古代 西北에 거주했던 戎狄에 대한 총칭이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甘肅省과 陝西省 일대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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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公劉의 祖父가 稷官의 지위를 잃고 그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했다. 公劉는 그 뒤 戎狄들과 섞여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농업 생산을 하여 西戎의 풍속과 습관을 바꾸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顔師古의 설명처럼 公劉가 西戎의 풍속에 따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울러 『鹽鐵論』에서도 후자와 같은 해석을 하였다(『鹽鐵論』 「和親篇」 “故公劉處西戎, 戎狄化之.”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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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豳 : 지금의 陝西省 旬邑縣과 彬縣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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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戎狄 : 서쪽에 사는 다른 종족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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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太王亶父 : 古公亶父라고 한다. 여기에서 ‘父’는 ‘甫’와 통한다고 보아 통상 ‘보’로 읽는다 周의 우두머리로서 그 전설상 시조로 여겨지는 后稷의 12대손이고, 公劉의 9대손이다. 그가 岐로 도망오자 豳 땅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와 마을을 만들었다. 그는 文王의 조부로 周 武王 때에 太王으로 추존되었다. 그는 周의 무리를 이끌고 陝下로 옮겨 성곽과 집을 짓고 관리를 두어 戎狄의 풍습을 개혁하였고, 생산을 늘려 周의 번영을 이룩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13~ 115). 『史記』에는 大王亶父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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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岐山 : 지금의 陝西省 岐山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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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西伯昌 : 周 文王이다. 이름은 姬昌이다. 古公亶父에게는 세 아들 伯, 虞仲, 季歷이 있었다. 그중에 季歷은 周祀를 이었고, 商王은 그가 西方의 霸王이 되는 것을 인정하여 西伯이라 불리게 되었다. 계력의 아들 昌이 그 뒤를 이어서 西伯昌이라 불리게 되었다(『史記』 권4 「周本紀」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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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이들은 ‘畎戎’인데, 다르게는 ‘昆夷’라고도 한다. 이것은 昆이 混 또는 緄으로 쓰고 세 글자가 모두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畎夷氏 : 고대 종족 명칭의 하나로 犬戎을 통칭한다. 이들은 원래 周나라와 관계가 깊었는데, 周 文王이 西戎의 覇者로서 왕조의 기초를 쌓았고, 穆王이 犬戎을 정벌하여 太原으로 쫓은 이래 周나라는 犬戎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주나라 말기에 幽王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전771년 犬戎견이씨(畎夷氏)은 申侯와 연합하여 주를 공격, 유왕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周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후 犬戎은 涇水․渭水에 진출하여 周나라를 위협하다가 秦의 襄公․文公시기에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는 春秋時代에도 세력을 떨치다가 秦과 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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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武王 : 周 武王 姬發이다. 그는 文王의 장자(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 伯邑考가 商 紂王에게 피살되자 文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姜太公을 國相에 그대로 연임키고, 그리고 동생 周公 旦과 召公 奭의 보좌를 받으면서 내정을 더욱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文王의 유지를 받들어 商나라 紂王 토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2년 후 봄 때가 무르익자 武王은 전차 300대, 무사 3,000명, 병사 45,000명을 직접 이끌고 인근 소국의 병력과 연합하였다. 정월 초하루에 출정식을 갖고 盟津에서 商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牧野에서 크게 승리한 후 啇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수도를 鎬京(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서남)에 정하고 이름을 宗周라 하였다. 이후 周王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기 위해 친족과 공신들을 책봉하고 그들에게 諸侯國을 세우도록 했다. 이에 姜太公을 營丘(지금의 山東省 淄博市)의 齊나라에, 周公 旦을 曲阜(지금의 山東省 曲阜縣)의 魯나라에, 召公 奭을 蓟丘(지금의 北京)의 燕나라에 각각 분봉하였다. 그리고 商나라의 잔여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侯에 봉하여 殷의 도성에 살게 하고, 형제 管叔鮮, 蔡叔度, 霍叔處를 三監으로 파견해 그를 감시하게 하였다. 周나라가 건국된 지 3년째 되던 해에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鎬京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시호를 武王이라 하였다(『史記』 권4 「周本紀」 : 1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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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紂王 : 商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姓이 子이고, 이름은 辛이다. 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商나라의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妲己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夏의 마지막 왕 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를 매달아 놓고[肉林], 妲己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7년에 걸쳐 거대한 호화궁전 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諸侯들의 맹주격인 姬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뒤 紂王은 鹿臺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史記』 권3 「殷本紀」 : 10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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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雒邑 : 洛邑이며, 지금의 河南省 洛陽市에 해당한다. 周 武王이 죽은 뒤 나이 어린 成王이 제위에 오른 이후 攝政이 된 周公이 河南省 洛陽 부근인 洛邑(또는 成周)에 성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당시 商의 대표자인 武庚과 祿夫, 그리고 周公의 동생 管叔․蔡叔 등이 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키자 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난 다음 동방에 대한 지배를 본격화하기 위한 것과 관련되었다. 이곳은 이후 西周가 몰락하고 東周시대가 되면서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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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酆鄗 : ‘酆京’ 또는 ‘京’이라고도 지칭되는데, 西周시대의 수도였다. 周 文王이 灃水 西岸에 酆邑(지금의 陝西省 長安縣 서북쪽 灃河 西岸 馬王村, 西王村 일대)을 건립하고 수도로 삼았다. 周 武王은 商나라를 멸한 후에 鄗(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서쪽)에 수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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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涇水와 洛水 : 모두 陝西省 경내 渭河 西岸의 양대 지류이다. 涇水는 서쪽에, 洛水(지금의 北洛河)는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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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荒服 : 중국 고대의 관념적 지역구분의 하나로, 邊疆의 외진 지역이면서도 능히 帝王에게 복종할 수 있는 땅을 뜻한다. 이것은 王畿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五服’을 둔 제도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周代에 每 500리를 1服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侯服, 甸服, 绥服, 要服, 荒服이었다. 대체적으로 荒服은 王畿로부터 2500리(일설에는 4500리에서 5000리라고도 한다) 밖의 지역으로 가장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질적인 종족이나 국가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周禮』「夏官․職方氏」에서는 中國의 구역을 首都로부터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이를 ‘九服’이라 했다. 그중에서 蠻服은 天子의 京畿로부터 4500리 떨어져 있는 여섯 번째 구역, 즉 夷보다 앞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여 다른 민족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동심원으로 형성된 中國의 지리 체계 내에 포함되기는 하나 정치적․도덕적 권위의 중심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리적 범주를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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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周 武王이 商을 무너뜨린 시점부터 周 穆王시대까지의 시차는 200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其後二百有餘年”이라고 한 것에서 ‘二’는 마땅히 ‘一’의 착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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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穆王(재위 전1023~전982) : 이름이 姬滿으로 西周 5代 군주, 즉 成王의 손자이고 康王의 아들이다. 昭王의 아들로 기원전 10세기경 사람으로 50세 때 즉위하여 55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34). 西方의 犬戎을 토벌하려다가 실패하여 諸侯의 離反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周나라의 덕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한편 金文銘으로 보아 昭王, 穆王 시대에 법제가 정비되고 姬姓의 나라가 증가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주나라 국력이 확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5~ 136). 현존하는 『穆天子傳』은 穆王의 西遊의 이야기인데, 후세의 僞書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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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이 說話는 말 그대로 犬戎의 수렵지로 들어가 진귀한 짐승을 사냥하였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리와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部族들을 征伐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리와 사슴 등과 같은 神話素가 북아시아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烏孫, 高車, 突厥, 蒙古 신화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북아시아 신화를 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몽골의 건국신화에서도 잿빛 이리와 하얀 사슴이 결합해서 건국자 칭기스 칸의 조상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原山煌, 1995 : 46~47). 이런 점에서 볼 때 周代에 犬戎으로 표현된 종족들과 후대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계통적인 연결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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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6)
    이것은 『尙書』 「呂刑」篇의 내용이다. 穆王은 外征 뒤 諸侯와 外蕃들 중에 周나라를 따르지 않는 이가 생기자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 贖法을 제정한 呂刑(甫刑)을 발포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이고 財政을 확보하려고 했다. 『史記』에는 “甫刑”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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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懿王 : 周나라의 7대 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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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史記』는 “穆王之後二百有餘年”이라고 하여 『漢書』의 “至穆王之孫懿王時, 王室遂衰, 戎狄交侵, 暴虐中國.”이라는 穆王 이후 인근 종족 내지는 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는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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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征役이 정해진 시간을 넘겨서 집안에 부부의 도가 어그러지는 것은 獫允이 공격하여 괴롭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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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詩經』 「小雅 采薇」에 나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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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詩經』 「小雅 六月」에 나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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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詩經』 「小雅 出車」에 나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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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史記』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穆王의 손자인 懿王 시대가 아니라 西周가 멸망하고 난 뒤의 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詩經』에서 인용한 노래들이 역시 “中國에서는 [그것을]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에 시인들은 [그들에 대해] ‘戎狄을 이에 응징하였네.’, ‘玁狁을 쳐부수어 大原에 이르렀네.’, ‘떠나는 戰車가 [길에 아주] 가득하고, 저 북녘 땅(朔方)에 성을 쌓았도다.’라고 노래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이상의 노래는 원래 『詩經』 「小雅 六月」 “戎車旣安, 如輊如軒. 四牡旣佶, 旣佶且閑. 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와 『詩經』 「小雅 出車」 “王命南仲, 往城于方. 出車彭彭, 旂旐中央. 天子命我, 城彼朔方. 赫赫南仲, 玁狁于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저본에서는 축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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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공유(公劉), 고공단보(古公亶父), [고공]단보, [고공]단보, 서백창(西伯昌), 무왕(武王), 주왕(紂王), 목왕(穆王), 목왕(穆王), 의왕(懿王), 의왕, 선왕(宣王)
지명
하(夏)나라, 빈(豳), 기[산](岐山), , 주(周)나라, 주나라, , 상(商), 낙읍(雒邑), 풍호(酆鄗), 경수(涇水), 낙수(洛水), 주나라, 주나라, 태원(太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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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夏) 멸망 이후 주나라(周) 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