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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1910년도 ‘고적 조사’의 개요

형식상 한국정부 탁지부의 위촉을 받은 세키노(關野貞) 조사단은 1909년 10월부터 각지에서 고적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 때의 고적 조사는 한국정부의 위촉을 받았다고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정책 입안을 일본인 고문이 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인 탁지부 위촉일 뿐, 실제 모든 결정은 일본인들이 하였다. 이 해에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석암동 고분을 발굴하였는데, 전형적인 낙랑 전실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하고 발표하였다. 당시 조사단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인식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사례이다. 이 해에 경주에서는 황남리 남총과 서악리 석침총을 조사하였다.
1910년이 되면 조사단의 신분이 조선총독부 위촉으로 바뀌면서 고적 조사 사업도 탄력적으로 실시되었다. 표 1에서 본 것처럼 연구자에 의해 고구려 고분 내부가 처음으로 조사된 것도 이 해이다. 고적 조사 단원은 세키노와 야쓰이 그리고 구리야마이다. 1910년의 대표적인 조사로는 평양 대동강변에서의 낙랑 고분(東墳, 西墳), 임원면의 고구려의 고분인 사동 고분(寺洞古墳), 경상남도 고령군의 주산 고분, 진주에서 실시된 수정봉·옥봉 고분 조사를 들 수 있다.
한편 세키노 조사단과는 별도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의 하기노와 이마니시가 임원면 도원동에서 고분군을 조사하였고, 강동(江東)에서 황제릉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왕묘(황제릉)가 추위로 땅이 얼어붙어 굴착이 어렵자, 평양으로 돌아가 낙랑 고분인 대동강변 을(乙)분 조사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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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도 ‘고적 조사’의 개요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