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성동리산성

城東里山城
  • 저필자
    최재도(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 시대
    백제/고구려/신라
  • 위치
  • 원소장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0.386km
입지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일대의 구릉성 산지 위에 입지한다.
유적개관
구릉의 정상부에 축조된 산정식산성으로, 동서로 긴 사다리꼴 모양이다. 전체 둘레는 386m가량이며, 문지와 치, 우물지, 수구,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 백제 토기편, 고구려 토기편, 신라 기와편 등
참고문헌
「남한의 고구려유적」, 2006
해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763번지의 구릉성 산지 정상부(해발 166m)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북쪽으로는 불무산이, 서쪽으로는 보장산과 종자산이, 동쪽과 남쪽으로는 자연 해자(垓字)의 기능을 하는 영평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포천천과 만나 한탄강과 임진강에 합류한다. 즉 포천~철원 방면의 남북 교통로와 전곡~이동 방면의 동서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점을 방어하기 좋은 위치이다.
성동리산성은 궁예(弓裔)가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918년 왕건(王建)의 군대에 쫓기던 궁예가 한때 이곳에 머물렀고, 백성과 군사를 동원하여 한탄강에서 돌을 날라다 성을 급조하였으며 이러한 전설이 와전되어 ‘태봉성(泰封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98년 성동리산성 남쪽의 영평천 변에서 삼국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생활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이 유적과 인접한 성동리산성과의 연관성을 규명하기 위하여 1999년 정밀 지표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이 산성은 백제에 의해 처음 축성된 뒤 5~6세기에는 고구려에 의해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신라의 북진기지로 활용되었다. 후에 이 지역에 태봉국이 건국되면서 궁예에 의해 도성 방어를 목적으로 개축되었다. 그중 백제와 신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동리산성은 구릉의 정상부에 테두리를 돌린 것처럼[테뫼식(鉢卷式)] 쌓은 석축 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동서로 긴 사다리꼴 모양이며 둘레 386m, 면적 10,433㎡이다. 내부는 북동쪽이 남서쪽에 비해 비교적 높고 가파른 지형을 이루고 있다. 포천-철월 간 교통로가 내려다보이는 동벽은 급경사면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기에 성으로의 접근이 쉽지 않다.
성벽은 산 사면을 L자형으로 굴착하여 기초를 다진 뒤 그 위에 정연하게 쌓아올렸다. 성벽은 전면에 걸쳐 일정한 크기의 석재를 사용한 점과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 쌓은[내탁식(內托式)] 편축식(片築式, 내외를 모두 돌로 쌓는 것) 석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 외 구조물로 남문터는 남벽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데 어긋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북동쪽의 치성(雉城)은 북쪽의 철원과 영평천 방면의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장대지((將臺址)]는 산성 내 최정상에 위치하며 그 외 건물지 3개소도 주변에 비해 넓은 고지대에 조성되어 있다. 우물은 장방형 깬돌[할석(割石)]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평면 형태는 원형이고 하부는 팔각형을 띠고 있다.
유물은 기와, 토기, 자기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기와는 회청색, 적갈색을 띠며 외면에 사선무늬와 격자무늬 등이 찍힌 것이 대부분이며, 호로고루와 당포성 등에서 출토된 고구려 기와와 유사한 것도 있다. 토기는 백제 토기와 함께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연속고리문의 고구려 토기도 출토되었다. 한편 산성 아래에 있는 성동리마을 유적의 2호 주거지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성동리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20_01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