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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패왕조산성

覇王朝山城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재원향 패왕촌(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財源鄕 覇王村)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1,260m
입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산에 석축산성을 쌓았으며, 혼강과 신개하 합류점의 동쪽에 위치한다. 오녀산성과는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유적개관
석축 성벽으로 동벽 298m, 북벽 295m, 서벽 420m, 남벽 247m로, 전체길이 1,260m이다. 성벽의 폭은 4m이며, 최고 높은 곳은 5.2m로 여장이 남아있는 곳도 있다. 북벽동쪽 끝에는 돌구멍이 확인되며, 산성의 네 모서리에는 치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잘 가공한 석재로 정연하게 협축하였으며, 안쪽은 강돌로 채웠다. 서벽의 남쪽과 북벽의 동쪽이 보존상태가 좋다. 문지는 남과 북에 하나씩 있으며, 북문은 옹성문이다.
유물개관
철차관, 철촉, 동촉, 토기 등
참고문헌
「高句麗の歷史と遺跡」, 1995
해설
집안시에서 북쪽으로 약 97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산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거리에는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이었던 졸본으로 비정되는 환인(桓仁)이 있다. 혼강(渾江)이 북쪽에서 흘러들어와 산성의 서쪽을 지난 뒤 패왕촌 앞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신개하(新開河)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간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주요 교통로 중 하나는 혼강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노령(老嶺) 산줄기를 넘어야 하는데, 패왕조산성은 신개하의 하구에서 이 교통로를 주시하는 위치에 있다. 산성에서는 혼강 연안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으며 신개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충지이다. 산성에서 40km 정도 떨어진 망파령관애와 함께 도성 외곽 방어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들 사이에 산등성이의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여 축조되어 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산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평면은 대체로 사다리꼴이다. 동벽과 서벽 및 북벽의 서부는 능선의 험준한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였고, 산세가 움푹 들어간 곳과 남쪽의 골짜기에는 돌로 성벽을 쌓았다. 지세가 낮으면 낮을수록 성벽을 높이 쌓아 성벽을 일관되게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서벽의 남단과 북벽의 동단은 성벽을 비교적 높이 쌓았으며 보존상태도 좋다.
1962년 4월, 길림성박물관과 길림사범대학, 길림성철학사회과학연구소, 집안현문물보관소 등이 합동으로 조사와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뒤 1983년 5월에 집안현문물조사대가 재조사하였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1,260m로, 동벽이 298m, 서벽이 420m, 남벽이 247m, 북벽이 295m이다. 성돌은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은 것으로 길이 20~51cm, 너비 29~42cm, 두께 13~26cm이고, 쌓을 때 매끄러운 면이 바깥쪽으로 나오도록 했다. 남아 있는 성벽의 높낮이와 폭은 일정하지 않은데, 가장 높은 성벽은 21층 5.2m이고 폭은 대체로 1~4m이다. 성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성가퀴가 확인되고 있으며, 성가퀴의 높이는 대개 0.5m 정도이고, 폭은 1m이다. 성가퀴 안쪽에는 방형의 돌로 쌓은 구멍을 만들어 놓았는데, 매 변의 길이는 27~30cm이고 깊이는 50cm이다. 구멍 사이의 거리는 1.45~2m로 균일하지 않다. 성문은 북문, 남문이 확인되고 있으며, 북문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북문은 북벽 중간 부위에서 조금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다. 성문 양옆의 성벽을 안쪽으로 연장하여 1쌍의 장방형 평대를 쌓아 방어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문길이 4.8m 더 깊어져 있고 문 밖에는 약 8m지점에 돌로 쌓은 옹성(甕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의 폭은 3m이다. 옹성이 달린 성문은 서쪽 방향으로 나 있다. 따라서 북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야만 성을 나올 수 있다. 남문은 남벽의 중간 부위에서 약간 서쪽에 치우쳐 있다. 이미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높이는 알 수 없고 현존하는 문 입구의 폭은 9m이다. 성벽 네 모서리에는 각루(角樓)와 같은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바깥쪽으로 돌출된 평대가 조성되어 있다. 어떤 것은 원래 산꼭대기였던 것을 약간 다듬어 축조한 것도 있다. 이것은 망대(望臺)로 쓰였거나 각루(角樓) 같은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안에는 샘이 하나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남쪽으로 흐르는 시내의 원천이다. 이 샘의 북쪽에는 약간의 경사진 대지가 있는데 이곳에 몇 개의 주춧돌이 있어 건물지로 추정된다. 수습된 유물로는 수레의 굴대, 마구의 일부, 화살대 및 화살촉, 띠고리, 절구, 시루, 항아리, 황색 혹은 회색의 미세한 흙으로 빚은 토기의 조각, 모래 섞인 토기의 조각, 다리 모양의 기물 손잡이와 평행선 및 파도모양 무늬의 토기 조각 등이 있다.
1906년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산성 부근 강가의 평지에도 석성이 하나 있었는데 물에 쓸려 내려가 모래에 파묻히고 큰 돌 몇 개만 드러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한편 이 석성의 존재에 더하여 산성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3곳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이 곳을 고구려 도성 중 유리왕 22년 도성으로 삼았다는 위나암성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건축 규모, 지리 조건, 주변의 무덤분포 등을 봤을 때 도성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다수 견해이다. 한편, 이 곳을 고구려 건국 무렵 송양의 비류국과 관련 짓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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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왕조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