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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우네다 지추유적

畝田 寺中遺跡
  • 저필자
    한영화(성균관대학교)
  • 시대
    발해
  • 원소장처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우네다[畝田]·지추[寺中]정(町)
  • 시대
    발해
  • 유형
    건축지
입지
운하의 오른쪽 언덕에서는 8동의 창고군이, 왼쪽 언덕에서는 대형 건물이 발굴되었다.
유적개관
8세기를 중심으로 한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조사 결과 폭이 약 20m로 자연 하천을 이용한 운하 유적 건물군으로 밝혀졌다. 창고군 뒤로 도로가 정비되어 있어 보관 물자를 수로나 육로로 운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진사(津司)’, ‘진(津)’, ‘천평(天平) 2년’ 등의 묵서가 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중 ‘진(津)’은 이 유적이 항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사(津司)’는 당시 가하(加賀)에 ‘진사’라는 직함을 가진 인물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사’에 관한 사료로는 속일본기 720년조에 나오는 “도도진경(渡嶋津輕)의 진사(津司) 종7위상(從7位上) 제군안남(諸君安男)을 비롯한 6명을 말갈국에 보내 그 풍속을 살피게 하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에조를 시작으로 하는 북방민족과의 접촉이나 교역을 관리하는 외교관과 비슷한 직분이었을 제군안남(諸君安男)의 사례를 참고하면, 우네다 지추유적의 ‘진사’도 단순한 항만 관리자가 아니라 발해나 타지역과의 교역을 관리하는 직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평(天平) 2년(年)’의 묵서는 730년을 가리킨다. 제1차 견발해사인 引田蟲麻呂 등이 가하군에 도착한 해가 730년임을 참고해 볼 때, 아마도 토기에 연호를 적어 그들의 무사 귀환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윤재운, 일본소재 발해 유적유물의 종합적 검토, 한국사학보41, 2010년 11월
해설
우네다지추[畝田寺中] 유적은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우네다[畝田]·지추[寺中]정[町]에 위치한다. 사이[犀]천(川) 하구 주변에 지류가 다수 형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인접해 있으며 가나이와혼마치[金石本町] 유적의 남서쪽에 있다.
우네다지추[畝田寺中] 유적은 사이[犀]천을 따라 가나이와혼마치 유적과 함께 형성된 항만시설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야요이시대부터 고대, 중세의 유적이 있으나 고대의 유적은 주로 8세기를 중심으로 한다. 조사 결과 폭이 약 20m 정도의 자연하천 유적과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자연하천 유적의 오른쪽 언덕에서는 8동의 창고가, 왼쪽 언덕에서는 2×6칸의 대형 건물이 발굴되었다. 창고 뒤로는 도로가 정비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보관 물자를 수로나 육로로 운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이 유적에서는 ‘진사(津司)’, ‘진(津)’, ‘천평2년(天平二年)’ 등의 묵서가 있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진사(津司)’와 관련해서는 720년, “도도진경진사(渡嶋津輕津司) 종7위상(從七位上) 제군안남(諸君鞍男) 등 6명을 말갈국에 보내 그 풍속을 살피게 하다.”라는 것으로 『속일본기』의 기록이 유일하다. 이 기록을 통해 모루키미 쿠라오[諸君安男]가 에미시[蝦夷]를 비롯한 북방민족과의 접촉이나 교역을 관리하는 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을 비추어본다면 이 곳, 가가[加賀]에서도 ‘진사(津司)’라는 직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단순한 항만 관리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발해나 타 지역과의 교역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평2년(天平二年)’은 730년이다. 이 해는 발해로 보낸 사신 히키타 무시마로[引田蟲麻呂] 일행이 발해로부터 귀국한 해이다. 히키타 무시마로[引田蟲麻呂]는 최초로 일본에서 발해로 보내진 사신이다. 발해는 무왕대 727년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 사절단은 에미시[蝦夷]의 땅에 도착, 이들에게 공격을 받아 대사인 고인의를 비롯한 16명이 죽고 고제덕(高齊德) 등 8명만이 죽음을 면하고 데와[出羽]에 간신히 도착했다. 728년 정월 이들은 조하 의례에 참여하고, 6월 발해로 돌아갔는데, 이때 일본의 송사가 히키타 무시마로였다. 히키타 무시마로 일행은 730년 8월에 에치젠[越前]국 가가[加賀]군으로 돌아왔다. 히키타 무시마로 일행이 가가[加賀]군에 도착한 해가 730년임을 고려한다면, 이 토기의 묵서는 그들의 무사귀환을 감사하는 의식에서 쓰였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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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네다 지추유적 자료번호 : isea.d_0003_0020_012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