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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농안고성

農安古城
  • 저필자
    정동준(충남대학교)
  • 시대
    부여/발해/요금
  • 원소장처
    吉林省 農安縣 農安鎭
  • 시대
    발해
  • 유형
규모
둘레: 3,840m, 남: 937m, 북: 983m, 동: 936m, 서: 984m
입지
남쪽으로 장춘시(長春市)와는 70km, 동쪽으로 이통하(伊通河)와는 1km 떨어져 있다. 장(춘)백(성)(長(春)白(城))철로와 도(문)오(란호특)(圖(們)烏(蘭浩特))도로가 성 서쪽 400m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나간다.
유적개관
성의 평면은 방형이다. 네 성벽 중간에는 문이 한 곳씩 있다. 이 밖에도 각각 동·서·남 3문의 옆에 작은 문이 있다. 성벽은 흙을 판축하여 쌓았다. 성벽 사방모서리에는 모두 각루가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민가 및 현대식 건축물이 점유하였다.
해설
송요(松遼) 평원 중서부, 이통하(伊通河) 왼쪽 강가의 농안현(農安縣)에 있다. 남쪽으로 장춘시(長春市)와는 70km, 동쪽으로 이통하와는 1km 떨어져 있다. 장춘(長春)∼백성(白城) 간 철도와 도문(圖們)∼오란호특(烏蘭浩特) 간 도로가 성 서쪽 400m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나간다.
농안(農安) 고성(古城)은 지금의 농안진(農安鎭) 읍내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평면은 방형에 둘레는 3,840m이고, 성벽은 흙을 판축(版築)하여 쌓았다. 성벽의 토대 너비는 30m이고, 북쪽 성벽의 남아 있는 높이가 0.5∼2m, 동쪽 성벽의 남아 있는 높이가 1.3m이다. 남쪽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어 남쪽 성문의 동쪽만 겨우 흔적을 남기고 있고, 서쪽 성벽은 모두 주거용으로 사용되어 조사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네 성벽 중간에는 문이 한 곳씩 있는데, 이 밖에도 각각 동서남 3문의 옆에 작은 문이 있다. 성벽 사방모서리에는 모두 각루(角樓)가 있는데, 동북쪽 각루는 남아 있는 높이가 7m, 동남쪽 각루는 남아 있는 높이가 3m지만, 서남쪽과 서북쪽 각루는 흔적만 있을 뿐이다.
농안 고성은 부여가 축조하였고, 후기에는 수도까지 되었다. 이후 발해·요(遼: 907∼1125)·금(金: 1115∼1234)·원(元: 1206∼1368)·명(明: 1368∼1644)·청(淸: 1616∼1912) 등 역대에 걸쳐 사용되었다. 학계에서는 발해 때 부여부(扶餘府)가 있던 곳으로, 서쪽으로 거란을 방비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고 보고 있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 지역은 부여부에서 요의 황룡부(黃龍府)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농안현의 별칭 중 하나가 황룡부이다. 황룡부로 개편된 후에도 농안 고성이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고성의 형태는 요 이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부여의 왕성이나 발해 부여부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성을 바탕으로 발해 부여부 성의 형식·둘레·건축시설 등은 고찰할 수 없으나, 문헌에 근거하여 이 성이 발해 부여부였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 안 중심부에는 요 성종(聖宗代: 982∼1031)에 세운 13층의 전탑이 있어 관광지로 매우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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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안고성 자료번호 : isea.d_0003_0010_008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