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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울릉도에 대해 왜인에게 보냈던 서계가 모호하다 하여, 찾아오게 하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694년 2월 23일(음)
  • 출전
사료해설
이 사료는 1693년 3월 일본 돗토리번의 어민들에게 납치된 안용복과 박어둔이 송환된 1693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694년 2월까지 울릉도를 둘러싸고 조선과 대마도간에 진행된 교섭 내용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는 안용복과 박어둔의 송환과 조선인의 ‘죽도(울릉도)출어금지’ 교섭을 지시하였다. 이에 대마도는 교섭 업무를 수행할 재판차왜로 다다 요자에몬(多田與右衛門; 橘眞重)을 임명하고 조선에 파견하였다. 11월 2일 다다 일행은 예조참판 앞 서계를 지참하고, 피랍인 안용복과 박어둔을 데리고 왜관에 도착하였으며. 한 달여 뒤인 12월 10일에 안용복 등의 신병을 동래부에 넘겼다.
당시 서계의 내용은 안용복 등을 납치한 경위와 ‘죽도’는 일본 땅이므로 조선인의 죽도출입을 금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서 말하는 죽도가 울릉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경계 울릉도(敝境之鬱陵島)’라는 구절을 넣어 답서를 작성해 주었다. 즉 ‘울릉도=죽도(1도 2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울릉도≠죽도(2도 2명)’식의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답서의 내용을 확인한 대마도는 답서 속의 ‘울릉’이라는 두 글자를 삭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가 울릉 두 글자의 삭제를 요청하는 것은 울릉도를 일본영토화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판단,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결국 다다 일행은 3개월여를 왜관에 머물며 서계 개찬을 요구하다가 아무런 수확 없이 이듬해 2월 27일 대마도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의 대응은 쓰시마의 잘못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선에서 처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논의는 안용복을 ‘불법월경죄인’ 으로 처리하여 유배시키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후에 승지 김만구(金萬龜)는 경연에서 울릉도에 진(鎭)의 설치하여 변고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 안용복을 유배에 처한 것은 너무 과한 처벌이었다는 의견을 내었다. 남구만은 조선전기 이래 일본이 울릉도를 점거하려고 시도한 사례와 대마도가 조선에 보내왔던 1차 서계에 대한 조선의 대응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등을 거론하면서, 1693년(숙종 19)에 조선이 대마도에 보냈던 회답서계의 환수와 일본의 태도를 책망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일본측에서 말하는 ‘죽도(竹島)’와 조선이 말하는 울릉도는 같은 섬으로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숙종에게 강경한 대응을 요청하자, 조정에서는 앞서 대마도에 건넸던 회답서계의 회수를 결정했다. 이는 당시 조선 정부가 강역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대외에 천명한 사례이다.
원문
○癸酉春/ 蔚山漁採人四十餘口, 泊船於鬱陵島。 倭船適到, 誘執朴於屯、安龍福二人而去。 及其冬, 對馬島使正官橘眞重, 領送於屯等, 仍請禁我人之漁採於竹島者, 其書曰: “貴域瀕海漁氓, 比年行舟於本國竹島, 土官詳諭國禁, 固告不可再。 而今春漁氓四十餘口, 入竹島雜然漁採, 土官拘其二人, 爲一時證質。 本國因幡州牧, 馳啓東都, 令漁氓附與弊邑, 以還故土。 自今以後, 決莫容船於彼島, 彌存禁制, 使兩國交誼, 不坐釁郄。” 自禮曹覆書曰: “弊邦禁束漁氓, 使不得出於外洋, 雖弊境之鬱陵島, 亦以遼遠之故, 不許任意往來, 況其外乎? 今此漁船, 敢入貴境竹島, 致煩領送, 遠勤書諭, 隣好之誼, 實所欣感, 海氓獵漁, 以爲生理, 不無漂轉之患, 而至於越境深入, 雜然漁採, 法當痛徵。 今將犯人等, 依律科罪, 此後沿海等處, 嚴立科條而申勅之。” 仍以校理洪重夏, 差接慰官, 至東萊倭館, 則橘眞重, 見覆書中弊境鬱陵之說, 甚惡之, 謂譯官曰: “書契只言竹島固好, 必奉鬱陵者, 何也?” 仍屢請刪改, 而私送其從倭, 通議於馬島, 殆至半月, 遷延未決。 重夏使譯官責之。 從倭私謂譯官曰: “島主必欲刪鬱陵二字, 而如有難處者, 亦許受書正官之委曲請改, 自爾如此。” 又迭爲游辭以爭之, 朝廷終不聽。 橘眞重計窮情露, 乃受書以歸。 於是, 治泊船鬱陵島人, 或刑訊或編配。 後承旨金龜萬侍講筵, 白上曰: “臣昔爲江原都事, 至海上, 問居人以鬱陵島, 則爲指示之, 臣早起遙望, 三峰歷歷, 及日出, 都不可見矣。 以此比之於靈巖月出山之望濟州, 則尙爲近矣。 臣謂當置鎭于此島, 以備不虞。 向者漁採人之謫配, 恐爲過也。” 上曰: “爾言亦有見矣。”
【史臣曰: “倭人所謂竹島, 卽我國鬱陵島。 而鬱陵之稱, 見於羅ㆍ麗史乘及唐人文集, 則其來最遠矣。 島中多産竹, 亦有竹島之稱, 而其實一島二名也。 倭人隱鬱陵之名, 但以竹島漁採爲辭, 冀得我國回言, 許其禁斷然後, 仍執左契, 以爲占據之計。 我國覆書之必擧鬱陵者, 乃所以明其地之本爲我國也。 倭人之必欲改鬱陵二字, 而終不顯言竹島之爲鬱陵者, 蓋亦自病其曲之在己也。 噫! 祖宗疆土, 不可以與人, 則明辨痛斥, 使狡倭無復生心, 義理較然, 而過於周愼, 徒欲羇縻, 如犯人等科罪之語, 尤示弱於隣國, 可勝惜哉?”】
是夏, 南九萬白上曰: 東萊府使報: ‘倭人又言, 「朝鮮人入於吾竹島, 宜禁其更入也」 臣見《芝峰類說》,【故判書李晬光所著, 芝峯卽其號。】倭奴占據礒竹島, 礒竹, 卽鬱陵島也。 今倭人之言, 其爲害, 將無窮, 前日答倭書, 殊糢糊, 宜遣接慰官, 推還前書, 直責其回賓作主可也。’ 新羅圖, 此島亦有國名, 納土貢。 高麗太祖時, 島人獻方物。 我太宗朝, 不勝倭患, 遣按撫使, 刷出流民而空其地, 今不可使倭居之。 祖宗疆土, 又何容與人乎?” 申汝哲曰: “臣聞寧海漁人, 島中多大魚, 又有大木大竹如杠, 土且沃饒, 倭若據而有之, 旁近江陵、三陟必受其害。” 上用九萬言, 命還前書。
번역문
계유년[1693 숙종 19년.] 봄에 울산(蔚山)의 고기잡이 40여 명이 울릉도(鬱陵島)에 배를 대었는데, 왜인(倭人)의 배가 마침 이르러, 박어둔(朴於屯)·안용복(安龍福) 2인을 꾀어내 잡아서 가버렸다. 그 해 겨울에 대마도(對馬島)에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으로 하여금 박어둔 등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이내 우리 나라 사람이 죽도(竹島)에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서신(書信)에 이르기를,
“귀역(貴域)의 바닷가에 고기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本國)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토관(土官)이 국금(國禁)을 상세히 알려 주고서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는데도, 올봄에 어민(漁民)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토관이 그 2인을 잡아두고서 한때의 증질(證質)로 삼으려고 했는데, 본국(本國)에서 번주목(幡州牧)이 동도(東都)에 빨리 사실을 알림으로 인하여, 어민을 폐읍(弊邑)에 맡겨서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결단코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금제(禁制)를 보존하여 두 나라의 교의(交誼)로 하여금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회답하는 서신에 이르기를,
“폐방(弊邦)에서 어민을 금지 단속하여 외양(外洋)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니 비록 우리 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또한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그 밖의 섬이겠습니까? 지금 이 어선(漁船)이 감히 귀경(貴境)의 죽도에 들어가서 번거롭게 거느려 보내도록 하고, 멀리서 서신(書信)으로 알리게 되었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정의(情誼)는 실로 기쁘게 느끼는 바입니다. 바다 백성이 고기를 잡아서 생계(生計)로 삼게 되니 물에 떠내려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마는, 국경을 넘어 깊이 들어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는 것은 법으로서도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犯人)들을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고, 이후에는 연해(沿海) 등지에 과조(科條)를 엄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하도록 할 것이오.”
하였다. 이내 교리(校理) 홍중하(洪重夏)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임명하여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이르게 했는데, 귤진중이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서신 중에 ‘우리 나라의 울릉도란 말’을 보고는 매우 싫어하여 통역관(通譯官)에게 이르기를,
“서계(書契) 에 다만 죽도(竹島)라고만 말하면 좋을 것인데, 반드시 울릉도를 들어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면서, 이내 여러 번 산개(刪改)하기를 청하고는, 사사로이 그 따라온 왜인을 보내어 대마도에 통하여 의논하기를 거의 반 달이나 되면서 시일을 지체하여 결정하지 않으므로, 홍중하가 통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책망하니, 따라온 왜인이 사사로 통역관에게 이르기를,
“도주(島主)[대마 도주(對馬島主)]는 반드시 울릉(鬱陵)이란 두 글자를 깎아 버리려고 했으니, 난처(難處)한 일이 있는 듯하며, 또한 자세히 고치기를 청하는 정관(正官)의 서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절로 이와 같이 되었다.”
하고는, 또 번갈아 근거 없는 말을 하면서 다투므로, 우리 조정에서 마침내 들어주지 않았다. 귤진중이 꾀가 다하고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그제야 서계를 받고서 돌아갔다. 이에 울릉도에 배를 정박했던 사람을 치죄(治罪)하여 혹은 형신(刑訊)하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후에 승지 김만귀(金萬龜)가 강연(講筵)에 모시고 있다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옛날에 강원 도사(江原都事)가 되었을 때, 바닷가에 이르러 거주하는 사람에게 울릉도를 물었더니 가리켜 보이므로, 신이 일찍이 일어나 멀리서 바라보니 세 봉우리가 뚜렷했는데, 해가 뜰 때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에서 제주(濟州)를 바라본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가까운 편입니다. 신은 마땅히 이 섬에 진(鎭)을 설치하고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고기잡는 사람을 귀양보낸 일은 아마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또한 소견(所見)이 있도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 나라의 울릉도인데, 울릉이란 칭호는 신라(新羅)·고려(高麗)의 사서(史書)와 중국 사람의 문집(文集)에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由來)가 가장 오래 되었다. 섬 가운데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또한 죽도란 칭호가 있지마는, 실제로 한 섬에 두 명칭인 셈이다. 왜인들은 울릉이란 명칭은 숨기고서 다만 죽도에서 고기잡는다는 이유를 구실로 삼아서,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말을 얻어서 그 금단(禁斷)을 허가받은 후에 이내 좌계(左契)를 가지고서 점거(占據)할 계책을 삼으려고 했으니, 우리 나라의 회답하는 서계에 반드시 울릉이란 명칭을 든 것은, 그 땅이 본디 우리 나라의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왜인들이 반드시 울릉이란 두 글자를 고치려고 하면서도, 끝내 죽도가 울릉도가 된 것을 드러나게 말하지 않는 것은, 대개 그 왜곡(歪曲)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스스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 조종(祖宗)의 강토(疆土)는 남에게 줄 수가 없으니 명백히 분변하고 엄격히 물리쳐서 교활한 왜인(倭人)으로 하여금 다시는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 의리가 분명한데도, 주밀하고 신중한 데에 지나쳐서 다만 견제(牽制)하려고 한 것이 범인(犯人)들에게 과죄(科罪)하는 말과 같이, 더욱 이웃 나라에 약점(弱點)을 보였으니, 이루 애석함을 견디겠는가?.
이해 여름에 남구만(南九萬)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보고에 왜인이 또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람은 우리의 죽도에 마땅히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신(臣)이 《지봉유설(芝峰類說)》【고(故) 판서(判書) 이수광(李睟光)이 저술한 책으로, 지봉(芝峰)은 그의 호(號)이다.】을 보니,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占據)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왜인의 말은 그 해독이 장차 한정이 없을 것인데, 전일 왜인에게 회답한 서계가 매우 모호했으니, 마땅히 접위관을 보내어 전일의 서계를 되찾아와서 그들이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일을 바로 책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라 때 이 섬을 그린 그림에도 또한 나라 이름이 있고 토공(土貢)을 바쳤으며, 고려 태조(太祖) 때에 섬 사람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적이 침입하는 근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안무사(按撫使)를 보내어 유민(流民)을 찾아 내오게 하고는, 그 땅을 텅비워 두게 했으나,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신여철(申汝哲)은 아뢰기를,
“신이 영해(寧海)의 어민에게 물으니, ‘섬 가운데 큰 물고기가 많이 있고, 또 큰 나무와 큰 대나무가 기둥과 같은 것이 있고, 토질도 비옥하다.’고 하였는데, 왜인이 만약 점거하여 차지한다면 이웃에 있는 강릉(江陵)과 삼척(三陟) 지방이 반드시 그 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남구만의 말을 들어 써서 전일의 서계를 돌려오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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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에 대해 왜인에게 보냈던 서계가 모호하다 하여, 찾아오게 하다 자료번호 : sd.d_0149_0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