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관찰사 이극돈이 무릉도를 수색한 바를 치계하다
사료해설
5월 18일에 삼봉도 수색을 위해 4척의 배가 울진포(蔚珍浦)에서 출발하였다. 삼봉도 경차관 박종원(朴宗元)이 탄 배는 삼봉도를 찾지 못하고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멀리서 무릉도(武陵島;울릉도)를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나머지 3척의 배는 무릉도에 도착하여 3일간 머물면서 섬 일대만을 조사하고 돌아와, 섬 가운데를 수색해보니 사람이 살지는 않고 옛 집터만이 있을 뿐이었다고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을 통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성종은 삼봉도 수색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년에 두 번 시도하기는 어렵다고 수색을 일시 중단시켰다. 세종대부터 실시된 울릉도민에 대한 쇄환정책으로 이 시기에 이르면 울릉도에는 백성들이 살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왕조가 동해에 있는 섬의 존재에 대해서 영토의식을 갖고 지속적으로 탐색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문
○江原道觀察使李克墩馳啓曰: “三峯島敬差官朴宗元與所領軍士, 分乘四船, 去五月二十八日, 自蔚珍浦發去, 卽遇大風四散。 朴宗元之船, 東北去, 二十九日平明, 向東南, 望見武陵島, 可十五里, 復遇大風, 船纜絶, 漂流大洋中, 不知東西者七晝夜。 本月初六日午時, 到杆城郡淸簡津。 司直郭永江等三船, 去五月二十九日, 至武陵島, 留三日, 搜索島中, 不見居人, 只有舊家址而已。 島中有竹, 其大異常, 永江等取數竿載船, 發回, 本月初六日, 至江陵羽溪縣梧耳津。 今風氣漸高, 海波險惡, 更遣爲難。 放遣本道軍士, 京軍士分運上送, 何如?”
번역문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극돈(李克墩)이 치계(馳啓)하기를,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지난 5월 28일에 울진포(蔚珍浦)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곧 큰 바람을 만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박종원의 배는 동북쪽으로 가서, 29일 새벽[平明]에 동남쪽을 향하여 무릉도(武陵島)를 바라보니 15리(里) 쯤 되었는데 다시 큰 바람을 만나 닻줄[纜]이 끊어져서 대양(大洋) 가운데로 표류(漂流)하여 동서(東西)를 알지 못한 지 7주야(晝夜)가 되었다가 이달 초6일 오시(午時)에 간성군(杆城郡)의 청간진(淸簡津)에 이르렀습니다.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의 세 배는 지난 5월 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搜索)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섬 가운데 대[竹]가 있어 그 크기가 이상하였으므로 곽영강 등이 두어 개[數竿]를 베어 배에 싣고 돌아와, 이달 초6일에 강릉(江陵)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바람 기운이 점점 높고 바다의 물결도 험악하여 다시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본도의 군사와 서울의 군사를 놓아 보내는데, 운(運)을 나누어서 올려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지난 5월 28일에 울진포(蔚珍浦)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곧 큰 바람을 만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박종원의 배는 동북쪽으로 가서, 29일 새벽[平明]에 동남쪽을 향하여 무릉도(武陵島)를 바라보니 15리(里) 쯤 되었는데 다시 큰 바람을 만나 닻줄[纜]이 끊어져서 대양(大洋) 가운데로 표류(漂流)하여 동서(東西)를 알지 못한 지 7주야(晝夜)가 되었다가 이달 초6일 오시(午時)에 간성군(杆城郡)의 청간진(淸簡津)에 이르렀습니다.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의 세 배는 지난 5월 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搜索)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섬 가운데 대[竹]가 있어 그 크기가 이상하였으므로 곽영강 등이 두어 개[數竿]를 베어 배에 싣고 돌아와, 이달 초6일에 강릉(江陵)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바람 기운이 점점 높고 바다의 물결도 험악하여 다시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본도의 군사와 서울의 군사를 놓아 보내는데, 운(運)을 나누어서 올려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