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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울진현(蔚珍縣)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

사료해설
1531년(중종26)에 이행(李荇), 윤은보(尹殷輔), 신공제(申公濟) 등이 왕명을 받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증보하여 편찬한 관찬지리지이다.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부른다. 두 섬은 울진현의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으며, 세 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을 계승한 것으로 우산도(독도)와 울릉도가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의 울진현에 속해 있는 조선의 영토이며, 우산도(독도)가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는 섬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첨부된 지도인 「팔도총도(八道總圖)』나 「강원도도(江原道圖)」에도 동해에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당시 조선정부가 두 섬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문
于山島 鬱陵島[一云武陵一云羽陵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岌嶪撑空南峯稍卑風日淸明則峯頭樹木及山根沙渚歷歷可見風便則二日可到一說于山鬱
陵本一島地方百里新羅時恃險不服智說王十二年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國人愚悍難以
威服可以計服乃多以木造獅子分載戰艦抵其國誑之曰汝若不服則卽放此獸踏殺之國人恐懼來
降高麗太祖十三年其島人使白吉土豆獻方物毅宗十三年王聞鬱陵地廣土肥可以居民遣溟州道
監倉金柔立曰視柔立回奏云島中有大山從山頂向東行至海一萬餘步向西行一萬三千餘步向南
行一萬五千餘步向北行八千餘步有村落基址七所或有石佛鐵鍾石塔多生柴胡藁本石南草後崔
忠獻獻議以武陵土壤膏沃多珍水海錯遣使往觀之有屋基破礎宛然不知何代人居也於是移東郡
民以實之及使還多以珍木海錯進之後屢爲風濤所蕩覆舟人多物故因還其居民本朝 太宗時聞
流民逃其島者甚多再命三陟人金麟雨爲按撫使刷出空其地麟雨言土地沃饒竹大如杠鼠大如猫
桃核大於升凡物稱是 世宗二十年遣縣人萬戶南顥率數百人往搜逋民盡俘金丸等七十餘人而
還其地遂空 成宗二年有告別有三峯島者乃遣朴宗元往覓之因風濤不得泊而還同行一船泊鬱
陵島只取大竹大鰒魚回啓云島中無居民矣]
번역문
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ㆍ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 리라고 한다. 신라 때에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위엄으로 항복하기 어렵고,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전함(戰艦)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猛獸)들을 놓아서 밟아 죽이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의 사람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왕이 울릉도가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유립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1만여 보(步)요, 서쪽으로는 1만 3천여 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 보, 북쪽으로는 8천여 보이며 촌락터 일곱 곳이 있고, 혹 돌부처ㆍ무쇠종ㆍ돌탑이 있으며 시호(柴胡)ㆍ고본(藁本)ㆍ석남초(石南草)가 많이 납니다.” 하였다. 후에 최충헌(崔忠獻)이 헌의(獻議)하여 무릉도에 토지가 비옥하고, 진기한 나무, 해산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는데, 집터, 깨어진 주춧돌이 완연하여, 어느 시대에 사람이 살던 것인지 몰랐다. 여기에 동쪽 고을 백성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사신이 돌아오면서, 진기한 나무와 해산물을 많이 가져다 헌납하였다. 그 후 자주 풍파로 인하여 배가 엎어지고, 사람이 많이 상하니 그만 거기서 살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본조 태종 때에, 유리하는 백성이 그 섬으로 도망한 자가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按撫使)를 삼아서 돌아오게 하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인우의 말이, “토지가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다릿목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사의 크기는 됫박 만한데, 모두 물건이 다 이렇습니다.” 하였다. 세종 20년에 울진현 사람 만호(萬戶) 남호(南顥)를 보내어서 수백 사람을 데리고 가서 도망해 가 있는 백성들을 수색하여 김환(金丸) 등 70여 명을 잡아가지고 돌아오니 그곳 땅이 그만 비었다. 성종 2년에, 따로 삼봉도(三峯島)가 있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정박하였다가, 큰 대나무와 큰 복어를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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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현(蔚珍縣)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 자료번호 : sd.d_0111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