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동이전

백제왕 여경(餘慶)이 올린 표문(表文)

연흥 2년(472) 그 왕 여경주 001
번역주 001)
餘慶 : 백제 21대 개로왕으로, 재위 기간은 455~475년이다. 毗有王의 長子로서 『삼국사기』 본문에는 ‘慶司’라는 이름으로, 細注에는 ‘近蓋婁’라는 별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近蓋鹵’로, 『일본서기』 雄略紀 5年條에는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로 기술되어 있다.
닫기
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표문주 002
번역주 002)
표문 : 개로왕 18년(472) 백제가 북위에 보낸 표문과 478년 왜왕 무(武)가 남송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 나오는 어구와 동일한 표현이 648년에 편찬된 『진서』에서 다수(136개) 확인되는 것에 착안하여 표문의 原典과 표문의 찬자에 대해 고찰한 연구가 있다. 진대부터 남북조시대에는 사학이 융성해서 적어도 5세기 중반까지는 『진서』의 원본 같은 것이 이미 완성·유포되어 있었거나, 후에 『진서』를 구성하게 된 복수의 진대에 관한 사서류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백제의 상표문과 왜의 상표문이 『진서』의 원본의 용어를 주된 전거로 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상표문은 동일인이 기초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한자만이 아니라 漢籍에도 밝고 예민한 정치감각과 국제감각을 갖췄을 중국계 망명인 내지 유학승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며, 472년 북위의 상표문을 기초했던 이 백제의 관인은 475년 한성 함락 후 왜국으로 망명해서 왜왕 무에게 등용되어 왜의 상표문을 기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內田淸, 1996).
닫기
을 올려 아뢰었다.주 003
번역주 003)
『위서』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5 百濟本紀3 개로왕 18년조에 실려 있다. 북위에 표문을 보내기 전까지 백제는 동진, 송나라 등 남조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472년 갑자기 북위와 교섭을 하고 있어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 471년을 끝으로 송과의 관계가 한동안 중단된 것이 백제가 북위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466년 북위 顯祖의 후궁을 맞이하는 문제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고구려에게 현조의 후궁을 요구했으나, 북위와 통혼을 했던 북량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구려는 북위가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올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는데(노태돈, 2005), 백제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실력자인 문명태후가 장수왕에게 주살당한 풍홍(馮弘)의 손녀이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판단한 백제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徐榮敎, 2004)도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혼사 문제로 틈이 벌어지고, 송과의 교섭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감하게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원병을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가 북위와 교섭을 한 목적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고, 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는 내용은 왜왕 무(武)가 478년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도 보인다(『송서』 97 왜국조). 따라서 『위서』에 수록된 표문과 조서의 내용은 백제와 고구려가 북조와 남조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는 점, 고구려가 동아시아 정세에서 다자간 세력균형의 한 축이었다는 점, 또 실제로 북위가 조서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점, 북위 사신의 조서가 백제에 도달하지 못한 점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닫기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승냥이와 이리주 004
번역주 004)
豺狼 : 원래의 의미는 승냥이와 이리를 말하나, 여기에서는 고구려를 비하해서 쓴 표현이다.
닫기
가 길을 막으니, 비록 대대로 영험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으로서의 예를 받들주 005
번역주 005)
奉藩 : 藩國으로서 받들다. 번국은 왕실의 藩屛, 즉 울타리가 되는 나라라는 의미로 제후국을 지칭한다.
닫기
방법이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주 006
번역주 006)
雲闕 : 구름처럼 우뚝 솟은 천자의 궁궐을 비유한 말이다.
닫기
을 바라보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끝닿는 데가 없을 지경입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때에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에 잘 조화하시는지라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주 007
번역주 007)
冠軍將軍 : 이에 대해서는 『송서』 각주 참조.
닫기
·부마도위주 008
번역주 008)
駙馬都尉 : 임금의 사위에게 준 칭호이다. 부마도위는 원래 천자가 타는 副車에 딸린 말, 즉 駙馬를 맡은 벼슬에 불과했다. 위진 이후 공주의 남편 되는 사람에 한해서 이 벼슬을 주면서 임금의 사위를 부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닫기
·불사후주 009
번역주 009)
弗斯侯 : 불사후는 동성왕이 永明 8年(490, 동성왕 12년)에 남제에 국서를 보내 신하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작호를 제수해주기를 요청하는 기사에도 나온다. ‘弗斯’라는 지명의 위치에 대해서는 『남제서』 각주 참조.
닫기
·장사 여례주 010
번역주 010)
餘禮 : 부마도위이므로 백제왕의 사위이지만 백제의 왕성이 餘氏이기 때문에 왕족으로 보기도 한다.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중앙 관직은 막부의 막료인 長史인데, 사위가 사신으로 파견된 점이 주목된다.
닫기
와 용양장군주 011
번역주 011)
龍驤將軍 : 중국 晉나라 武帝가 王浚을 용양장군에 처음 임명하였으며 3품에 해당하였다. 남조에서는 假官으로 散官의 성격을 가졌다. 北朝에서도 용양장군을 두었는데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임명되었다. 北魏와 北齊에서는 종3품에 해당하였다(俞鹿年, 1992).
닫기
·대방태수주 012
번역주 012)
帶方太守 : 이에 대해서는 『남제서』 각주 참조.
닫기
·사마 장무주 013
번역주 013)
張茂 : 황해도 鳳山郡 松山里에서 대방군 태수인 張武夷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송서』 백제전에는 구아신왕 5년 송나라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張威가 보이기 때문에 대방 지역에 연고를 가진 인물 또는 대방 출신으로 추정된다. 장씨는 백제에 흡수된 후 대중국 외교 업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윤용구, 2007).
닫기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서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바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의 신과 땅의 신주 014
번역주 014)
神祇 : ‘天神地祇’의 줄임말.
닫기
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영험이 크게 덮어주셔서 천자의 궁궐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펼쳐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주 015
번역주 015)
旦聞石沒 : 『논어』 里仁篇에 있는 공자의 말 “朝聞道 夕死可矣”에서 따온 표현이다.
닫기
고 해도 영원토록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또 아뢰었다. “신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주 016
번역주 016)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중국계 사서에서 백제 왕족 부여기원설이 전승되는 시발점이 되는 기사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주서』 및 『신당서』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백제의 원류가 부여계와 직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현혜, 1991). 이와 함께 성왕의 아들 餘昌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 전 “성은 [고구려 왕실과] 같다.”고 한 기사에 대해서도 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계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의식의 소산이라고 보아왔다(노중국, 1997). 부여출자설이 강조되는 시기는 고구려와 외교·군사적인 대결을 치열하게 전개한 시기였다(朴燦圭, 2003)는 지적도 있다.
닫기
선대에는 예전의 우의를 돈독하게 유지하였으나 그 할아버지인 쇠주 017
번역주 017)
釗 : 고구려 제16대 왕인 고국원왕으로, 재위 기간은 341~371년이다. 미천왕의 아들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또 다른 이름인 斯由로 전하고 있다. 요동 지역을 놓고 팽창하는 전연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 국내성이 함락당하기도 했으며, 371년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닫기
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볍게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할아버지인 수주 018
번역주 018)
須 :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으로, 재위 기간은 375~384년이다. 근초고왕의 아들로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조와 56년 조에는 왕자 貴須, 권9 흠명기 2년조에는 貴首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七支刀 명문의 “百濟王世□ 奇生聖音”의 奇 또는 奇生을 근구수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6). 근초고왕 26년(371) 태자로서 왕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닫기
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재빠르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이 잠시 오가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습니다.주 019
번역주 019)
梟斬釗首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6년(371)조에는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원왕을 효수하였다는 표현은 이 사실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닫기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주 020
번역주 020)
馮氏數終 : 풍씨란 북연의 馮弘을 말한다. 북연은 2세 28년간(409~436) 존속한 왕조로, 후연의 장군 馮拔이 건국하였다. 풍발은 처음 후연의 慕容熙를 제거하고 고구려계 慕容雲(高雲)을 추대하였으나 그가 시해되자 409년 昌黎를 근거로 스스로 天王에 즉위하여 북연을 세웠다. 430년 풍발의 동생인 풍홍이 뒤를 이어 왕에 즉위하였으나 山西省 방면에서 진출한 북위에 고전을 하다가 수도인 龍城(현재의 요령성 조양)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닫기
남은 무리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오자주 021
번역주 021)
餘燼奔竄 : 436년 5월 북위의 太武帝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포위하자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이 葛盧孟光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주어 몸만 겨우 구출되었다. 그러나 풍홍은 고구려가 자신을 臣屬人으로 취급하는 것에 반발하여 송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자 북연의 재기를 바라지 않던 고구려 장수왕은 신속하게 풍홍을 제거하였다. 혼란의 와중에 많은 북연인들이 고구려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황을 표현한 문구이다. 북연인의 일부는 송으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백제에도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닫기
추악한 무리들이 점점 번성해져서주 022
번역주 022)
醜類漸盛 : 추악한 무리에 대해 북연 계통의 군사들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뒤 문장과의 연결 관계로 볼 때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가 풍홍이 망명한 후 점차 번성해졌다고 함으로써 북위의 적개심을 부추기려는 백제의 선동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이병도, 1977).
닫기
마침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이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주 023
번역주 023)
북연의 풍홍이 망명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화되자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추진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던 남진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재개는 백제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여 비유왕이 왜·신라·송과의 외교를 추진하는 한편 북위와 교섭을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 나오는 “構怨連禍 三十餘年”과 뒤에 나오는 “去庚辰年後”의 경진년이 440년 (비유왕 14)에 해당하기 때문에 두 기사를 근거로 경진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북위가 백제에 사신을 보냈고, 그에 앞서 백제가 북위에 먼저 사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438년 북연의 멸망으로 화북 지역에서의 정세가 급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진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고, 고구려는 북위가 백제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440년부터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낸 472년까지 30여 년이 되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원한 관계가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보았다(노중국, 2005).
닫기
만약 천자의 자비와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曲矜)이 멀리까지 예외 없이 미친다면 속히 한 명의 장수를 보내 신의 나라를 구해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미천한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척의 땅과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아뢰었다. “지금 연(璉)주 024
번역주 024)
璉 : 고구려 20대 長壽王으로, 413~491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오랫동안 재위하였기 때문에 ‘장수’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직접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닫기
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아주 025
번역주 025)
장수왕이 평양 천도 후 왕권에 저항하는 유력 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닫기
죄가 차고 악이 쌓였으며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적기요, 손을 써야 할 때입니다. 또 풍씨 일족주 026
번역주 026)
馮族 :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왕 풍홍을 따라온 집단을 가리킨다.
닫기
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이 있고,주 027
번역주 027)
鳥畜之戀 : ‘집에서 기르는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북연의 군사들이 주인 격이 되는 북위에 대한 연모의 정이 있는 것을 지칭한다.
닫기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주 028
번역주 028)
首丘之心 : 『예기』 권7 檀弓 上에 나오는 “狐死正丘首仁也”에서 유래한 말로, ‘여우는 죽을 때에 본래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의미이다.
닫기
천자의 위엄을 한번 떨친다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주 029
번역주 029)
有征無戰 : 征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無道함을 공격하여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구려를 치는 것은 죄 있는 무리를 쳐서 바로잡는 ‘征伐’만 있는 것이지, 국가와 국가 사이에 무력으로 벌어지는 전쟁은 아니라고 표현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晉書·樂志下』 “言宣帝致討吳方, 有征無戰也.” 『隋書·李密傳』 “明公親簡精銳, 西襲長安, 百姓孰不郊迎, 必當有征無戰.” 『北史·尉遲迥傳』 “唯迥以爲紀旣盡銳東下, 蜀必空虛, 王師臨之, 必有征無戰.”
닫기
신은 비록 명민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 바쳐 마땅히 예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주 030
번역주 030)
隗囂 : 중국 後漢 시기의 인물로, 자는 季孟이다. 반역을 잘하는 사람을 뜻한다. 외효는 왕망이 세운 신(新) 말에 劉玄을 섬기다가 배신하여 光武帝를 받들었고, 다시 배반하여 公孫述을 섬기다가 광무제의 정벌을 받고 서역으로 도망가 죽었다. 이 때문에 배반을 잘하는 인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닫기
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소행을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주 031
번역주 031)
劉氏 : 동진의 권신인 劉裕가 420년 건국한 송나라 황실의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남북조 시기 송나라를 의미한다. 존속 기간은 420~479년으로 趙匡胤이 세운 송(960~1279)과 구별하여 劉宋이라 부르기도 한다. 建康(현재의 중국 강소성 남경)에 도읍하였으며, 북중국을 점차 통일하면서 등장한 北朝의 北魏에게 밀리면서 급격히 쇠퇴하고, 8대 順帝 劉準 때에 이르러 권신인 蕭道成에게 찬탈당하여 8대 59년만인 479년에 멸망하였다.
닫기
와 내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주 032
번역주 032)
蠕蠕 : 북적의 일종으로 柔然이라고도 불린다. 4세기 후엽에서 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북방 지역에 존재한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이다. 남조의 宋·齊·梁 등과 연결하여 북위에 대항하고 협공도 시도하였다(盧泰敦, 1984).
닫기
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면서 왕의 영토를 침범하고자 모의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주 033
번역주 033)
唐堯 : 중국의 전설상 성인인 요임금을 가리킨다. 요의 號가 陶唐이기 때문에 唐堯라 칭하였다.
닫기
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주 034
번역주 034)
丹水 : 중국 산동성에 있는 하천의 이름으로 丹河·丹淵·丹江이라고도 한다. 요임금이 묘족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았던 장소로 유명하며, 舜이 요의 아들 丹朱를 봉했던 곳이기도 하다.
닫기
에서 [묘족을] 징벌하였고, 맹상군주 035
번역주 035)
孟嘗君 : 중국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성은 田, 이름은 文이다. 薛 땅을 봉토로 받아 맹상군이 되었다. 전국시대 말기 4君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현자로 정평이 났다. 본 기사는 일찍이 맹상군이 趙나라에 들렀을 때 조나라 사람이 그를 비웃자 노하여 그를 따르는 식객으로 동행했던 사람들과 함께 수백 명을 격살하여 1縣을 멸하였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닫기
은 어진 사람으로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약 [고구려를] 취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 번역주 001)
    餘慶 : 백제 21대 개로왕으로, 재위 기간은 455~475년이다. 毗有王의 長子로서 『삼국사기』 본문에는 ‘慶司’라는 이름으로, 細注에는 ‘近蓋婁’라는 별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近蓋鹵’로, 『일본서기』 雄略紀 5年條에는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로 기술되어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2)
    표문 : 개로왕 18년(472) 백제가 북위에 보낸 표문과 478년 왜왕 무(武)가 남송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 나오는 어구와 동일한 표현이 648년에 편찬된 『진서』에서 다수(136개) 확인되는 것에 착안하여 표문의 原典과 표문의 찬자에 대해 고찰한 연구가 있다. 진대부터 남북조시대에는 사학이 융성해서 적어도 5세기 중반까지는 『진서』의 원본 같은 것이 이미 완성·유포되어 있었거나, 후에 『진서』를 구성하게 된 복수의 진대에 관한 사서류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백제의 상표문과 왜의 상표문이 『진서』의 원본의 용어를 주된 전거로 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상표문은 동일인이 기초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한자만이 아니라 漢籍에도 밝고 예민한 정치감각과 국제감각을 갖췄을 중국계 망명인 내지 유학승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며, 472년 북위의 상표문을 기초했던 이 백제의 관인은 475년 한성 함락 후 왜국으로 망명해서 왜왕 무에게 등용되어 왜의 상표문을 기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內田淸, 1996). 바로가기
  • 번역주 003)
    『위서』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5 百濟本紀3 개로왕 18년조에 실려 있다. 북위에 표문을 보내기 전까지 백제는 동진, 송나라 등 남조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472년 갑자기 북위와 교섭을 하고 있어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 471년을 끝으로 송과의 관계가 한동안 중단된 것이 백제가 북위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466년 북위 顯祖의 후궁을 맞이하는 문제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고구려에게 현조의 후궁을 요구했으나, 북위와 통혼을 했던 북량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구려는 북위가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올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는데(노태돈, 2005), 백제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실력자인 문명태후가 장수왕에게 주살당한 풍홍(馮弘)의 손녀이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판단한 백제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徐榮敎, 2004)도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혼사 문제로 틈이 벌어지고, 송과의 교섭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감하게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원병을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가 북위와 교섭을 한 목적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고, 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는 내용은 왜왕 무(武)가 478년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도 보인다(『송서』 97 왜국조). 따라서 『위서』에 수록된 표문과 조서의 내용은 백제와 고구려가 북조와 남조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는 점, 고구려가 동아시아 정세에서 다자간 세력균형의 한 축이었다는 점, 또 실제로 북위가 조서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점, 북위 사신의 조서가 백제에 도달하지 못한 점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豺狼 : 원래의 의미는 승냥이와 이리를 말하나, 여기에서는 고구려를 비하해서 쓴 표현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奉藩 : 藩國으로서 받들다. 번국은 왕실의 藩屛, 즉 울타리가 되는 나라라는 의미로 제후국을 지칭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雲闕 : 구름처럼 우뚝 솟은 천자의 궁궐을 비유한 말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冠軍將軍 : 이에 대해서는 『송서』 각주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8)
    駙馬都尉 : 임금의 사위에게 준 칭호이다. 부마도위는 원래 천자가 타는 副車에 딸린 말, 즉 駙馬를 맡은 벼슬에 불과했다. 위진 이후 공주의 남편 되는 사람에 한해서 이 벼슬을 주면서 임금의 사위를 부마라고 부르게 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弗斯侯 : 불사후는 동성왕이 永明 8年(490, 동성왕 12년)에 남제에 국서를 보내 신하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작호를 제수해주기를 요청하는 기사에도 나온다. ‘弗斯’라는 지명의 위치에 대해서는 『남제서』 각주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0)
    餘禮 : 부마도위이므로 백제왕의 사위이지만 백제의 왕성이 餘氏이기 때문에 왕족으로 보기도 한다.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중앙 관직은 막부의 막료인 長史인데, 사위가 사신으로 파견된 점이 주목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龍驤將軍 : 중국 晉나라 武帝가 王浚을 용양장군에 처음 임명하였으며 3품에 해당하였다. 남조에서는 假官으로 散官의 성격을 가졌다. 北朝에서도 용양장군을 두었는데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임명되었다. 北魏와 北齊에서는 종3품에 해당하였다(俞鹿年, 1992).바로가기
  • 번역주 012)
    帶方太守 : 이에 대해서는 『남제서』 각주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13)
    張茂 : 황해도 鳳山郡 松山里에서 대방군 태수인 張武夷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송서』 백제전에는 구아신왕 5년 송나라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張威가 보이기 때문에 대방 지역에 연고를 가진 인물 또는 대방 출신으로 추정된다. 장씨는 백제에 흡수된 후 대중국 외교 업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윤용구, 2007).바로가기
  • 번역주 014)
    神祇 : ‘天神地祇’의 줄임말. 바로가기
  • 번역주 015)
    旦聞石沒 : 『논어』 里仁篇에 있는 공자의 말 “朝聞道 夕死可矣”에서 따온 표현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중국계 사서에서 백제 왕족 부여기원설이 전승되는 시발점이 되는 기사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주서』 및 『신당서』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백제의 원류가 부여계와 직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현혜, 1991). 이와 함께 성왕의 아들 餘昌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 전 “성은 [고구려 왕실과] 같다.”고 한 기사에 대해서도 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계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의식의 소산이라고 보아왔다(노중국, 1997). 부여출자설이 강조되는 시기는 고구려와 외교·군사적인 대결을 치열하게 전개한 시기였다(朴燦圭, 2003)는 지적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7)
    釗 : 고구려 제16대 왕인 고국원왕으로, 재위 기간은 341~371년이다. 미천왕의 아들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또 다른 이름인 斯由로 전하고 있다. 요동 지역을 놓고 팽창하는 전연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 국내성이 함락당하기도 했으며, 371년 백제와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8)
    須 :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으로, 재위 기간은 375~384년이다. 근초고왕의 아들로 『일본서기』 권9 신공기 섭정 49년조와 56년 조에는 왕자 貴須, 권9 흠명기 2년조에는 貴首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七支刀 명문의 “百濟王世□ 奇生聖音”의 奇 또는 奇生을 근구수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6). 근초고왕 26년(371) 태자로서 왕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9)
    梟斬釗首 :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6년(371)조에는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원왕을 효수하였다는 표현은 이 사실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馮氏數終 : 풍씨란 북연의 馮弘을 말한다. 북연은 2세 28년간(409~436) 존속한 왕조로, 후연의 장군 馮拔이 건국하였다. 풍발은 처음 후연의 慕容熙를 제거하고 고구려계 慕容雲(高雲)을 추대하였으나 그가 시해되자 409년 昌黎를 근거로 스스로 天王에 즉위하여 북연을 세웠다. 430년 풍발의 동생인 풍홍이 뒤를 이어 왕에 즉위하였으나 山西省 방면에서 진출한 북위에 고전을 하다가 수도인 龍城(현재의 요령성 조양)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1)
    餘燼奔竄 : 436년 5월 북위의 太武帝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포위하자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이 葛盧孟光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주어 몸만 겨우 구출되었다. 그러나 풍홍은 고구려가 자신을 臣屬人으로 취급하는 것에 반발하여 송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자 북연의 재기를 바라지 않던 고구려 장수왕은 신속하게 풍홍을 제거하였다. 혼란의 와중에 많은 북연인들이 고구려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황을 표현한 문구이다. 북연인의 일부는 송으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백제에도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醜類漸盛 : 추악한 무리에 대해 북연 계통의 군사들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뒤 문장과의 연결 관계로 볼 때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가 풍홍이 망명한 후 점차 번성해졌다고 함으로써 북위의 적개심을 부추기려는 백제의 선동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이병도, 1977). 바로가기
  • 번역주 023)
    북연의 풍홍이 망명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화되자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추진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던 남진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재개는 백제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여 비유왕이 왜·신라·송과의 외교를 추진하는 한편 북위와 교섭을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 나오는 “構怨連禍 三十餘年”과 뒤에 나오는 “去庚辰年後”의 경진년이 440년 (비유왕 14)에 해당하기 때문에 두 기사를 근거로 경진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북위가 백제에 사신을 보냈고, 그에 앞서 백제가 북위에 먼저 사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438년 북연의 멸망으로 화북 지역에서의 정세가 급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진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고, 고구려는 북위가 백제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440년부터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낸 472년까지 30여 년이 되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원한 관계가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보았다(노중국, 2005).바로가기
  • 번역주 024)
    璉 : 고구려 20대 長壽王으로, 413~491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오랫동안 재위하였기 때문에 ‘장수’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직접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5)
    장수왕이 평양 천도 후 왕권에 저항하는 유력 귀족들을 숙청한 것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6)
    馮族 :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왕 풍홍을 따라온 집단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鳥畜之戀 : ‘집에서 기르는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북연의 군사들이 주인 격이 되는 북위에 대한 연모의 정이 있는 것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8)
    首丘之心 : 『예기』 권7 檀弓 上에 나오는 “狐死正丘首仁也”에서 유래한 말로, ‘여우는 죽을 때에 본래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의미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9)
    有征無戰 : 征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無道함을 공격하여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구려를 치는 것은 죄 있는 무리를 쳐서 바로잡는 ‘征伐’만 있는 것이지, 국가와 국가 사이에 무력으로 벌어지는 전쟁은 아니라고 표현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晉書·樂志下』 “言宣帝致討吳方, 有征無戰也.” 『隋書·李密傳』 “明公親簡精銳, 西襲長安, 百姓孰不郊迎, 必當有征無戰.” 『北史·尉遲迥傳』 “唯迥以爲紀旣盡銳東下, 蜀必空虛, 王師臨之, 必有征無戰.”바로가기
  • 번역주 030)
    隗囂 : 중국 後漢 시기의 인물로, 자는 季孟이다. 반역을 잘하는 사람을 뜻한다. 외효는 왕망이 세운 신(新) 말에 劉玄을 섬기다가 배신하여 光武帝를 받들었고, 다시 배반하여 公孫述을 섬기다가 광무제의 정벌을 받고 서역으로 도망가 죽었다. 이 때문에 배반을 잘하는 인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31)
    劉氏 : 동진의 권신인 劉裕가 420년 건국한 송나라 황실의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남북조 시기 송나라를 의미한다. 존속 기간은 420~479년으로 趙匡胤이 세운 송(960~1279)과 구별하여 劉宋이라 부르기도 한다. 建康(현재의 중국 강소성 남경)에 도읍하였으며, 북중국을 점차 통일하면서 등장한 北朝의 北魏에게 밀리면서 급격히 쇠퇴하고, 8대 順帝 劉準 때에 이르러 권신인 蕭道成에게 찬탈당하여 8대 59년만인 479년에 멸망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32)
    蠕蠕 : 북적의 일종으로 柔然이라고도 불린다. 4세기 후엽에서 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북방 지역에 존재한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이다. 남조의 宋·齊·梁 등과 연결하여 북위에 대항하고 협공도 시도하였다(盧泰敦, 1984).바로가기
  • 번역주 033)
    唐堯 : 중국의 전설상 성인인 요임금을 가리킨다. 요의 號가 陶唐이기 때문에 唐堯라 칭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4)
    丹水 : 중국 산동성에 있는 하천의 이름으로 丹河·丹淵·丹江이라고도 한다. 요임금이 묘족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았던 장소로 유명하며, 舜이 요의 아들 丹朱를 봉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가기
  • 번역주 035)
    孟嘗君 : 중국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성은 田, 이름은 文이다. 薛 땅을 봉토로 받아 맹상군이 되었다. 전국시대 말기 4君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현자로 정평이 났다. 본 기사는 일찍이 맹상군이 趙나라에 들렀을 때 조나라 사람이 그를 비웃자 노하여 그를 따르는 식객으로 동행했던 사람들과 함께 수백 명을 격살하여 1縣을 멸하였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백제왕 여경(餘慶)이 올린 표문(表文) 자료번호 : jd.k_0010_010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