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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국 사신이 지체되지 않게 하라는 황제의 비답(批答)

  • 날짜
    1076년 10월 (음)(熙寧 9年(1076) 10月 丙申)
  • 출전
    卷278, 熙寧 9年(1076) 10月 丙申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주 001
각주 001)
宣徽南院使 : 북송의 관직. 宣徽院은 唐代 후기에 이미 南院과 北院으로 나뉘어 정무를 처리했는데, 北院보다는 南院의 위상이 더 높았다. 宣徽南院使는 북송 초기에 설치되었다가 元豐 6年(1083)에 폐지되었다. 이후 元祐 3年(1088)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紹聖 3年(1096)에 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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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응천부(判應天府) 장방평(張方平)주 002
각주 002)
張方平 : 1007~1091. 북송의 관인. 북송 應天府 宋城(현재 河南省 商丘 서남쪽) 사람으로 字는 安道이다. 景祐 元年(1034)에 인재 선발에 천거되어 校書郎, 知昆山縣이 되었다. 寶元 元年(1038)에는 賢良方正으로 천거되어 著作佐郎, 通判睦州가 되었다. 慶曆 元年(1041)에 오랑캐를 평정하는 열 가지 계책을 상소했고, 서하와 강화를 맺어 거란(요)과 서하의 갈등을 이용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신종이 즉위했을 때 관직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왕안석의 新法을 강력히 반대했고, 힘써 外任을 요청하여 宣徽南院使, 判應天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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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하기를, “고려 사신이 궐에 나아갈 때의 의례 제도에서는 지나는 경(京), 부(府), 주(州), 군(軍)에서 지주(知州)와 통판(通判)이 예에 따라 성을 나와 맞이합니다. 삼가 보건대 거란의 사신이 북경(北京)을 지날 때는 단지 통판이 소윤(少尹)을 대신하여 나와 맞이합니다. 고려는 외번(外蕃)이니 그 사신은 배신(陪臣)인데, 선휘사(宣徽使)의 품급은 이부(二府)와 같으니 성을 나와서 맞이하는 것은 그 예법이 도리어 거란보다도 중합니다. 이는 국체를 존숭하여 위엄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단지 통판으로 하여금 맞이하고 만약에 사신이 와서 만나면 곧바로 돌아와 알리게 하였으며 양주(揚州)주 003
각주 003)
揚州 : 북송의 지명. 수 開皇 9年(589)에 吳州를 고쳐 설치했다. 治所는 江都縣(현재 江蘇省 揚州市)에 있었다. 오대 시기 吳의 도읍이 이곳에 있었고, 江都府로 명칭을 바꾸었고, 後周가 이름을 揚州로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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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에 따르라고 하였다.

  • 각주 001)
    宣徽南院使 : 북송의 관직. 宣徽院은 唐代 후기에 이미 南院과 北院으로 나뉘어 정무를 처리했는데, 北院보다는 南院의 위상이 더 높았다. 宣徽南院使는 북송 초기에 설치되었다가 元豐 6年(1083)에 폐지되었다. 이후 元祐 3年(1088)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紹聖 3年(1096)에 또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張方平 : 1007~1091. 북송의 관인. 북송 應天府 宋城(현재 河南省 商丘 서남쪽) 사람으로 字는 安道이다. 景祐 元年(1034)에 인재 선발에 천거되어 校書郎, 知昆山縣이 되었다. 寶元 元年(1038)에는 賢良方正으로 천거되어 著作佐郎, 通判睦州가 되었다. 慶曆 元年(1041)에 오랑캐를 평정하는 열 가지 계책을 상소했고, 서하와 강화를 맺어 거란(요)과 서하의 갈등을 이용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신종이 즉위했을 때 관직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왕안석의 新法을 강력히 반대했고, 힘써 外任을 요청하여 宣徽南院使, 判應天府가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揚州 : 북송의 지명. 수 開皇 9年(589)에 吳州를 고쳐 설치했다. 治所는 江都縣(현재 江蘇省 揚州市)에 있었다. 오대 시기 吳의 도읍이 이곳에 있었고, 江都府로 명칭을 바꾸었고, 後周가 이름을 揚州로 되돌렸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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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사신이 지체되지 않게 하라는 황제의 비답(批答) 자료번호 : jt.k_0005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