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王恢)와 조파노(趙破奴)가 고사(姑師), 누란(樓蘭)을 격파함
박망후가 외국과의 교통로를 열어서 존귀하게 대우받으니, [그를] 수행했던 이졸(吏卒)들이 그 후 모두 다투어 글을 올려 외국의 기이한 물자와 이해득실을 말하며 사신이 되기를 청하였다. 천자는 그곳이 지극히 멀고 사람들이 즐겨 가려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고 [사신의] 절(節)을 주어, 관리와 백성의 출신 [배경]을 묻지도 않고 모집하여, 사람들을 갖추어 붙여 주고 파견하여 그 교통로를 넓히도록 하였다. 그들이 돌아올 때 재물을 노략당하거나 사신들이 [천자의] 지시를 못 지키는 경우가 없을 수 없으니, 천자께서는 그들이 그런 일을 [자주 해서] 익숙해 있다고 하여 번번히 조사시키고 중죄에 처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속죄를 위해 다시 사신으로 가기를 청하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사신이 되고자 청하는 방도는 무궁무진하고 법을 어기는 것을 가벼이 여겼다. 그 이졸들도 자주 외국의 물품들을 거듭해서 열심히 추천하였는데,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절(節)을 주고 소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의 부관으로 삼으니, 이런 연유로 헛된 말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무리들이 모두 다투어 그것을 본받았던 것이다. 그 사신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의 아들주 001이어서 관부(縣官)에서 보낸 재물을 개인의 것으로 하여주 002[그것을] 외국에서주 003싼 가격으로 팔아 그 이익을 [자기가] 취하려고 하였다. 외국도 역시 한나라 사신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마다 가볍고 무거움에 [차이가 많고],주 004
한나라 병사들은 너무 멀어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들의 식량[지급]을 끊어 버려서 한나라 사신들을 괴롭게 하였다. 한나라 사신들은 핍절(乏絶)하게 되고 원망이 쌓여 마침내 [사신들끼리] 서로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누란(樓蘭)과 고사(姑師)는 작은 나라에 불과하나 교통로[空道]주 005에 위치해 있어 한나라 사신 왕회(王恢)
주 006등을 공격하고 겁략함이 특히 심했다. 또한 흉노의 급습부대[奇兵]가 자주 서방의 나라로 가는 사신들의 길을 막고 공격하였다. 사신들은 외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에 대해서 두루 말하면서, 모두 다 성읍은 갖고 있으나 군대가 약하여 공격하기 수월하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천자는 종표후(從驃侯)
파노(破奴)
주 007
각주 007)
로 하여금 속국(屬國)주 008의 기병과 군병(郡兵) 수만 명을 지휘케 하여 파견했는데, 그는 흉하수(匈河水)
주 009에 이르러 오랑캐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오랑캐는 모두 가 버렸다. 그 다음해 고사를 공격하였는데, 파노와 경기병 700여 명이 먼저 도착하여 누란왕을 포로로 잡고 마침내 고사를 격파하였다. 이어서 군대의 위세로써 오손과 대완 등의 나라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귀환하자 파노는 착야후(浞野侯)에 봉해졌다.주 010
왕회는 여러 번 사신으로 갔다가 누란에게 고통을 받았고, 이를 천자에게 아뢰자 천자는 군대를 보내고 왕회에게 파노를 보좌하여 그들을 격파하도록 하였다. 왕회는 호후(浩侯)에 봉해졌다.주 011이때에 이르러 주천(酒泉)의 정장(亭鄣)주 012이 옥문(玉門)
주 013까지 연결되게 되었다.破奴 : 趙破奴를 지칭. 『漢書』 卷55에 그의 간략한 열전이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太原人으로 일찍이 匈奴에 망명했다가 돌아와서 驃騎將軍의 司馬가 되어 북방에 출전, 공을 세워 從驃侯에 봉해졌으나 기원전 112년 봉작을 상실했다. 1년 뒤 匈河將軍에 임명되어 匈河水까지 진출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에는 樓蘭王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았고 그 공으로 浞野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103년 그는 浚稽將軍의 직함을 갖고 2만 명의 기병을 지휘하여 匈奴의 左賢王을 공격했으나, 左賢王은 8만 명의 병력으로 그를 포위하는 바람에 趙破奴는 포로가 되고 군대는 전멸했다. 그는 흉노에 10년 동안 살다가 흉노의 太子 安國과 함께 한나라로 도망쳤는데, 기원전 91년 巫蠱의 혐의를 받아 一族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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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破奴 : 趙破奴를 지칭. 『漢書』 卷55에 그의 간략한 열전이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太原人으로 일찍이 匈奴에 망명했다가 돌아와서 驃騎將軍의 司馬가 되어 북방에 출전, 공을 세워 從驃侯에 봉해졌으나 기원전 112년 봉작을 상실했다. 1년 뒤 匈河將軍에 임명되어 匈河水까지 진출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에는 樓蘭王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았고 그 공으로 浞野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103년 그는 浚稽將軍의 직함을 갖고 2만 명의 기병을 지휘하여 匈奴의 左賢王을 공격했으나, 左賢王은 8만 명의 병력으로 그를 포위하는 바람에 趙破奴는 포로가 되고 군대는 전멸했다. 그는 흉노에 10년 동안 살다가 흉노의 太子 安國과 함께 한나라로 도망쳤는데, 기원전 91년 巫蠱의 혐의를 받아 一族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색인어
- 이름
- 박망후, 왕회(王恢), 종표후(從驃侯), 파노(破奴), 파노, 파노, 착야후(浞野侯), 왕회, 왕회, 파노, 왕회, 호후(浩侯)
- 지명
-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누란(樓蘭), 고사(姑師), 한나라, 흉하수(匈河水), 고사, 고사, 오손, 대완, 누란, 주천(酒泉), 옥문(玉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