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한나라가 장액군과 마주하고 있는 흉노의 땅 일부를 원하였으나 선우가 거절함

  • 국가
    흉노(匈奴)
오주류선우가 즉위한 뒤, 둘째 연지의 아들 낙(樂)을 좌현왕으로 삼고, 다섯째 연지의 아들 여(輿)를 우현왕으로 삼았다.주 001
각주 001)
이 두 사람(樂과 輿)은 모두 烏珠留單于의 아들이다. 둘째 연지는 위에서 말한 大閼氏를 말한다. 다섯째 연지는 呼韓邪單于의 閼氏이다.
닫기
아들 우고노왕(右股奴王) 오제아사(烏鞮牙斯)를 보내 입시하도록 하였다. 은 중랑장 하후번(夏侯藩) 주 002
각주 002)
夏侯藩 : 夏侯蕃이라고 쓰기도 한다. 魯 東平 사람이다. 名儒인 夏侯勝의 증손자이다. 전한 말 郡守와 州牧을 역임하였다. 성제때 중랑장으로 두 차례에 걸쳐 匈奴에 使行 갔다. 평제때 長樂少府의 지위에 올랐다.
닫기
과 부교위(副校尉) 한용(韓容) 주 003
각주 003)
韓容 : 字는 子伯이다. 성제때 副校尉로 임명되어 匈奴에 出使했다. 후에 光祿大夫로 遷任되었다. 哀帝 元壽 2년(전1) 執金吾가 되었다가 1개월 뒤 면관되었다.
닫기
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황제의 외삼촌인 대사마 표기장군 왕근(王根) 주 004
각주 004)
王根(?∼전2) : 전한시기의 外戚 大臣이다. 자는 稚卿이고, 東平陵 사람이다. 元帝 王皇后의 동생으로 성제가 즉위한 뒤, 關內侯의 작위를 받고 光祿勳으로 임명되었다. 河平 2년(전27) 曲陽侯로 봉해져 7천 7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元延 1년(전12) 王商을 대신하여 大司馬 驃騎將軍으로 輔政하였다. 成帝가 아들이 없자, 傅太后의 뇌물을 받고 定陶王 劉欣을 황제로 세웠는데 그가 哀帝이다. 綏和 1년(전8) 병으로 면관되었다. 그는 王莽이 자신을 공경한다는 이유로 자기 대신 大司馬로 임명했다. 개인적으로 사치하고 교만하였으며 재산이 巨萬에 달하여 크게 집을 만들고 정원의 건물이 宮中을 방불케 하였다. 그래서 哀帝의 불만을 샀다. 成帝의 服喪 기간에 掖庭의 女樂을 취하고 置酒歌舞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封國으로 돌아갔다. 元壽 2년(전2) 병으로 죽었다. 王莽이 漢을 대신한 뒤, 王根의 공을 추도하여 直道讓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닫기
이 상서의 일을 주관[領尙書事]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왕근에게 말했다. “흉노의 땅 일부가 한지(漢地) 안으로 쑥 들어와 있어 장액군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재목이 나고 큰 수리주 005
각주 005)
원문의 “就”는 노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으며 그 깃털로 화살을 만드는 큰 독수리를 말한다.
닫기
의 깃은 화살대를 만듭니다. 이곳을 차지하면 변경 지역은 매우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국가는 토지를 넓히는 실익을 얻을 것이며, 장군께서는 공을 드러내어 무궁히 전할 것입니다.” 왕근은 황제에게 그 이익을 말하였고 황제는 바로 선우에게 그 땅을 요구하려 했다. [하지만] 만일 얻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황제의] 조명(詔命)이 손상되어 그 위엄이 훼손될 수 있었다. 왕근은 곧 황제의 뜻만을 하후번에게 넌지시 알렸는데, 하후번의 입을 통하여 그 땅을 얻고자 한 것이다.
하후번이 흉노정에 이르렀다. 말 꺼낼 때를 기다려서 선우에게 말하였다. “가만히 보니 흉노[의 땅 일부가] 한지 안으로 쑥 들어가 장액군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의 세 도위(都尉)가 그곳의 변새 위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사졸 수백 명이 추위에 고통받고 있으며 경계 임무를 서느라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선우께서는 응당 글을 올려 그 땅을 [에] 헌납하겠다고 하고, [그곳을] 곧게 잘라내어 막으면, [으로서는] 두 명의 도위와 사졸 수백 명을 철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로써 천자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의] 보상은 반드시 클 것입니다.” 선우가 말했다. “이는 천자의 조령(詔令)인가, 사자의 요구에서 나온 것인가?” 하후번이 말했다. “조령의 지시입니다. 하지만 하후번 저 역시 선우를 위하여 좋은 계획을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선우는 말했다. “효선황제효원황제는 부친 호한야선우를 가련히 여겨 장성 이북 땅을 흉노가 갖도록 하였다. 이곳은 온우도왕(溫偶駼王)주 006
각주 006)
溫偶駼王 : 匈奴의 제후왕이다. 長城 이북에 거주하였다. 溫偶駼는 후세의 옹구트(Ongut, 汪古惕)로 추정되기도 한다.
닫기
이 살던 땅인데, 그 지역의 생긴 모양과 물산을 잘 알지 못한다. 청컨대 사신을 파견하여 묻고자 한다.” 하후번한용으로 돌아왔다. 뒤에 다시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도착한 뒤 곧 땅을 요구하였다. 선우가 말했다. “부형이 5대에 걸쳐 전해 왔으나 은 그 땅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 낭지아사 때 와서 유독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온우도왕에게 물었더니, “흉노의 서쪽 제후주 007
각주 007)
원문에는 匈奴의 “諸侯”라고 하였는데, 顔師古에 따르면, 匈奴의 小王을 諸侯라 칭한 것으로 중국의 용어를 흉내내었다고 하였다.
닫기
들은 궁려(穹廬)주 008
각주 008)
穹廬 : 유목민들의 이동식 거주시설이다. 유목민들은 목재 기둥과 서까래 등의 골조를 펠트로 둘러싸고 난 다음 그 위에 면포나 가죽을 덮는 조립식의 이동용 천막(yurt 또는 ger)에 살았다. 匈奴시대에는 이런 조립식 천막을 수레 위에 설치한 穹廬에 거주하면서 땅 위에 직접 살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보통 벽 부분이 탄력성이 좋고 유연한 버드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사와다, 2007 : 122).
닫기
와 수레를 만들 때 모두 이 산의 재목을 가지고 만들며, 뿐만 아니라 선조의 땅이기 때문에 감히 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하후번은 돌아와 태원태수(太原太守)로 천임(遷任)되었다. 선우가 사신을 보내 상서하여 하후번이 땅을 구한 정황에 대하여 물었다. 조서를 내려 선우에게 답하였다. “하후번은 제멋대로 조서를 칭하고 선우에게 땅을 구하였다. 법에 따르면 응당 죽어야 하나 두 차례의 대사면을 받았다. 지금은 하후번을 제남태수로 삼아 다시 흉노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듬해(수화(綏和) 2년, 전7),주 009
각주 009)
이해에 成帝가 죽고 哀帝가 즉위하였다.
닫기
[흉노의] 시자가 사망하자 돌려보내 장사치르도록 하였다. [선우는] 다시 아들 좌어도구탄왕(左於駼仇撣王) 계류곤(稽留昆) 주 010
각주 010)
稽留昆 : 烏珠留單于의 아들이다. 成帝 綏和원년(전8) 烏珠留單于가 즉위한 뒤, 左於駼仇撣王이 되었다. 이듬해 한에 들어와 侍子가 되었다. 哀帝 元壽 2년(전1) 烏珠留單于가 漢에 入朝하고 돌아갈 때, 함께 匈奴로 갔다.
닫기
을 보내 입조하여 시봉(侍奉)하게 하였다.

  • 각주 001)
    이 두 사람(樂과 輿)은 모두 烏珠留單于의 아들이다. 둘째 연지는 위에서 말한 大閼氏를 말한다. 다섯째 연지는 呼韓邪單于의 閼氏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夏侯藩 : 夏侯蕃이라고 쓰기도 한다. 魯 東平 사람이다. 名儒인 夏侯勝의 증손자이다. 전한 말 郡守와 州牧을 역임하였다. 성제때 중랑장으로 두 차례에 걸쳐 匈奴에 使行 갔다. 평제때 長樂少府의 지위에 올랐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韓容 : 字는 子伯이다. 성제때 副校尉로 임명되어 匈奴에 出使했다. 후에 光祿大夫로 遷任되었다. 哀帝 元壽 2년(전1) 執金吾가 되었다가 1개월 뒤 면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王根(?∼전2) : 전한시기의 外戚 大臣이다. 자는 稚卿이고, 東平陵 사람이다. 元帝 王皇后의 동생으로 성제가 즉위한 뒤, 關內侯의 작위를 받고 光祿勳으로 임명되었다. 河平 2년(전27) 曲陽侯로 봉해져 7천 7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元延 1년(전12) 王商을 대신하여 大司馬 驃騎將軍으로 輔政하였다. 成帝가 아들이 없자, 傅太后의 뇌물을 받고 定陶王 劉欣을 황제로 세웠는데 그가 哀帝이다. 綏和 1년(전8) 병으로 면관되었다. 그는 王莽이 자신을 공경한다는 이유로 자기 대신 大司馬로 임명했다. 개인적으로 사치하고 교만하였으며 재산이 巨萬에 달하여 크게 집을 만들고 정원의 건물이 宮中을 방불케 하였다. 그래서 哀帝의 불만을 샀다. 成帝의 服喪 기간에 掖庭의 女樂을 취하고 置酒歌舞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封國으로 돌아갔다. 元壽 2년(전2) 병으로 죽었다. 王莽이 漢을 대신한 뒤, 王根의 공을 추도하여 直道讓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원문의 “就”는 노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으며 그 깃털로 화살을 만드는 큰 독수리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溫偶駼王 : 匈奴의 제후왕이다. 長城 이북에 거주하였다. 溫偶駼는 후세의 옹구트(Ongut, 汪古惕)로 추정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원문에는 匈奴의 “諸侯”라고 하였는데, 顔師古에 따르면, 匈奴의 小王을 諸侯라 칭한 것으로 중국의 용어를 흉내내었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穹廬 : 유목민들의 이동식 거주시설이다. 유목민들은 목재 기둥과 서까래 등의 골조를 펠트로 둘러싸고 난 다음 그 위에 면포나 가죽을 덮는 조립식의 이동용 천막(yurt 또는 ger)에 살았다. 匈奴시대에는 이런 조립식 천막을 수레 위에 설치한 穹廬에 거주하면서 땅 위에 직접 살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보통 벽 부분이 탄력성이 좋고 유연한 버드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사와다, 2007 : 122).
     바로가기
  • 각주 009)
    이해에 成帝가 죽고 哀帝가 즉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0)
    稽留昆 : 烏珠留單于의 아들이다. 成帝 綏和원년(전8) 烏珠留單于가 즉위한 뒤, 左於駼仇撣王이 되었다. 이듬해 한에 들어와 侍子가 되었다. 哀帝 元壽 2년(전1) 烏珠留單于가 漢에 入朝하고 돌아갈 때, 함께 匈奴로 갔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오주류선우, 낙(樂), 여(輿), 오제아사(烏鞮牙斯), 하후번(夏侯藩), 한용(韓容), 왕근(王根), 왕근, 왕근, 왕근, 하후번, 하후번, 하후번, 하후번, 하후번, 효선황제, 효원황제, 호한야선우, 하후번, 한용, 낭지아사, 하후번, 하후번, 하후번, 하후번, 계류곤(稽留昆)
지명
, 장액군, 장액군, , , , , , ,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한나라가 장액군과 마주하고 있는 흉노의 땅 일부를 원하였으나 선우가 거절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