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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질지선우가 강거와 맹약을 맺었으나 강거에 이르러 죽임을 당함

  • 국가
    흉노(匈奴)
질지는 [의] 사자 [곡길]를 살해한 뒤 스스로 을 등졌음을 알았으며, 또한 호한야가 더욱 강해졌음을 듣고 습격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멀리 떠나려 하였다. 마침 강거(康居)주 001
각주 001)
康居 :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강 하류 지역에 있었던 투르크계 유목민의 국가이다. 漢代 張騫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이래 西晉 시대까지 역대 正史의 「西域傳」에 등장한다. 烏孫과 大宛, 大月氏 등에 인접하였고, 匈奴의 漠北交易과 타림분지, 아랄해, 카스피해 등 각 지방을 연결하는 상업로의 교착점이었다. 기원전 1세기 말 전성기에는 인구가 60만 명, 군사가 12만 명에 달했으나, 기원후 1세기 중엽 貴霜제국이 大月氏를 통일한 뒤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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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왕이 여러 차례 오손 때문에 곤경에 처하자 여러 흡후(翕侯)주 002
각주 002)
翕侯 : 月氏 내의 수령으로 보인다. 月氏는 大夏, 즉 박트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뒤 그 땅을 다섯 명의 수령들 내지는 翕侯(Yabghu)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그루세, 1998 : 77).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된 것이라고 하며, 대체로 葉護(yabghu)를 옮긴 말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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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계책을 논의하였다. “흉노는 큰 나라이며 오손은 원래 그에 복속했었다. 지금 질지선우가 [나라] 밖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맞이하여 [강거의] 동쪽 변경에 두고, 군대를 합쳐 오손을 취하여 질지를 세우도록 하면, 오랫동안 흉노를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곧 사신으로 하여금 견곤에 가서 질지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질지는 평소 [호한야에 대하여] 두려워하였고 또한 오손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강거의 계책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내 [강거 사신과] 서로 [맹약을] 맺고 군대를 이끌어 서쪽으로 향하였다. 강거 또한 귀인(貴人)을 보내 낙타와 나귀, 말 수천 필을 거느리고 질지를 맞이하였다. 질지의 사람들은 추위로 상해를 입고 길에서 죽었고, 겨우 3천 명이 남아 강거에 도착하였다.
그 뒤 도호(都護)주 003
각주 003)
都護 : 漢 宣帝代 설치되었던 西域都護를 말하며 西域의 각국을 통할하는 관직이다. 처음에는 加官이었으나 후에 정식의 관직이 되었으며 秩 二千石이다(혹자는 比二千石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都護는 鄭吉이었고 都護府는 烏壘城(현재 新疆 위구르자치구 輪臺의 동쪽)에 있었다. 都護의 속관으로 副校尉․丞 각 1인, 司馬․候․千人 각 2인이 있었으며 여러 屯田校尉와 戊己校尉를 관할하였다. 王莽 때 파기되었다가 후한 때 다시 설치된다. 都護는 서역 諸國의 인민에 대한 개별적 지배보다는 諸國 상호간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諸國을 西域 이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김한규, 1982 :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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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연수(甘延壽) 주 004
각주 004)
甘延壽 : 字는 君況이며 北地郡 郁郅縣 사람이다. 良家子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羽林에 선발되고, 이후 郞官으로 期門이 되었다. 材力이 뛰어나 皇帝의 총애를 받았다. 遼東太守였다가 免官되었고 그 후 車騎將軍 許嘉의 추천을 받아 郞中 諫大夫가 되었고 그 뒤 西域都護 騎都尉가 되었다. 副校尉 陳湯과 함께 匈奴를 토벌하고 郅支單于를 참수했다. 그 공로로 義成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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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부도호 진탕(陳湯) 주 005
각주 005)
陳湯 : 字는 子公이며 山陽郡 瑕丘縣 사람이다. 어려서 책을 좋아하여 박식하고 글을 잘 지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린 나이에 장안으로 가서 관직을 구하였다. 이때 富平侯 張勃과 친교를 맺었는데, 元帝 初元 2년에 張勃은 陳湯을 茂才로 추천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喪禮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下獄되었다. 그 후에 다시 郞官으로 천거되었다. 여러 차례 使行을 갔으며, 西域副校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匈奴 郅支單于가 烏孫과 大宛國 등을 침공하여 서역을 위협하자, 陳湯은 建昭 3년(전36) 西域都護 甘延壽와 함께 屯田 吏士와 西域 諸國의 군사를 이끌고 匈奴를 공격하여 郅支의 근거지를 부수고 질지를 참수했다. 또한 匈奴의 귀족 2천 여 명과 전리품을 얻어 귀환했다. 元帝는 이들에게 큰 상을 내리려 했으나 中書令 石顯 등은 군대를 마음대로 일으킨 죄를 들어 포상을 반대했다. 오랜 논의 끝에 劉向의 건의에 따라 關內侯로 봉하고, 300호의 식읍을 사여했다. 이후 射聲校尉로 천임되었다. 成帝가 즉위한 뒤, 승상 匡衡은 그가 康居의 재물을 도둑질했다고 탄핵하였으며 그 결과 免官된다. 그 후에는 거짓 上書 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奪爵되어 士伍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建始 4년(전29) 西域都護 段會宗이 烏孫의 포위를 당하자, 陳湯은 王鳳의 추천을 받아 從事中郞이 되었다. 永始 연간(전16∼전13)에는 輔政大臣 王商의 미움을 사 不道의 죄로 敦煌으로 遷徙되었다. 成帝末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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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군대를 내어 강거에 와서 질지를 토벌하고 베었다. [『한서』] 「감연수전」과 「진탕전」주 006
각주 006)
『漢書』 권70에 甘延壽와 陳湯의 列傳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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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야기가 있다.

  • 각주 001)
    康居 : 중앙아시아 시르다리야강 하류 지역에 있었던 투르크계 유목민의 국가이다. 漢代 張騫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이래 西晉 시대까지 역대 正史의 「西域傳」에 등장한다. 烏孫과 大宛, 大月氏 등에 인접하였고, 匈奴의 漠北交易과 타림분지, 아랄해, 카스피해 등 각 지방을 연결하는 상업로의 교착점이었다. 기원전 1세기 말 전성기에는 인구가 60만 명, 군사가 12만 명에 달했으나, 기원후 1세기 중엽 貴霜제국이 大月氏를 통일한 뒤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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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翕侯 : 月氏 내의 수령으로 보인다. 月氏는 大夏, 즉 박트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뒤 그 땅을 다섯 명의 수령들 내지는 翕侯(Yabghu)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그루세, 1998 : 77).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된 것이라고 하며, 대체로 葉護(yabghu)를 옮긴 말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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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都護 : 漢 宣帝代 설치되었던 西域都護를 말하며 西域의 각국을 통할하는 관직이다. 처음에는 加官이었으나 후에 정식의 관직이 되었으며 秩 二千石이다(혹자는 比二千石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都護는 鄭吉이었고 都護府는 烏壘城(현재 新疆 위구르자치구 輪臺의 동쪽)에 있었다. 都護의 속관으로 副校尉․丞 각 1인, 司馬․候․千人 각 2인이 있었으며 여러 屯田校尉와 戊己校尉를 관할하였다. 王莽 때 파기되었다가 후한 때 다시 설치된다. 都護는 서역 諸國의 인민에 대한 개별적 지배보다는 諸國 상호간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諸國을 西域 이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김한규, 1982 :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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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甘延壽 : 字는 君況이며 北地郡 郁郅縣 사람이다. 良家子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羽林에 선발되고, 이후 郞官으로 期門이 되었다. 材力이 뛰어나 皇帝의 총애를 받았다. 遼東太守였다가 免官되었고 그 후 車騎將軍 許嘉의 추천을 받아 郞中 諫大夫가 되었고 그 뒤 西域都護 騎都尉가 되었다. 副校尉 陳湯과 함께 匈奴를 토벌하고 郅支單于를 참수했다. 그 공로로 義成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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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陳湯 : 字는 子公이며 山陽郡 瑕丘縣 사람이다. 어려서 책을 좋아하여 박식하고 글을 잘 지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린 나이에 장안으로 가서 관직을 구하였다. 이때 富平侯 張勃과 친교를 맺었는데, 元帝 初元 2년에 張勃은 陳湯을 茂才로 추천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喪禮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下獄되었다. 그 후에 다시 郞官으로 천거되었다. 여러 차례 使行을 갔으며, 西域副校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匈奴 郅支單于가 烏孫과 大宛國 등을 침공하여 서역을 위협하자, 陳湯은 建昭 3년(전36) 西域都護 甘延壽와 함께 屯田 吏士와 西域 諸國의 군사를 이끌고 匈奴를 공격하여 郅支의 근거지를 부수고 질지를 참수했다. 또한 匈奴의 귀족 2천 여 명과 전리품을 얻어 귀환했다. 元帝는 이들에게 큰 상을 내리려 했으나 中書令 石顯 등은 군대를 마음대로 일으킨 죄를 들어 포상을 반대했다. 오랜 논의 끝에 劉向의 건의에 따라 關內侯로 봉하고, 300호의 식읍을 사여했다. 이후 射聲校尉로 천임되었다. 成帝가 즉위한 뒤, 승상 匡衡은 그가 康居의 재물을 도둑질했다고 탄핵하였으며 그 결과 免官된다. 그 후에는 거짓 上書 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奪爵되어 士伍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建始 4년(전29) 西域都護 段會宗이 烏孫의 포위를 당하자, 陳湯은 王鳳의 추천을 받아 從事中郞이 되었다. 永始 연간(전16∼전13)에는 輔政大臣 王商의 미움을 사 不道의 죄로 敦煌으로 遷徙되었다. 成帝末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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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 권70에 甘延壽와 陳湯의 列傳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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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질지, 곡길, 호한야, 질지선우, 질지, 질지, 질지, 호한야, 질지, 질지, 감연수(甘延壽), 진탕(陳湯), 질지
지명
, ,
서명
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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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지선우가 강거와 맹약을 맺었으나 강거에 이르러 죽임을 당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