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곽거병(霍去病 ), 공손오(公孫敖), 장건(張騫) 등을 출정시켜 흉노와 전투를 벌임
이듬해 봄에주 001
한나라는 표기장군(票騎將軍)주 002
[곽]거병(霍去病)
주 003
각주 003)
에게 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군에서 출정하도록 하자 [그는] 연지산(焉耆山)
주 004를 지나 천여 리 [나아가 흉노를 공격해]주 005흉노의 수급과 포로 8천여주 006인을 잡고 휴도왕(休屠王)주 007을 [격파해]주 008잡고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황금상[祭天金人]주 009을 얻었다. 그 여름주 010표기장군이 다시 합기후(合騎侯) [공손오]와 함께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 북지에서 이천 리를 나가 흉노를 쳤다. 거연(居延)
주 011을 지나 기련산(祁連山)
주 012에 [있는 흉노를]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3만 여주 013와 비소왕 이하 70여 명을 얻었다. 이때주 014흉노 역시 대군, 안문[군]으로 들어와 수백 명을 죽이고 잡아갔다. 한나라에서는 박망후(博望侯)주 015霍去病(전140~전117) : 河東 平陽 사람으로 大將軍 衛靑의 누이 衛少兒의 아들이다. 18살에 侍中이 되고 元朔 6년(전123)에 驃騎校尉가 되어 大將軍을 따라 匈奴를 격파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가 되었다. 元狩 2년(전121) 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霍去病은 萬騎를 이끌고 隴西에서 나아가 匈奴를 격파하고 여름에는 대규모로 匈奴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匈奴 토벌에 나간 일이 여섯 차례였는데, 정예부대를 이끌고 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썼다. 漢나라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衛靑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으나 그 권세는 衛靑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불과 24세에 죽자 武帝는 크게 슬퍼하여 長安 근교의 茂陵에 무덤을 지어 주었다. 일찍이 霍去病이 대승리를 거둔 祁連山의 형상을 따게 하여 그의 무공을 기렸다. 그의 무덤 앞에는 匈奴를 밟고 선 石馬가 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 : 2478~2489).
각주 015)
[장건]과 이장군 광을 시켜 우북평군주 016에서 나가 흉노 좌현왕을 공격하게 했다. 좌현왕이 이광을 포위하니, [이]광의 군대 4천 명 중에 죽은 자가 반을 넘고주 017죽이거나 잡힌 것 또한 [이쪽의 희생을] 넘어섰다. 마침 박망후의 군대가 구하러 왔기 때문에 이장군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의 군대를 모두 잃었다.주 018합기후가 표기장군과 [약속한] 날짜를 지나쳐 박망후[와 함께]주 019모두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하나 속전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博望侯 : 張騫(?~전114)을 가리킨다. 그는 武帝의 명을 받고 匈奴를 협공하기 위해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의 일리강 유역에 있던 大月氏와 동맹하려고 建元 2년(전139)경 長安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匈奴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大宛․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아 북안으로 옮긴 大月氏에 도착하였다(전129년경). 그러나 그는 大月氏가 匈奴를 칠 의사가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 다시 匈奴의 포로가 되었다가 元朔 3년(전126)에 귀국하였다. 元狩 2년(전121)에 다시 烏孫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파견한 副使들이 西域諸國의 사절과 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으로 西域의 지리, 종족, 물산 등에 관한 지식이 中國으로 유입되어 東西간의 교역과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소위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史記』 권123 「大宛列傳」 : 3157~3179 ; 『漢書』 권61 「張騫列傳」 : 2687~2698).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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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霍去病(전140~전117) : 河東 平陽 사람으로 大將軍 衛靑의 누이 衛少兒의 아들이다. 18살에 侍中이 되고 元朔 6년(전123)에 驃騎校尉가 되어 大將軍을 따라 匈奴를 격파하여 공을 세워 冠軍侯가 되었다. 元狩 2년(전121) 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霍去病은 萬騎를 이끌고 隴西에서 나아가 匈奴를 격파하고 여름에는 대규모로 匈奴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匈奴 토벌에 나간 일이 여섯 차례였는데, 정예부대를 이끌고 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썼다. 漢나라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衛靑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으나 그 권세는 衛靑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불과 24세에 죽자 武帝는 크게 슬퍼하여 長安 근교의 茂陵에 무덤을 지어 주었다. 일찍이 霍去病이 대승리를 거둔 祁連山의 형상을 따게 하여 그의 무공을 기렸다. 그의 무덤 앞에는 匈奴를 밟고 선 石馬가 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列傳」 : 2478~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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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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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望侯 : 張騫(?~전114)을 가리킨다. 그는 武帝의 명을 받고 匈奴를 협공하기 위해 지금의 新疆維吾爾自治區의 일리강 유역에 있던 大月氏와 동맹하려고 建元 2년(전139)경 長安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匈奴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大宛․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아 북안으로 옮긴 大月氏에 도착하였다(전129년경). 그러나 그는 大月氏가 匈奴를 칠 의사가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 다시 匈奴의 포로가 되었다가 元朔 3년(전126)에 귀국하였다. 元狩 2년(전121)에 다시 烏孫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파견한 副使들이 西域諸國의 사절과 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으로 西域의 지리, 종족, 물산 등에 관한 지식이 中國으로 유입되어 東西간의 교역과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소위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史記』 권123 「大宛列傳」 : 3157~3179 ; 『漢書』 권61 「張騫列傳」 : 2687~2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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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색인어
- 이름
- [곽]거병(霍去病), 공손오, 장건, 광, 이광, [이]광
- 지명
- 한나라, 농서군, 연지산(焉耆山), 농서, 북지, 거연(居延), 기련산(祁連山), 대군, 안문[군],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