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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고조가 붕어한 뒤 고후(高后)가 흉노의 공격을 그만두고 화친을 맺음

  • 국가
    흉노(匈奴)
효혜[제](孝惠帝) 주 001
각주 001)
孝惠帝(재위 전195~전188) : 이름은 劉盈으로 高祖의 長子로서 황위를 이었으나, 유약하여 母 呂太后가 실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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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후(高后) 주 002
각주 002)
高后 : 漢 高祖 劉邦의 정실부인으로 呂太后를 말한다. 성은 呂, 자는 娥姁, 이름은 雉이다. 山陽 출신으로 劉邦과 결혼한 이후 지속적으로 남편을 도와 漢나라의 건국을 가능하게 했다. 劉邦이 죽은 뒤 아들 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을 잡았다. 惠帝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惠帝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켰다. 呂氏 일족을 고위고관에 중용하여 사실상 呂氏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특히, 劉氏만을 侯王으로 책봉하라는 高祖의 遺訓을 어기고 동생 呂産, 呂祿 등을 侯王으로 책봉하였다. 이것이 劉氏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그녀가 집권한 지 8년만인 辛酉 칠월 30日 未央宮에서 죽자 곧 呂氏 일가가 모두 誅滅되었다. 이로써 呂氏 정권이 붕괴한 다음에 高祖의 차남 劉恒이 즉위하여 文帝가 되었다. 『史記』에는 “呂太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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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대에 묵특이 점차 교만해져 서신을 보냈다. 사신을 고후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독해서 설 수 없는 임금은 음습한 땅에서 태어나 드넓은 초원에 소와 말이 사는 곳에서 자랐으나 여러 번 변경에 와서 중국에서 놀기를 원했소이다. 폐하께서도 홀로 즉위하시니 고독해서 설 수 없는 과부의 신세입니다. 두 임금이 즐거움이 없고 스스로 즐길주 003
각주 003)
‘虞’는 ‘娛’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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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으니 그 가진 바로 부족함을 바꾸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고후가 크게 화를 내며 승상(丞相)과 번쾌(樊噲), 그리고 계포(季布) 등을 불러 그의 사자를 벨 것과 군대를 일으켜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번쾌가 말하였다. “신이 십만의 군대를 얻어 흉노에서 누비고 다니기를 원합니다.” 계포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해 말하였다. “번쾌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전에 진희(陳豨)대(代)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나라 군대가 32만으로 번쾌가 대장군(大將軍)이었습니다. 그때 흉노가 고조평성에서 포위하였는데, 번쾌가 그 포위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천하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평성의 아래에서 정말로 고생했구나! 이레 동안 먹지 못하니 쇠뇌를 당길 힘도 없네.’ 지금 [그] 노래도 소리주 004
각주 004)
唫은 ‘吟’의 古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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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끊기지 않았고 그때 다친 사람들도 이제 비로소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번쾌가 천하를 뒤흔들어 놓으려고 십만의 군대로 누비고 다니겠다고 망령되게 얘기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입니다. 또한 오랑캐들은 비유하면 짐승과 같아, 좋은 말을 들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나쁜 말을 들어도 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고후가 “옳다.”라고 했다. 대알자(大謁者) 장택(張澤)에게 답신을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우가 우리나라의 일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 주니 우리나라가 두려워하고 있소.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하였으나 나는 늙고 기운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이빨이 모두 빠져 걷는 것도 힘이 드오. 선우의 요청이 과분하시니, 스스로 그렇게 [즐기며] 더럽힐 수 없소. 우리나라는 잘못이 없으니 마땅히 용서해 주시오. 천자가 타는 두 대의 수레와 그에 맞는 말 여덟 필을 드리니 일상적으로 타는 수레로 쓰십시오.” 묵특이 편지를 받고서 다시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중국의 예의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여 그리하]였으니 폐하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이에 답례로 말을 바치니 마침내 화친이 이루어졌다.주 005
각주 005)
『史記』에는 이상의 편지 내용이 “高祖崩, 孝惠․呂太后時, 漢初定, 故匈奴以驕. 冒頓乃爲書遺高后, 妄言. 高后欲擊之, 諸將曰 : ‘以高帝賢武, 然尙困於平城.’ 於是高后乃止, 復與匈奴和親.”으로 정리되어 있다. 후대에 이상의 내용을 『漢書』에서 보충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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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孝惠帝(재위 전195~전188) : 이름은 劉盈으로 高祖의 長子로서 황위를 이었으나, 유약하여 母 呂太后가 실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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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高后 : 漢 高祖 劉邦의 정실부인으로 呂太后를 말한다. 성은 呂, 자는 娥姁, 이름은 雉이다. 山陽 출신으로 劉邦과 결혼한 이후 지속적으로 남편을 도와 漢나라의 건국을 가능하게 했다. 劉邦이 죽은 뒤 아들 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을 잡았다. 惠帝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惠帝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켰다. 呂氏 일족을 고위고관에 중용하여 사실상 呂氏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특히, 劉氏만을 侯王으로 책봉하라는 高祖의 遺訓을 어기고 동생 呂産, 呂祿 등을 侯王으로 책봉하였다. 이것이 劉氏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그녀가 집권한 지 8년만인 辛酉 칠월 30日 未央宮에서 죽자 곧 呂氏 일가가 모두 誅滅되었다. 이로써 呂氏 정권이 붕괴한 다음에 高祖의 차남 劉恒이 즉위하여 文帝가 되었다. 『史記』에는 “呂太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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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虞’는 ‘娛’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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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唫은 ‘吟’의 古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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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史記』에는 이상의 편지 내용이 “高祖崩, 孝惠․呂太后時, 漢初定, 故匈奴以驕. 冒頓乃爲書遺高后, 妄言. 高后欲擊之, 諸將曰 : ‘以高帝賢武, 然尙困於平城.’ 於是高后乃止, 復與匈奴和親.”으로 정리되어 있다. 후대에 이상의 내용을 『漢書』에서 보충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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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혜[제](孝惠帝), 고후(高后), 묵특, 고후, 고후, 번쾌(樊噲), 계포(季布), 번쾌, 계포, 번쾌, 진희(陳豨), 고조, 번쾌, 번쾌, 고후, 장택(張澤), 묵특
지명
대(代), 한나라, 번쾌, 평성, 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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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가 붕어한 뒤 고후(高后)가 흉노의 공격을 그만두고 화친을 맺음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