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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관구검기공비 출토지

丘儉紀功碑出土地
  • 저필자
    김지영(숙명여자대학교)
  • 날짜
    1906
  • 시대
    고구려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마선향 강구촌
  • 시대
    고구려
  • 유형
    기타
입지
집안시 판석령에서 출토
유적개관
잔존 비석의 크기는 길이 약 25.8cm, 너비 약 26.4cm이며, 비문의 서체는 예서체이다. 244년(동천왕 18) 8월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해 전쟁에 이긴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1906년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좌우와 아래가 떨어져나가 내용을 완전하게 알 수 없다. 비 제작 연대는 245년이다.
참고문헌
「文物地圖集」
해설
관구검기공비 출토지는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마선향 석묘촌에서 서쪽으로 5㎞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곳이다. 1906년 집안현 판석령에서 주민들이 도로공사 중에 부서진 비석의 일부를 발견했다. 발견된 비석 조각은 길이가 39㎝, 폭이 30㎝, 두께는 8~8.5㎝이다. 글자는 예서체로 새겼는데 남아 있는 글자는 7줄에 50자이다. 글자 간격은 약 2.7㎝이다. 현재 비석은 요녕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관구검기공비는 발견 당시에 좌우와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서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은 1행에서 ‘정시삼년고구려반(正始三年高句驪反)’, 2행의 ‘독칠아문토구려오(督七牙門討句驪五)’, 3행의 ‘부견구육년오월선(復遣寇六年五月旋)’, 4행의 ‘토구장군외오환선우(討寇將軍巍烏丸單于)’, 5행의 ‘위구장군도정후(威寇將軍都亭侯)’, 6행의 ‘행비장군령(行裨將軍領)’, 7행의 ‘비장군(裨將軍)’ 정도이다.
이 비문과 중국의 사서, 『삼국사기』 등의 내용을 통해 내용을 살펴보면, 244년(동천왕 18년) 8월에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하고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을 점령하였다. 245년에는 현토태수 왕기 등이 다시 공격했는데, 이 전쟁에서 관구검이 승리하면서 그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문에서 관구검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비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245년, 246년의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245년으로 보고 있다. 관구검에 대해서는 관구는 성, 검을 이름으로 본다. ‘毌丘’를 ‘무구’로 읽어야 한다고 하여 무구검으로 부르는 설도 제시되었다. 이와 관련해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판석령에서 가장 가까운 고구려 산성은 관마산성이다. 관구검기공비 및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관마산성을 고구려의 환도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최근 관구검기공비의 형식을 비석의 윗부분이 세모꼴인 규형비(圭形碑)로 추정하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실제 남아 있는 부분의 위쪽은 뾰족한 세모꼴인 점이나 2012년에 발견된 집안 고구려비의 형식도 규형비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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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기공비 출토지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0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