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대학 고고학자료관 소장 고구려 와전의 의의
자료관에 소장된 와전은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와전이 대부분을 차지하나 집안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키와도 2점이 확인되는데 출토지에 관한 정보가 상당히 흥미롭다. 만약 각 기와에 적힌 출토지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평양지역과 집안지역의 기와 출토 유적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하다.
우선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에는 대부분이 묵서로 ‘平壤土城’이라고 적혀 있으나 수막새 ⑥과 같이 ‘樂浪土城’이라고 주기된 것도 있다. ‘낙랑토성’이라고 적힌 수막새 ⑥은 명확한 고구려기와주 001인데, 지금까지 낙랑토성에서의 고구려기와 출토에 관한 보고는 드물고 주로 낙랑토성의 동쪽 편에서 고구려기와가 다수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 002만약 출토지에 관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고구려에 의해 낙랑이 멸망한 이후 낙랑토성이 고구려에 의해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유단식 수키와 ⑤의 경우에는 ‘평양토성’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까지는 대동강 이북에 대한 낙랑의 지배와 유적과 유구에 대한 검토가 적었다. 이 지역에도 충분히 낙랑과 관련된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료관에 소장된 ‘평양토성’이라고 묵서된 주기는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고구려기와로 알려진 명문기와에서 ‘寺’자가 확인되는 것은 두 종류가 보고되었는데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음각한 것주 003과 정릉사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양각한 것주 004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고구려에 사원이 건립되었다는 것과 사원 건축에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해 준다.주 005고구려의 최초 사원 건립에 관해서 『삼국사기』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前秦)은 승려 순도를 파견해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 등을 전했고,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동진(東晉)에서 승려 아도가 왔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 승려를 위해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주 006소수림왕 당시의 고구려 수도가 현재의 중국 집안 일대라고 본다면 이 두 절이 집안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금까지 집안지역에서 고구려의 사원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집안지역에서 출토된 불교 관련의 유물로서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弗’자명 기와의 파편주 007과 1985년에 인쇄청 빌딩 공사에서 금동불이 출토된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주 008고구려 사원 관련의 유물이 매우 적고 집안지역의 고구려 사원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현 시점에서 자료관 소장의 ‘寺’명 명문 암키와 圖1의 ②는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기와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말해 집안 지역에 고구려 사원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 기와가 가지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에는 대부분이 묵서로 ‘平壤土城’이라고 적혀 있으나 수막새 ⑥과 같이 ‘樂浪土城’이라고 주기된 것도 있다. ‘낙랑토성’이라고 적힌 수막새 ⑥은 명확한 고구려기와주 001인데, 지금까지 낙랑토성에서의 고구려기와 출토에 관한 보고는 드물고 주로 낙랑토성의 동쪽 편에서 고구려기와가 다수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 002만약 출토지에 관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고구려에 의해 낙랑이 멸망한 이후 낙랑토성이 고구려에 의해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참고자료로 제시한 유단식 수키와 ⑤의 경우에는 ‘평양토성’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까지는 대동강 이북에 대한 낙랑의 지배와 유적과 유구에 대한 검토가 적었다. 이 지역에도 충분히 낙랑과 관련된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료관에 소장된 ‘평양토성’이라고 묵서된 주기는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고구려기와로 알려진 명문기와에서 ‘寺’자가 확인되는 것은 두 종류가 보고되었는데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음각한 것주 003과 정릉사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양각한 것주 004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고구려에 사원이 건립되었다는 것과 사원 건축에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해 준다.주 005고구려의 최초 사원 건립에 관해서 『삼국사기』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前秦)은 승려 순도를 파견해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 등을 전했고,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동진(東晉)에서 승려 아도가 왔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 승려를 위해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주 006소수림왕 당시의 고구려 수도가 현재의 중국 집안 일대라고 본다면 이 두 절이 집안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금까지 집안지역에서 고구려의 사원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집안지역에서 출토된 불교 관련의 유물로서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弗’자명 기와의 파편주 007과 1985년에 인쇄청 빌딩 공사에서 금동불이 출토된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주 008고구려 사원 관련의 유물이 매우 적고 집안지역의 고구려 사원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현 시점에서 자료관 소장의 ‘寺’명 명문 암키와 圖1의 ②는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기와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말해 집안 지역에 고구려 사원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 기와가 가지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