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리(須置離가 참수된 뒤 그의 형 호란지(狐蘭支)가 무리를 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함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고 나서 건국(建國) 2년(후10), 광신공(廣新公) 훤풍(甄豐)을 우백(右伯)으로 삼았다.주 001
각주 001)
그가 서역으로 진출하려고 할 때, 거사후왕 수치리(須置離)가 이를 듣고 그 우장 고제(股鞮), 좌장 시니지(尸泥支)와 함께 모의하여 말하기를 “듣자 하니 훤공(甄公)이 서역태백(西域太伯)이 되어 [서역으로] 나서려 한다는데, 과거에는 사신들에게 소·양·곡식·꼴·건초·길안내·통역 등을 공급해 주었다. 또한 전에 오위장(五威將)주 002이 통과할 때에는 사신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충분치 못했었다. 이제 태백이 다시 나온다니 나라는 더욱 가난해질 것이고 [요구사항을] 다 이행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면서 흉노로 도망하려고 하였다. 무기교위 도호(刀護)
주 003가 이를 듣고 수치리를 불러서 심문을 하니 그가 자백하였다. 이에 그를 묶어서 도호 단흠이 있던 날루성(埒婁城)
주 004으로 보냈다. 수치리의 백성들은 그가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연도에서] 모두 통곡을 하면서 그를 보냈다. 그가 도착하자 단흠은 즉시 수치리를 참수하였다. 수치리의 형인 보국후(輔國侯)
호란지(狐蘭支)는 수치리의 무리 2천여 명을 이끌고 가축을 몰아서, 나라 전체를 들어 흉노에게 투항하였다.『漢書』 卷99中 「王莽傳」에는 甄豐과 그의 아들 甄尋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당시 [甄豐의] 아들 尋이 侍中京兆大尹 茂德侯였는데 符命을 만들어서, 新나라 皇室은 마땅히 陝을 경계로 二伯을 나누어, 豐을 右伯으로 삼고 太傅 平晏을 左伯으로 삼아서, 周公과 召公의 故事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王莽이 곧 이를 따라서 豐을 右伯으로 배수하였다. 직책에 임하여 西方으로 나가려 했는데, 그가 채 나가기도 전에 尋이 다시 符命을 만들어서 말하기를, 과거 漢室의 平帝의 皇后인 黃皇室主는 바로 [자기 자신] 尋의 妻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王莽은 詐術로 즉위를 하였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大臣들이 [자신을] 怨謗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고, 따라서 震威로서 아랫사람들을 두렵게 하려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黃皇室主는 天下의 母親인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면서, 尋을 체포하였다. 이에 尋이 사망하고 豐도 自殺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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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漢書』 卷99中 「王莽傳」에는 甄豐과 그의 아들 甄尋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당시 [甄豐의] 아들 尋이 侍中京兆大尹 茂德侯였는데 符命을 만들어서, 新나라 皇室은 마땅히 陝을 경계로 二伯을 나누어, 豐을 右伯으로 삼고 太傅 平晏을 左伯으로 삼아서, 周公과 召公의 故事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王莽이 곧 이를 따라서 豐을 右伯으로 배수하였다. 직책에 임하여 西方으로 나가려 했는데, 그가 채 나가기도 전에 尋이 다시 符命을 만들어서 말하기를, 과거 漢室의 平帝의 皇后인 黃皇室主는 바로 [자기 자신] 尋의 妻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王莽은 詐術로 즉위를 하였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大臣들이 [자신을] 怨謗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고, 따라서 震威로서 아랫사람들을 두렵게 하려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黃皇室主는 天下의 母親인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하면서, 尋을 체포하였다. 이에 尋이 사망하고 豐도 自殺하고 말았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색인어
- 이름
- 왕망, 훤풍(甄豐), 수치리(須置離), 고제(股鞮), 시니지(尸泥支), 도호(刀護), 수치리, 단흠, 수치리, 단흠, 수치리, 수치리, 보국후(輔國侯), 호란지(狐蘭支), 수치리
- 지명
- 날루성(埒婁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