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가 거사(車師)를 공격하려고 하자 천자의 명에 따라 정길(鄭吉)이 막아내고 둔전을 설치함
흉노는 거사가 한나라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보내어 거l사를 공격했는데, 정길과 사마희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맞이하니 흉노가 감히 앞으로 오지 못하였다. 정길과 사마희는 곧바로 1명의 후(候)주 001와 20명의 병졸을 남겨서 왕을 지키도록 하고, 정길은 군대를 이끌고 위리로 귀환했다. 거사왕은 흉노의 군대가 다시 오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이에 경기(輕騎)를 타고 오손으로 도망쳤고, 정길은 즉시 그 처자를 맞아들여 거리에 안치하였다.주 002사태를 아뢰기 위하여 동쪽으로 오다가 주천에 이르렀는데, 거리와 거사로 돌아가서 둔전하고 더욱 곡식을 쌓아서 서방의 나라[西國]주 003들을 안돈케 해서 흉노를 침공[할 준비를] 하라는 조칙을 받들게 되었다. 정길은 돌아와서 거사왕의 처자를 역전을 통해 장안으로 보냈고, 그들은 매우 풍부한 상사(賞賜)를 받았다. 매번 사이(四夷)들과 조회를 할 때마다 항상 그들을 눈에 띄게 존귀하게 대접해 주었다. 이에 정길은 처음으로 군관과 병졸 300명으로 하여금 거사에서 별도로 둔전을 실시케 하였다.주 004[흉노에서] 투항한 사람이 말하기를 “선우의 대신들은 모두 다 ‘거사의 땅은 비옥하고 흉노와 가까운데, 한나라가 그곳을 얻어서 많은 농사를 짓고 곡식을 쌓는다면 필시 [우리]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가 될 것이니, [그곳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다.”고 하였다. 과연 그들이 기병을 보내서 둔전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니, 정길이 이에 교위 [사마희]와 함께 거리에서 둔전하는 사졸 1,500을 모두 이끌고 [거사로] 가서 둔전을 하였다. 흉노가 다시 더 많은 기병을 보내오니, 둔전하던 한나라의 사졸들은 숫자가 적어서 당해낼 수가 없어 거사성(車師城)주 005안으로 피신하였다. 흉노의 장군이 그 성 아래로 와서 정길에게 말하기를 “선우는 필히 이 땅을 빼앗을 것이니 [너희는] 둔전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며칠간 성을 포위하다가 마침내 풀어졌다.주 006후에 늘상 수천 기가 와서 거사를 포위하곤 하였으니, 정길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거사는 거리에서 1천여 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강과 산이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흉노와 가까워서 거리에 있는 한나라 병사들은 서로 구원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원컨대 둔전하는 사졸을 더욱 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경들이 논의한 바, 길은 멀고 경비는 많이 드니 잠시주 007
거사의 둔전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조칙을 내려 장라후 [상혜]를 보내서 장액과 주천의 기병을 이끌고 거사 북쪽 천여 리 쯤 나가서, 거사의 주변 지역에 [한나라의] 무위를 선양하도록 했다.주 008오랑캐 기병들이 물러가니주 009
정길이 이에 빠져나와 거리에 돌아올 수 있었고, 대저 세 교위[三校尉]는 둔전을 실시하게 되었다.주 100
각주 100)
당시 屯田은 校尉 司馬熹의 책임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三校尉’ 가운데 하나였지만 다른 두 校尉를 통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맡았던 校尉는 후일 元帝 때에 설치된 戊己校尉의 前身인 셈이다. 그러나 三校尉의 둔전은 宣帝 때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武帝 末年에 桑弘羊은 “屯田卒을 옛날 輪臺의 以東 지역에 보내서, 校尉三人을 두어 나누어 監護케 하자”는 제의를 했고, 후에 昭帝는 이같은 건의를 받아들여 杅彌의 太子 賴丹을 ‘校尉將軍’으로 임명하여 輪臺에 둔전했다는 기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宣帝 地節年間(전69~전66)에 侍郞 鄭吉과 校尉 司馬熹를 서역에 보내서 먼저 渠犁에서 둔전하고 후에 車師에서 둔전케 하여 ‘三校尉’의 둔전을 실시했다(余太山, 2005 : 209 참조).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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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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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00)
당시 屯田은 校尉 司馬熹의 책임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三校尉’ 가운데 하나였지만 다른 두 校尉를 통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맡았던 校尉는 후일 元帝 때에 설치된 戊己校尉의 前身인 셈이다. 그러나 三校尉의 둔전은 宣帝 때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武帝 末年에 桑弘羊은 “屯田卒을 옛날 輪臺의 以東 지역에 보내서, 校尉三人을 두어 나누어 監護케 하자”는 제의를 했고, 후에 昭帝는 이같은 건의를 받아들여 杅彌의 太子 賴丹을 ‘校尉將軍’으로 임명하여 輪臺에 둔전했다는 기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宣帝 地節年間(전69~전66)에 侍郞 鄭吉과 校尉 司馬熹를 서역에 보내서 먼저 渠犁에서 둔전하고 후에 車師에서 둔전케 하여 ‘三校尉’의 둔전을 실시했다(余太山, 2005 : 209 참조).
색인어
- 이름
- 정길, 사마희, 정길, 사마희, 정길, 정길, 정길, 정길, 정길, 사마희, 정길, 정길, 장라후, 상혜, 정길
- 지명
- 거사, 한나라, 거l사, 위리, 오손, 거리, 주천, 거리, 거사, 장안, 거사, 거사, 한나라, 거리, 거사, 한나라, 거사, 거사, 거리, 거리, 한나라, 거사, 장액, 주천, 거사, 거사, 한나라,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