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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視連)이 재위한지 15년만에 죽음

  • 국가
    토욕혼(吐谷渾)
시련(視連)이 즉위하자 걸복건귀(乞伏乾歸) 주 001
각주 001)
乞伏乾歸(?~412년):16국시대 西秦 왕이다. 388~400년, 409~412년간 재위하였다. 섬서 선비족이었고 걸복국인(乞伏國仁)의 동생이다. 385년 걸복국인이 西秦을 건국한 뒤 걸복건귀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였다. 서진(西秦) 건의(建義) 4년(388)에 걸복국인이 죽자 국인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나이 어리다 하여 군신들이 걸복건귀를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大將軍·大單于·河南王)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태초(太初)로 개원하고 금성(金城)으로 천도하였다. 태초 2년(389) 전진(前秦)의 부등(苻登)이 금성왕(金城王)에 책봉하였다. 太初 7년(394)에 부등이 걸복건귀에게 후진(後秦)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였다. 西秦 更始 2년(410)에 다시 苑川으로 천도하였다가 更始 4년(412)에 乞伏乾歸는 걸복공부에게 피살당했다. 뒤에 諡號를 元王이라 하였으며 廟號는 高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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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예를 갖춰 선물을 보내니 [걸복건귀가] 시련을 백란왕(白蘭王)에 제수하였다. 시련은 어려서부터 성정이 곧고 신중한데다 의지가 강하였다. 아버지가 시름으로 죽은데다 정사에 관해 잘 몰라 7년 동안 음주나 사냥을 하지 않았다. 종악지(鍾惡地)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저 인군(人君)이란 덕으로 세상을 통어하고 위세로 백성을 다스리며, 오미(五味)주 002
각주 002)
五味:첫째, 酸, 甜, 苦, 辣, 咸 다섯 가지 맛을 말한다. 『禮記』 「禮運」, “五味六和十二食, 還相爲質也”의 鄭玄注에 “五味, 酸·苦·辛·鹹·甘也”이라 하였다. 둘째, 맛있는 음식을 총칭할 때도 사용된다. 예를 들면, 『老子』, “五味令人爽口”가 그것이다. 본문의 五味도 맛난 음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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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자기 자신을 보양하고 성색(聲色)주 003
각주 003)
聲色:歌舞와 女色을 지칭하는 것으로 『禮記』 「月令」가 “仲夏之月 止聲色, 毋或進”, 孔穎達疏에 “止聲色者, 歌樂華麗之事, 爲助陰靜, 故止之”라 한 것처럼 가무와 여색은 사치와 향락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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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즐겁게 하는 법입니다. 이 네 가지는 총명한 제왕들이 모두 우선한 바인데, 공께서는 지금 모두 생략하고 있습니다. 옛날 소공(昭公)은 검소하고 인색하여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였고주 004
각주 004)
昭公(?~전510):鲁나라 26대 군주이다. 전542년 즉위하였고 전517년 계손씨를 쳤으나 대패하여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전510년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史記』 「魯世家」에는 ‘裯’로 되어 있고, 「年表」에는 ‘稠’로 되어 있다. 襄公의 아들이며 齊歸의 소생이다.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였다’는 말은 공손씨를 치려다가 오히려 제나라로 도망간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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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왕(偃王)은 인자하고 의로웠으나 도리어 멸망하였으니, 주 005
각주 005)
偃王:西周시대 徐나라의 군주이다. 서언왕이라 부른 이유는 『荀子』, 「非相」편에 “且徐偃王之狀, 目可瞻焉”, 楊倞注에 “徐, 國名. 僭稱王. 其狀偃仰而不能俯, 故謂之偃王. 周穆王使楚誅之”라고 하여 그의 용모가 우러러볼줄만 알았지 굽어볼 수는 없어 ‘偃王’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런 이유는 그가 근육은 있되 뼈가 없었기 때문이다. 周穆王이 西王母를 만나러 갈 때 군대를 이끌고 서진하여 황하로 나아갔다. 서언왕은 아랫사람들에게 인자하여 36개국 제후들이 그에게 신복하였다. 뒤에 周穆王이 造父에게 명하여 楚文王과 연합하여 徐나라를 공격하자 서언왕은 인의를 내세워 싸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패배하여 도망갔는데,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도망간 곳이 어딘지 제설이 분분한데, 그가 사망한 곳은 彭城 무원현(현재 江蘇省 邳縣) 東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군의 地方志들, 즉 『郡國志』, 『太平寰宇記』, 『大明一統志』를 보면, 팽성 동산이 아니라 남쪽 浙江으로 도망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최근 서언왕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離方山에서 수 리 떨어진 大唐嶺 동쪽의 徐偃王城遺址가 바로 그것이다. 『史記』 「趙世家」에 “西周時, 徐偃王反, 周穆王日馳千里馬, 攻徐偃王, 大破之. 後來, 徐偃王的家族子弟逃散到浙江, 其中實力最強的一支在此築城固守”라 하였는데, 서언왕성유지에는 靑銅蟠龍大盤과 窯址가 출토되어 번영했던 徐나라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池太寧,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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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仁義)는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망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덕(德)과 예(禮)이고, 세상을 구제하는 것은 형(刑)과 법(法)입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법도가 무너질 것입니다. 명공(明公)주 006
각주 006)
明公:지위가 높은 자에 대한 존칭이다. 『東觀漢記』 「鄧禹傳」에 “明公雖建蕃輔之功, 猶恐無所成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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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는 누대 왕업을 계승하시어 은혜로 서하(西夏)주 007
각주 007)
西夏:晉代에는 河西와 荊襄 일대를 지칭한다. 『南史』 「宋紀上武帝紀」에 “晉安帝加九錫策:‘劉毅叛換, 負釁西夏’”가 그 예이다. 또 『資治通鑒』 晉懷帝 永嘉2년조에, “晉室多故, 明公撫寧西夏, 張鎮兄弟敢肆凶逆, 當鳴鼓誅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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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결집하시고 계십니다. 인의와 효성이 천성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다 해도 주공(周公)공자(孔子)를 본받아야지 서언(徐偃)의 인(仁)처럼 형덕(刑德)이 위축되어 강건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시련이 울며 “선왕께서는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병이 들게 되었고 비통 속에 돌아가시고 말았소. 내가 왕업을 이었다 하나 시체와 다름 없이 살고 있소. [이런 마당에] 어찌 오락이나 사냥이 편안하겠소! 법도나 형법(刑法), 예의(禮儀)는 장래의 일로 남겨두겠소”라고 말하였다. 시련은 죽음에 임해서 그 아들 시비(視羆)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고조(高祖) 토욕혼공(吐谷渾公)은 언제나 말하기를, 나의 자손들 중에 반드시 흥성할 자가 있어 중국의 서쪽 번국으로 자리잡아 영원히 대대손손 경사가 이어질 것이라 하였다. 나는 이미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너 또한 그럴 조짐이 보이질 않으니 너의 자손들 중에 나타날 것이다.” 재위 15년만에 죽었다.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시비, 차남이 오흘제(烏紇堤)이다.

  • 각주 001)
    乞伏乾歸(?~412년):16국시대 西秦 왕이다. 388~400년, 409~412년간 재위하였다. 섬서 선비족이었고 걸복국인(乞伏國仁)의 동생이다. 385년 걸복국인이 西秦을 건국한 뒤 걸복건귀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였다. 서진(西秦) 건의(建義) 4년(388)에 걸복국인이 죽자 국인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나이 어리다 하여 군신들이 걸복건귀를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大將軍·大單于·河南王)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태초(太初)로 개원하고 금성(金城)으로 천도하였다. 태초 2년(389) 전진(前秦)의 부등(苻登)이 금성왕(金城王)에 책봉하였다. 太初 7년(394)에 부등이 걸복건귀에게 후진(後秦)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였다. 西秦 更始 2년(410)에 다시 苑川으로 천도하였다가 更始 4년(412)에 乞伏乾歸는 걸복공부에게 피살당했다. 뒤에 諡號를 元王이라 하였으며 廟號는 高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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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五味:첫째, 酸, 甜, 苦, 辣, 咸 다섯 가지 맛을 말한다. 『禮記』 「禮運」, “五味六和十二食, 還相爲質也”의 鄭玄注에 “五味, 酸·苦·辛·鹹·甘也”이라 하였다. 둘째, 맛있는 음식을 총칭할 때도 사용된다. 예를 들면, 『老子』, “五味令人爽口”가 그것이다. 본문의 五味도 맛난 음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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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聲色:歌舞와 女色을 지칭하는 것으로 『禮記』 「月令」가 “仲夏之月 止聲色, 毋或進”, 孔穎達疏에 “止聲色者, 歌樂華麗之事, 爲助陰靜, 故止之”라 한 것처럼 가무와 여색은 사치와 향락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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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昭公(?~전510):鲁나라 26대 군주이다. 전542년 즉위하였고 전517년 계손씨를 쳤으나 대패하여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전510년에 사망하였다. 이름은 『史記』 「魯世家」에는 ‘裯’로 되어 있고, 「年表」에는 ‘稠’로 되어 있다. 襄公의 아들이며 齊歸의 소생이다.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였다’는 말은 공손씨를 치려다가 오히려 제나라로 도망간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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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偃王:西周시대 徐나라의 군주이다. 서언왕이라 부른 이유는 『荀子』, 「非相」편에 “且徐偃王之狀, 目可瞻焉”, 楊倞注에 “徐, 國名. 僭稱王. 其狀偃仰而不能俯, 故謂之偃王. 周穆王使楚誅之”라고 하여 그의 용모가 우러러볼줄만 알았지 굽어볼 수는 없어 ‘偃王’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런 이유는 그가 근육은 있되 뼈가 없었기 때문이다. 周穆王이 西王母를 만나러 갈 때 군대를 이끌고 서진하여 황하로 나아갔다. 서언왕은 아랫사람들에게 인자하여 36개국 제후들이 그에게 신복하였다. 뒤에 周穆王이 造父에게 명하여 楚文王과 연합하여 徐나라를 공격하자 서언왕은 인의를 내세워 싸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패배하여 도망갔는데,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도망간 곳이 어딘지 제설이 분분한데, 그가 사망한 곳은 彭城 무원현(현재 江蘇省 邳縣) 東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군의 地方志들, 즉 『郡國志』, 『太平寰宇記』, 『大明一統志』를 보면, 팽성 동산이 아니라 남쪽 浙江으로 도망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최근 서언왕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離方山에서 수 리 떨어진 大唐嶺 동쪽의 徐偃王城遺址가 바로 그것이다. 『史記』 「趙世家」에 “西周時, 徐偃王反, 周穆王日馳千里馬, 攻徐偃王, 大破之. 後來, 徐偃王的家族子弟逃散到浙江, 其中實力最強的一支在此築城固守”라 하였는데, 서언왕성유지에는 靑銅蟠龍大盤과 窯址가 출토되어 번영했던 徐나라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池太寧,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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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明公:지위가 높은 자에 대한 존칭이다. 『東觀漢記』 「鄧禹傳」에 “明公雖建蕃輔之功, 猶恐無所成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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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西夏:晉代에는 河西와 荊襄 일대를 지칭한다. 『南史』 「宋紀上武帝紀」에 “晉安帝加九錫策:‘劉毅叛換, 負釁西夏’”가 그 예이다. 또 『資治通鑒』 晉懷帝 永嘉2년조에, “晉室多故, 明公撫寧西夏, 張鎮兄弟敢肆凶逆, 當鳴鼓誅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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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시련(視連), 걸복건귀(乞伏乾歸), 걸복건귀, 시련, 시련, 종악지(鍾惡地), 소공(昭公), 언왕(偃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서언(徐偃), 시련, 시련, 시비(視羆), 고조(高祖), 토욕혼, 시비, 오흘제(烏紇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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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視連)이 재위한지 15년만에 죽음 자료번호 : jo.k_0005_0097_004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