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의 발전과 금
2. 여진의 발전과 금
장백산과 흑룡강 유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고대에는 숙신,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당대에는 말갈로 불렸다. 요의 호적에 편입된 여진은 숙여진, 그렇지 않았던 여진을 생여진이라고 하였는데, 여진은 요의 지배를 받으면서 흥종 때 숙여진의 완안부, 백산부 등이 부족 연맹을 형성하였다.주 178
1115년 정월 완안의 아골타는 나라를 세우고 칭제(稱帝)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연호를 수국(收國)이하 하고 회녕(會寧, 지금의 阿城 白城子)을 국도로 삼았다. 금을 건국한 후 태조는 계속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여, 금 천보 6년(1122) 정월 동북지구 전체를 점령하였다. 금 태종(太宗)은 태조가 못 다 이룬 사업을 계승하여 계속 요를 공격하여, 천회(天會) 3년(1125) 3월 요 천조제를 포로로 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주 179요가 멸망한 이후 금은 즉각 북송(北宋)을 공격하여, 천회 4년(1126) 윤 11월 송의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하여 북송을 멸망시켰다. 이후 금은 중국 북부지방의 통치를 확립하여, 강남으로 물러난 남송과 서로 대치하는 형세를 이루었다.주 180
결국 1142년 회수(淮水)로부터 대산관(大散關)에 이르는 선을 국경으로 하고, 송은 금의 책봉을 받아 신례를 취하며, 매년 은 25만량, 비단 25만 필을 금에 보내는 등의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하였다. 중국의 왕조가 주변 이민족 국가에게 신례를 취한 것은 이례적이며 여기에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이 보여지고 있다. 해릉왕은 강렬한 화북주의자로서 남송을 토멸하여 전통적인 중국왕조체제를 스스로 구축하려고 하여, 도읍을 상경·회녕부로부터 연경으로 옮겼으며, 세종(재위 1161~1189)이 즉위하였다. 세종은 금의 명군이라고 일컬어지는데 1165년 다시 송과 화약을 맺어 이후 양국의 관계는 40년간 안정되었다. 세종은 한편으로는 여진의 독자적 문화 유지를 꾀하여 국초에 창제되어 있었던 여진문자로 한적을 번역시키기도 하였다.주 181
이러한 금의 융성의 기초가 된 것이 맹안, 모극이라는 독특한 행정·군사 제도였다. 맹안은 천을 의미하는 여진어 민간, 모극은 족장의 뜻인 무게의 음역이라고 전해지는데 원래는 하나 내지 몇 개 부락의 지도자였다. 아골타는 300호로 1모극, 10모극으로 1맹안을 조직하고 1모극 중에서 약 100명을 뽑아 1모극군으로 하고, 10모극군으로 1맹안군을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지배영역의 확대와 함께 그 휘하에 있었던 숙여진과 거란인도 맹안·모극제에 편성되었지만 그것은 그때까지의 부족조직을 완전히 해체·재편한 것은 아니고 종래의 부족 지도자를 맹안, 모극에 편입시킨 것이다. 또 중앙에서는 황제 아래에 수 명의 발극열이라는 대신이 두어졌는데 모두 유력한 호족이 차지하였다. 행정은 황제를 포함한 전원의 합의제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금의 초기 체제에는 아직 여진족 고유의 부족제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주 182
1115년 정월 완안의 아골타는 나라를 세우고 칭제(稱帝)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연호를 수국(收國)이하 하고 회녕(會寧, 지금의 阿城 白城子)을 국도로 삼았다. 금을 건국한 후 태조는 계속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여, 금 천보 6년(1122) 정월 동북지구 전체를 점령하였다. 금 태종(太宗)은 태조가 못 다 이룬 사업을 계승하여 계속 요를 공격하여, 천회(天會) 3년(1125) 3월 요 천조제를 포로로 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주 179요가 멸망한 이후 금은 즉각 북송(北宋)을 공격하여, 천회 4년(1126) 윤 11월 송의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하여 북송을 멸망시켰다. 이후 금은 중국 북부지방의 통치를 확립하여, 강남으로 물러난 남송과 서로 대치하는 형세를 이루었다.주 180
결국 1142년 회수(淮水)로부터 대산관(大散關)에 이르는 선을 국경으로 하고, 송은 금의 책봉을 받아 신례를 취하며, 매년 은 25만량, 비단 25만 필을 금에 보내는 등의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하였다. 중국의 왕조가 주변 이민족 국가에게 신례를 취한 것은 이례적이며 여기에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이 보여지고 있다. 해릉왕은 강렬한 화북주의자로서 남송을 토멸하여 전통적인 중국왕조체제를 스스로 구축하려고 하여, 도읍을 상경·회녕부로부터 연경으로 옮겼으며, 세종(재위 1161~1189)이 즉위하였다. 세종은 금의 명군이라고 일컬어지는데 1165년 다시 송과 화약을 맺어 이후 양국의 관계는 40년간 안정되었다. 세종은 한편으로는 여진의 독자적 문화 유지를 꾀하여 국초에 창제되어 있었던 여진문자로 한적을 번역시키기도 하였다.주 181
이러한 금의 융성의 기초가 된 것이 맹안, 모극이라는 독특한 행정·군사 제도였다. 맹안은 천을 의미하는 여진어 민간, 모극은 족장의 뜻인 무게의 음역이라고 전해지는데 원래는 하나 내지 몇 개 부락의 지도자였다. 아골타는 300호로 1모극, 10모극으로 1맹안을 조직하고 1모극 중에서 약 100명을 뽑아 1모극군으로 하고, 10모극군으로 1맹안군을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지배영역의 확대와 함께 그 휘하에 있었던 숙여진과 거란인도 맹안·모극제에 편성되었지만 그것은 그때까지의 부족조직을 완전히 해체·재편한 것은 아니고 종래의 부족 지도자를 맹안, 모극에 편입시킨 것이다. 또 중앙에서는 황제 아래에 수 명의 발극열이라는 대신이 두어졌는데 모두 유력한 호족이 차지하였다. 행정은 황제를 포함한 전원의 합의제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금의 초기 체제에는 아직 여진족 고유의 부족제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주 182
- 각주 178)
- 각주 179)
- 각주 180)
- 각주 181)
- 각주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