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국(勿吉國)과 중국의 교류
지난 연흥 연간(471~475)에 사신 을력지주 001를 보내 조공하였다.주 002 태화(477~499) 초에 또 말 500필을 바쳤다. 을력지가 말하기를, “처음 그 나라를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주 003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 태려하주 004에 이르러, 배를 물에 숨기고, 남쪽으로 나가 육로로 이동하여, 낙고수주 005 를 건너 거란의 서쪽 경계를 따라 화룡에 도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10락을 함락하고, 몰래 백제와 함께 수로를 따라가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도모하려 하니, 을력지를 대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가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칙을 내리길, “삼국은 모두 [북위의] 번부이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할 것이다. 서로 침범하여 어지럽히지 말라.”라고 하였다. 을력지가 이에 돌아가는데, 그가 온 길을 따라 본래 타고 온 배를 얻어, 그 나라로 배 타고 돌아갔다.
[태화] 9년(485)에 다시 사신 후니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조공하였다. 그 [나라의] 옆에는 대막로국·복종국주 006·막다회국·고루국·소화국·구불복국주 007·필려이국주 008·발대하국주 009·욱 우릉국주 010·고복진국·노루국·우진후국이 있는데, 연이어 각각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화 12년(488)에 물길이 다시 사신을 보내 호시주 011
번역주 011)
와 방물을 경사(낙양)에 바쳤다. [태화] 17년(493)에 다시 사신 파비 등 500여 명을 보내 조공하였다. 경명 4년(503)에 다시 사신 후력귀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주 012 이때부터 정광 연간(520~525)에 이르기까지 조공 사신이 계속 이어졌다.주 013 이후, 중국이 어지러워지면서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흥화 2년(540) 6월에 사신 석구운 등을 보내 방물을 바쳤으며, 무정 연간(543~549)에 이르기까지 [사신이] 끊이지 않았다.주 014
楛矢 : 楛木은 곧으며 습기나 건조함에 따라 휘어지지 않아 화살대로 적합하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도 “矢用楛 長尺八寸” 이라고 전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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楛矢 : 楛木은 곧으며 습기나 건조함에 따라 휘어지지 않아 화살대로 적합하다. 『國語』 卷5, 魯語에는 “仲尼在陳 有隼集於陳侯之庭而死 楛矢貫之 石砮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 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 遠矣 此肅愼之矢也”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17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挹婁에도 “矢用楛 長尺八寸” 이라고 전한다. 楛矢는 중국에서 石砮와 함께 숙신의 상징인데, 이는 단순한 조공품이 아니라 천자의 성덕에 九夷가 복종하는 의미, 곧 천자의 통치가 四海에 미치는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되었다(여호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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