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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계양산성

桂陽山城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삼국시대
  • 위치
  • 원소장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산52-3 일대
  • 시대
    고구려
  • 유형
입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계양산 동쪽 능선에 위치한다.
유적개관
삼국시대 산성으로 고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산정식 석축산성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계양산 정자가 있는 곳에서 정상을 향해 150m 정도 지점의 왼쪽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선문대학교와 겨레문화유산연구원 등에 의해 시굴조사 되었다. 고구려 토기편이 일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
* 고구려 토기편
참고문헌
「계양산성」, 2011
해설
인천 계양구와 부평구에 걸쳐있는 해발 395m 계양산 정산부를 따라 약 1,180m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외부는 다듬은 돌로 약 5m 높이로 쌓아올렸고 내부는 흙을 다져 쌓았다.
성의 내부는 2006년 조사 당시 헬기장과 체육 시설, 등산로 등이 조성되어 있어 이미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이나, 동문과 북문 그리고 수문으로 추정되는 터가 남아있었다. 또 산성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정상 150m 왼쪽 지점에 높이 약 2m, 길이 3.5m 가량의 석축이 11단으로 남아 있었다.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 고산성(古山城), 안남산고성(安南山古城)이라고도 부르며, 1992년 5월 15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성곽이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삼국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곽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30년 조선 중종(中宗)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고적조이다. “계양산 고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37척이며 지금은 무너져 내렸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경기(京畿)>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기록을 통해 계양산성은 석축으로 이미 조선 중기에 훼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전(口傳)에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과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이 곳에서 있었다고는 하는데, 성곽이 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08년 경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관방 성곽조에는 “안남산 동남쪽 고성은 성 둘레가 1937보(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1보는 6척을 말하기 때문에 이를 환산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지만, 이는 『증보문헌비고』의 찬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전록하는 가운데서 생긴 오류로서, 실제는 같은 기록으로 보인다.
산성이 위치한 계양산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서쪽으로 인천과 통진 일대의 조망이 가능하다. 또 한강 하류 초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강유역을 둘러싼 공방전이 치열했던 4-5세기에는 매우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음에 분명하다.
2015년 8월 산성 하부에 해당하는 방축동 49-3번지에서 방어성인 치(雉)가 조사되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의 존재도 그러하거니와, 국내에서는 처음 발견된 ‘토심석축기법’이 확인 되어 성곽을 축조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역사학계의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한성백제기의 방어성, 고구려의 남진기지, 신라의 방어기지 등의 의견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2016년 현재 국가사적으로 등록 신청과 계양산성 박물관 조성이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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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양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6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