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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倭)가 한나라에 조하하고 황제를 알현하기를 요청함

  • 국가
    왜(倭)
[광무제(光武帝)]주 001
각주 001)
建武: 後漢 光武帝의 연호(25~56)이나 여기에서는 光武帝 劉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前漢의 外戚으로서 前漢을 찬탈하여 新朝를 세운 王莽(재위 8~23)이 지나치게 非現實的인 儒敎의 교리에 의거한 理想政治를 추구하여 內·外政에서 失政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赤眉의 난을 위시한 農民蜂起와 南陽劉氏 등의 豪族叛亂이 일어나자, 南陽의 호족 劉秀도 擧兵하여 점차 사방의 경쟁 세력을 制壓하면서 25년에 後漢의 제1대 皇帝(재위 25~57)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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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中元) 2년(57)에 왜(倭)노국(奴國) 주 002
각주 002)
奴國: 『三國志』의 “奴國”(현재의 博多)으로서,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을 특징으로 하는 北九州 연안에 있었던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三國志』에 “東南至奴國百里, 官曰兕馬觚,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戶.”란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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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물(貢物)을 바치고 조하(朝賀)주 003
각주 003)
朝賀: 臣下된 자가 天子의 朝廷에 들어가서 帝王에게 축하의 의례를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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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사인(使人)은 대부(大夫)주 004
각주 004)
大夫: 중국에서 사용된 신분 호칭의 한 가지. 卿의 아래이고 士의 상위에 있는 신분. 주대에는 주왕실 및 제후를 섬기는 소영주를 지칭하였는데, 그 중에서 상위에 있는 자를 卿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國政에 참여하였다. 『禮記』 「王制」에는 제후로 上大夫卿, 下大夫, 上士, 中士, 下士가 있다고 하였다. 秦漢 이후에는 卿 아래에 大夫, 官大夫, 公大夫, 五大夫 등 大夫라는 명칭의 작이 존재하였고, 위나라에도 오대부라는 작이 있었다. 한편 漢代에 이르러 지방에서 경제력을 가진 자들이 세력을 떨치게 되고 鄕擧吏選制를 통해 자제를 중앙관료로 보내면서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는데, 周代의 士大夫라는 용어를 빌어 자신들을 士大夫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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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왜국(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광무제는 [노국(奴國) 사자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주 005
각주 005)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漢委奴國王”이라는 명문이 있는 金印의 발굴이 이 기사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주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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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107)에 왜(倭)의 국왕(國王)주 006
각주 006)
57년 후한에 조공한 주체는 “倭奴國”이었던 것에 비하여, 107년에는 “倭國王” 즉 왜국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전쟁포로로 생각되는 生口를 160인이나 바치면서 직접 황제를 알현하기를 청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生口를 바친 것은 일본열도가 107년 직전 단계에 내전을 거쳤으며, 그 내전의 결과로 왜국 전체의 대표임을 자처하는 왜국왕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왜국왕은 『三國志』에 “대대로 왕이 있다.”고 한 伊都國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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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帥升) 주 007
각주 007)
“倭國王帥升”에 대해서는 몇몇 사료에 그 기록이 조금씩 달라 井上秀雄 등(1977: 287)은 “倭國 王帥 升”으로 해석하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翰苑』에 인용된 『後漢書』에는 “倭面上國王師升”으로 北宋版 『通典』에서는 “倭面土國王師升”으로, 또 『釋日本紀』「開題」에는 “倭面國”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內藤湖南은 “倭面土”를 ‘야마토’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周鳳과 松下見林은 “倭國王師升”을 景行天皇으로 추정하였다. 白鳥庫吉은 九州의 ‘이토’(回土-怡土-伊都)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고, 志田不動麿는 黥面文身하는 습속에서 비롯된 말이므로 ‘倭面’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石原道博, 2005: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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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생구(生口)주 008
각주 008)
“生口”에 대해서는 諸說이 있는데, 중국에 있는 日本留學生, 倭人捕魚者, 捕虜 그리고 奴婢 등이 그것이다(石原道博, 2005: 47). 『後漢書』 「耿弇傳」: 722 등에서는 변경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生口라고 하였다. 그러나 『三國志』 「王昶傳」: 748의 주에 인용된 「任昭先別傳」에 의하면 일반인이 부채 등으로 인해 生口로 매매되는 경우도 있어 지나치게 그 성격을 단순하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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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인을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원하였다.

  • 각주 001)
    建武: 後漢 光武帝의 연호(25~56)이나 여기에서는 光武帝 劉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前漢의 外戚으로서 前漢을 찬탈하여 新朝를 세운 王莽(재위 8~23)이 지나치게 非現實的인 儒敎의 교리에 의거한 理想政治를 추구하여 內·外政에서 失政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赤眉의 난을 위시한 農民蜂起와 南陽劉氏 등의 豪族叛亂이 일어나자, 南陽의 호족 劉秀도 擧兵하여 점차 사방의 경쟁 세력을 制壓하면서 25년에 後漢의 제1대 皇帝(재위 25~57)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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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奴國: 『三國志』의 “奴國”(현재의 博多)으로서,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을 특징으로 하는 北九州 연안에 있었던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三國志』에 “東南至奴國百里, 官曰兕馬觚,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戶.”란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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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朝賀: 臣下된 자가 天子의 朝廷에 들어가서 帝王에게 축하의 의례를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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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大夫: 중국에서 사용된 신분 호칭의 한 가지. 卿의 아래이고 士의 상위에 있는 신분. 주대에는 주왕실 및 제후를 섬기는 소영주를 지칭하였는데, 그 중에서 상위에 있는 자를 卿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國政에 참여하였다. 『禮記』 「王制」에는 제후로 上大夫卿, 下大夫, 上士, 中士, 下士가 있다고 하였다. 秦漢 이후에는 卿 아래에 大夫, 官大夫, 公大夫, 五大夫 등 大夫라는 명칭의 작이 존재하였고, 위나라에도 오대부라는 작이 있었다. 한편 漢代에 이르러 지방에서 경제력을 가진 자들이 세력을 떨치게 되고 鄕擧吏選制를 통해 자제를 중앙관료로 보내면서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는데, 周代의 士大夫라는 용어를 빌어 자신들을 士大夫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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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漢委奴國王”이라는 명문이 있는 金印의 발굴이 이 기사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주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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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57년 후한에 조공한 주체는 “倭奴國”이었던 것에 비하여, 107년에는 “倭國王” 즉 왜국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전쟁포로로 생각되는 生口를 160인이나 바치면서 직접 황제를 알현하기를 청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生口를 바친 것은 일본열도가 107년 직전 단계에 내전을 거쳤으며, 그 내전의 결과로 왜국 전체의 대표임을 자처하는 왜국왕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왜국왕은 『三國志』에 “대대로 왕이 있다.”고 한 伊都國의 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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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倭國王帥升”에 대해서는 몇몇 사료에 그 기록이 조금씩 달라 井上秀雄 등(1977: 287)은 “倭國 王帥 升”으로 해석하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翰苑』에 인용된 『後漢書』에는 “倭面上國王師升”으로 北宋版 『通典』에서는 “倭面土國王師升”으로, 또 『釋日本紀』「開題」에는 “倭面國”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內藤湖南은 “倭面土”를 ‘야마토’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周鳳과 松下見林은 “倭國王師升”을 景行天皇으로 추정하였다. 白鳥庫吉은 九州의 ‘이토’(回土-怡土-伊都)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고, 志田不動麿는 黥面文身하는 습속에서 비롯된 말이므로 ‘倭面’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石原道博, 2005: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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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生口”에 대해서는 諸說이 있는데, 중국에 있는 日本留學生, 倭人捕魚者, 捕虜 그리고 奴婢 등이 그것이다(石原道博, 2005: 47). 『後漢書』 「耿弇傳」: 722 등에서는 변경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生口라고 하였다. 그러나 『三國志』 「王昶傳」: 748의 주에 인용된 「任昭先別傳」에 의하면 일반인이 부채 등으로 인해 生口로 매매되는 경우도 있어 지나치게 그 성격을 단순하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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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광무제(光武帝), 광무제, 안제(安帝), 수승(帥升)
지명
왜(倭), 노국(奴國), 노국, 왜국(倭國), 노국(奴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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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倭)가 한나라에 조하하고 황제를 알현하기를 요청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5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