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의 유언
“신숙주가 죽음에 임하여, 성종은 그에게 남길 말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하여 신숙주는 ‘원컨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교린이 깨지지 않도록 하소서.’ 라고 답하였다.”
신숙주의 유언을 따른 성종은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는 한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신숙주는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산천을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일본의 제도·풍속과 일본의 사정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마도에 들러 계해약조도 체결하였다. 그는 이 여정의 경험을 살려 1471년 일본의 사정을 설명한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였다.
일본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신숙주가 유언에서 일본과의 교린을 강조한 이유는 뭘까? 비록 당시 일본 국력은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지만, 안심하지 말고 언제나 일본을 관찰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양국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대비케 하겠다는 생각으로 징비록을 저술한 유성룡이 신숙주의 일화를 첫 머리에 넣은 것에는 분명한 뜻이 있을 것이다.
신숙주는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산천을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일본의 제도·풍속과 일본의 사정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마도에 들러 계해약조도 체결하였다. 그는 이 여정의 경험을 살려 1471년 일본의 사정을 설명한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였다.
일본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신숙주가 유언에서 일본과의 교린을 강조한 이유는 뭘까? 비록 당시 일본 국력은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지만, 안심하지 말고 언제나 일본을 관찰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양국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대비케 하겠다는 생각으로 징비록을 저술한 유성룡이 신숙주의 일화를 첫 머리에 넣은 것에는 분명한 뜻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