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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마권성지

馬圈城址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고구려
  • 원소장처
    요녕성 단동시 동항시 신농진 마권자촌(中國 遼寧省 丹東市 東港市 新農鎭 馬圈子村)
  • 시대
    고구려
  • 유형
입지
동항시 마권자촌 남쪽 100m 떨어진 평지에 위치
유적개관
평면형태가 방형인 평지성으로, 변의 길이는 150m이다. 토축성으로 길이 3m, 너비 1m, 높이 1.3m가량 남아있다.
참고문헌
「文物地圖集」
해설
동항시 중심에서는 서북 약 60km 지점, 단동시 중심에서는 서쪽 76km지점에 위치한 마권자촌에서 발견된 토성으로 대련(大連) 영구시(營口市)에 위치한 마권자산성(馬圈子山城)과는 다른 유적이다.
평지에 위치한 방형의 토성으로 한 변의 길이는 약 150m 전체 둘레는 약 600m가량으로 추정된다. 조사 당시 남아있는 성벽은 3m 정도에 불과했다.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고구려의 성으로 추정된다.
단동은 요동반도의 동남부이자 압록강이 황해를 만나는 출해구(出海口) 지점에 위치한다. 현재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의 신의주(新義州)와 국경지역이기도 하다.
단동시는 단동시를 축으로 서쪽 시계방향으로 현(縣)급도시인 동항시(東港市)와 봉성시(鳳城市) 그리고 관전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이 위치한다. 동항시는 단동항구가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봉성시는 고구려가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봉황성(鳳凰城)(고구려 오골성(烏骨城)으로 비정)’이 있음으로 불리는 명칭이다.
단동 지역은 한(漢)이 요동군에 소속시킨 서안평(西安平/북안평)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래로부터 서안평은 요동지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바다를 통한 교섭과 무역의 창구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건국이후 사방이 중국세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영역국가로 돋움하기 위해서 바다로 나아가는 출해구를 확보하고 배후의 중국세력을 차단하는 것이 최우선 생행 과제였다. 때문에 수도를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한 직후부터 고구려는 줄곧 서안평으로의 진출을 위해서 중국세력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311년 마침내 서안평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또 서안평의 확보로 고구려는 압록강 남쪽,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중국의 한사군(漢四郡)인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중국세력과 분리 고립시키고 이들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313년과 314년, 차례로 두 군현이 사라진 것만 보더라도 서안평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서안평 확보는 고구려의 숙원인 ‘요동으로의 진출’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 첫 도읍인 환인(桓仁)이나 집안(集安/국내성)에서는 험준한 산맥이 요동평원까지 중첩되어 있는데 비해, 단동에서는 비교적 완만한 지역을 지나 요하의 하구인 영구(營口)까지 진출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토 확장은 반대로 방어지역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한반도 내부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단동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평양지역은 중국세력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는 늘어났지만, 바다를 통한 침입의 접근성은 오히려 용이해진 것이다. 때문에 고구려는 발해만 해안지역과 황해 연안에 해양방어체계의 일환으로 방어용 시설들을 구축했는데, 주로 단동과 대련(大連) 지역이 그 주축이 되었다.
마권성은 작은 규모의 성이지만, 천산산맥(千山山脈)을 넘어오는 길목과 요동반도의 해안가 평지를 돌아오는 길목, 또 해안에서 25km 거리에 위치하여 해안에서 상륙하여 압록강 방면으로 나아가는 적을 조망하고 차단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고구려 중후기 방어시설 중 하나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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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권성지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70_0020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