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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삼간명공(三間名公; 미마나노키미)

삼간명공(三間名公; 미마나노키미)
 미마나국주(彌麻奈國主; 미마나노코니키시) 모류지왕(牟留知王; 무루치와우)의 후손이다. 처음에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숭신(崇神; 스진)이다.] 시대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배를 타고 월국(越國; 고시노쿠니)의 사반포(笥飯浦; 게히노우라)에 도착하였다. 사람을 보내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 오호카라노쿠니)의 왕자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努我阿羅斯等; 츠누가아라시토) 또는 아리질지간기(阿利叱智干岐; 아리시치칸키)라고 합니다. 일본국에 성인이 있다고 전해 듣고 귀화하였습니다. 혈문(穴門; 아나토)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 이츠츠히코)입니다.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 이외에 다른 왕은 없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고,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려 하였지만 길을 알지 못하여 섬과 포구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해북(海北)을 돌아 출운국(出雲國; 이즈모노쿠니)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때에 천황이 죽었다. 그대로 머물러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이쿠메이리히코이사치노스메라미코토)[시호는 수인(垂仁; 스이닌)이다.]을 섬겼다. 천황이 “그대가 빨리 왔더라면 선황을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 미마키)의 좋은 이름을 따라 미마나(彌摩奈; 미마나)라고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비단을 주며 본토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국호를 고친 연유이다.
 
【주석】
1. 삼간명공(三間名公)
미정잡성 하내국 「삼간명공」 조(1146)에도 게재되어 있다.
삼간명(三間名; 미마나)이라는 씨명은 『일본서기』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 7월조에 “임나국(任那國; 미마나노쿠니)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筑紫國)으로부터 2,000여 리 떨어져 있다. 북쪽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국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간명공은 여기에만 보인다.
무성의 삼간명씨는 「천평5년(733) 우경계장(天平五年右京計帳)」(『대일본고문서』 1-492)에 보이는 미마나추정녀(彌麻奈秋庭女)와 「천평승보 2년(750) 8월 28일자 조동대사사해(天平勝寶二年八月二十八日付造東大寺司解)」(『대일본고문서』 25-134)에 보이는 삼간명구수만려(三間名久須万呂)가 있다. 또 인성(人姓)의 어간명씨(御間名氏)도 보인다. 『속일본기』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 정월 무자조에는 정6위하에서 외종5위하로 승서된 어간명인흑녀(御間名人黑女)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하(下)의 「사문적공작불상임명종시시이표연(沙門積功作佛像臨命終時示異表緣)」 제30에는 “노승 관규(觀規; 간키)는 속성(俗姓)이 삼간명간기(三間名干岐; 미마나노카무키)이다. 기이국(紀伊國) 명초군(名草郡) 사람이다”라고 적혀 있다.
2. 모류지왕(牟留知王)
모류지왕은 여기에만 보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재된 좌지왕(坐知王), 질지왕(銍知王), 겸지왕(鉗知王) 및 『남제서(南齊書)』 의 하지(荷知)와 동류의 왕명이라 생각된다.
미정잡성에는 117씨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임나 출신임을 주장하는 씨족은 우경의 삼간명공씨 하나이다.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이하 문장은 『일본서기』 수인천황 2년 시세조와 거의 같다. 따라서 『신찬성씨록』 편찬 시 삼간명공의 「본계(本系)」 를 제출한 사람은 『일본서기』 를 참고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조상을 모류지왕이라 주장하고 『일본서기』 에 기술된 도노아아라사등의 후예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노아아라사등의 후예를 주장하는 좌경 제번에 수록된 대시수(大市首) 등과는 다른 계통의 씨족이라 여겨진다.
* 『일본서기』 수인천황(垂仁天皇) 2년 시세조와 「삼간명공(三間名公)」 조 원문 유사성 비교
다음 사료의 밑줄을 그은 부분이 『일본서기』 수인천황 2년 시세조에서 앞의 「삼간명공」 조와 유사한 내용을 전한 부분이다.
 御間城天皇之世. 額有角人. 乗一船. 泊于越國笥飯浦. 故號其處曰角鹿也. 問之曰. 何國人也. 對曰. 意富加羅國王之子. 名都怒我阿羅斯等. 亦名曰于斯岐阿利叱智于岐. 傳聞日本國有聖皇. 以歸化之. 到于穴門時. 其國有人. 名伊都都比古. 謂臣曰. 吾則是國王也. 除吾复無二王. 故勿往他処. 然臣究見其爲人. 必知非王也. 旣更還之. 不知道路. 留連島浦. 自北海廻之. 経出雲國至於此間也. 是時遇天皇崩. 便留之. 仕活目天皇逮于三年. 天皇問都怒我阿羅斯等曰. 欲歸汝國耶. 對諮. 甚望也. 天皇詔阿羅斯等曰. 汝不迷道必速詣之. 遇先皇而仕歟. 是以. 改汝本國名. 追負御間城天皇御名. 便爲汝國名. 仍以赤織絹給阿羅斯等.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其是之緣也.
 【번역】 어간성천황의 시대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있어 배를 타고 와서 월국(越國)의 사반포(笥飯浦)에 정박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이름하였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츠누가아라시토)이고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 한다. 일본국에 성황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귀화하였다. 혈문(穴門; 아나토)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 이츠츠히코)였다. 나에게 ‘나는 곧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왕은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틀림없이 왕이 아님을 알았다. 즉시 다시 돌아왔다. 길을 알지 못해서 섬과 포구에 계속 머물렀다. 북해로부터 돌아와 출운국(出雲國)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천황의 죽음을 조우하였다. 그대로 머물러 활목천황을 섬겨 3년이 경과하였다. 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바란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을 불러 “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을 만나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네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즉시 너의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인하여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 미마나노쿠니)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3.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은 『일본서기』 와 『고사기』 에 제10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 에는 어진목입일자인혜명(御眞木入日子印惠命), 미마기이리비고(美麻紀伊理毗古)라고 하고, 『상륙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 에는 미만귀천황(美萬貴天皇)이라 적혀 있다. 숭신천황(崇神天皇)이라는 칭호는 『일본서기』 의 편찬(720)이 이루어진 후 8세기 후반에 새로이 제정된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에 대한 중국식 시호이다. 숭신천황은 10대천황이지만 ‘처음으로 나라를 다스리신 천황’이라는 의미를 띤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이라고 불리었다. 최초의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도 ‘처음으로 천하를 다스리신 천황(始馭天下之天皇;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노미코토)’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양자의 관계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으로 천하를 다스린 천황이 두 명 존재하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 때 천황가의 기원을 더욱 올려 잡기 위해 초대 천황인 숭신 위로 8대의 천황을 더 만들어 넣고 초대 천황으로 신무의 이야기를 부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설명되고 있다.
4.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일본서기』 에서는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이 기원전 29~70년까지 재위한 11대 천황이라고 기재하고 있지만, 실존 여부에 관해서는 부정적이다. 중국식 시호는 수인천황(垂仁天皇)이다. 아버지는 숭신천황이고 어머니는 어간성희(御間城姬)라고 기재되어 있다. 황후로 협수희명(狹穗姬命)과 일엽초원명(日葉酢媛命)을 두고, 자녀는 모두 11남 5녀를 얻었다고 적혀 있다.
5. 액유각인(額有角人)
『일본서기』 수인천황 2년 시세조의 일운(一云)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나온다. 『일본서기』 에는 소나갈질지가 임나에서 온 최초의 사람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본서기』 편자는 소나갈질지와 도노아아라사등을 동일인이라 간주하며 소나갈질지 기사의 분주에 도노아아라사등의 이야기를 넣었다. 그런데 소나갈질지는 이후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소나갈질지의 분주에 기재된 도노아아라사등은 『신찬성씨록』 에도 등장한다. 도노아아라사등은 일본음이 ‘츠누가아라시토’인데, 이는 ‘뿔(角; 츠누)이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것은 관을 쓴 사람을 표현한 말로 왕족이나 수장층이었음을 나타낸다.
6. 의부가라국왕자(意富加羅國王子)명도노아아라사등(名都努我阿羅斯等)
도노아아라사등(都努我阿羅斯等)은 『일본서기』 의 숭신기와 수인기에 나오는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과 동일인이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 7월조에는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바다를 격하여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수인천황 2년 시세조에는 임나인 소나갈질지에 대한 자세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 소나갈질지의 이름이 분주에서는 도노아아라사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소나갈질지는 분주에서 의부가라국 왕자라고 말하고 있다. ‘의부(意富; 오호)가라국’은 크다는 의미의 ‘대(大; 오)가라국’ 출신이라는 말이다. 이는 임나국을 대가라국으로 보는 『일본서기』 찬자의 인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가라국으로는 고령의 대가야국과 김해의 금관가야국이 존재했는데, 소나갈질지라는 이름의 분석을 통해 의부가라국은 김해의 금관가야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은, 소나갈질지(蘇那葛叱知)의 ‘소나’는 금관, ‘갈질지’는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삼품창영(三品彰影)은 ‘소’는 금(金)이며 ‘나’는 임나의 ‘나’와 같이 국(國)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소나’란 금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갈’은 군과 읍의 고훈(古訓)인 골이며, ‘질지’는 신지(臣智), 사등(斯登) 등과 마찬가지로 대읍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금국(금관)의 읍군(邑君)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도노아아라사등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음이 ‘츠누가아후아시토(つぬがあらしと)’인데 이것은 ‘뿔(角; 츠누)이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것은 관을 쓴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왕족이나 수장층이었음을 말해 준다. 숭신기와 수인기에 나오는 임나국의 소나갈질지(도노아아라사등)의 조공 기사는 금관국의 지배층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사실을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일본서기』 편찬자는 금관국 출신의 왕족이 일본에 도래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금관국 왕족인 도노아아라사등의 내조 설화를 숭신천황과 관련시켜 서술한 것은 숭신천황의 출신지가 금관국임을 암시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7. 아리질지간기(阿利叱智干岐)
『일본서기』 수인천황 2년 시세조의 일운(一云)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 우시키아리시치칸키)라고 적혀 있다. 아라사등(阿羅斯等; 아리시토)을 가리킨다. 그리고 간기(干岐; 간키)는 가야의 수장호이다. 『일본서기』 에 인용된 『백제기』 와 『백제본기』 에는 한기(旱岐; 간키)라고 표기한 사례도 있다. 신공기 46년조의 탁순왕(卓淳王)말금한기(末錦旱岐), 신공기 62년조의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 흠명기 2년 4월조의 안라(安羅)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 졸마(卒麻)의 한기, 산반해(散半奚)의 한기의 아들, 다라(多羅)의 하한기 이타(夷他), 사이기(斯二岐)의 한기 아들, 자타(子他)의 한기 등을 들 수 있다.
8. 혈문(穴門)
혈문(穴門; 아나토)은 율령제하 장문국(長門國) 서남부(西南部) 지역이다. 이곳은 현재 하관(下關) 해협 주변이다.
9. 각록(角鹿)
각록은 돈하(敦賀; 츠루가)라고도 쓴다. 대륙과의 교통의 요지이며, 북륙(北陸) 지방 제국의 공납물을 운송하는 중요 항구로서 고대 이래로 번영하였다. 발해 사신의 체류 시설인 송원(松原; 마츠하라) 객관(客館)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고사기』 중애천황단(仲哀天皇段)에 도노하(都奴賀; 츠누가)의 지명 기원 설화가 실려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건내숙녜명(建內宿禰命)이 어자(御子)를 데리고 재계하려고 담해(淡海)와 약협(若狹) 2국을 순행했을 때 월국(越國) 각록(角鹿)에 임시 궁을 짓고, ……아침에 해변에 가 보았더니 코에 상처가 난 돌고래가 포구 일대를 메우듯이 해변에 모여들어 있었다. 이것을 보고 어자가 사자를 통하여 신에게 아뢰기를 ‘신이 나에게 식료인 물고기를 주셨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신을 칭송하며 어식진대신(御食津大神; 미케츠오오카미)이라 이름 지었다. 그래서 지금도 기비대신(氣比大神; 게히노오카미)이라 한다. 또 돌고래 코피 냄새가 났으므로 그 포구 이름을 혈포(血浦; 치누라)라고 불렀다. 지금은 도노하(都奴賀; 츠누가)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고사기』 의 전승은 『일본서기』 나 「삼간명공」 조에 기록된 내용과 다르다. 『고사기』 에는 도노아아라사등의 전설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는 “왜(倭)가 일찍부터 철을 구하기 위해서 변진지역 즉 가야 지역과 교섭한 것으로 되어 있다”로 되어 있다. 또한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왜가 이미 기원전 1세기경부터 한반도를 통해서 중국과 교통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3세기 후반으로 비정되는 숭신천황(崇神天皇)이전부터 이미 일본 열도와 한반도, 특히 가야 지역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숭신천황 때에 처음으로 한반도와 교섭했다는 『일본서기』 의 서술 내용은 물론이고 이를 기화로 숭신천황의 이름을 따서 미마나국이라 불렀다는 국명 기원 설화도 숭신천황 때부터 한반도를 복속했다는 관념에 기초한 조작으로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10.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
이도도비고는 여기에만 보인다. 다만 히코[彦]는 일자(日子)라는 의미로서 남자의 미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11. 오시국왕야(吾是國王也)
『일본서기』 흠명천황 31년(570) 5월조에 월국(越國)에 도착한 고구려 사절과 도군(道君; 미치노키미) 관련 전승에도 지방 호족이 해외에서 온 자에게 자신을 국왕이라 칭한 유사한 전승이 기재되어 있다.
* 『일본서기』 에 기재된 도군 관련 전승
흠명천황 31년 여름 4월조에는 “박뢰시리궁(泊瀨柴籬宮; 하쓰세노시바카키노미야)에 거동하였다. 월인(越人) 강정신군대(江渟臣裙代; 에누노오미모시로)가 도성에 와서 ‘고구려 사신이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배를 댈 곳을 잃고 헤매다가 물결 따라 떠다니던 중 홀연히 해안에 다다랐는데, 군사(郡司)가 숨겨 두었으므로 제가 밝히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조칙을 내려 ‘내가 왕업을 이은 지 얼마 안 된 때 고구려인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처음으로 월국(越國)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비록 물에 빠지고 떠다니는 고생은 하였지만,아직 목숨은 온전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이 멀리 미치고 지극한 덕이 높고 크며, 감화가 주변까지 통하여 은혜가 널리 미치고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담당 관서는 마땅히 산성국(山城國; 야마시로노쿠니) 상락군(相樂郡; 사가라카노고호리)에 객관(客館)을 세워 깨끗이 정돈하고 후히 베풀고 돌보라.’라고 하였다. 이달에 천황이 수레를 타고 박뢰시리궁으로부터 이르렀다. 동한씨직강아(東漢氏直糠兒; 야마토노아야노우지노아타히아라코)와 갈성직난파(葛城直難波; 가즈라키노아타히나니와)를 보내 고구려 사신을 맞이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12. 출운국(出雲國)
출운국은 현재 도근현(島根縣)이다.
삼간명공(三間名公)은 여기에만 보인다. 삼간명공씨가 조상이라 주장한 모류지왕(牟留知王)도 여기에만 보인다. 따라서 삼간명공이 미마나국주(彌麻奈國主) 모류지왕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양자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기록이 사서나 문서류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세운 조상도 의심스럽다. 또 미정잡성 하내국 삼간명공씨는 신별을 주장하고 있어 신별을 주장하는 가야계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미정잡성으로 분류된 이유는 동씨 중에 신별을 주장하는 씨가 하내국에도 존재하므로 『신찬성씨록』 편찬국에서 이를 확정하기 어려워 양자 모두 미정잡성에 게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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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간명공(三間名公; 미마나노키미)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80_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