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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고구숙녜(高丘宿禰; 다카오카노스쿠네)

#한(漢)
고구숙녜(高丘宿禰; 다카오카노스쿠네)
 백제국(百濟國)의 공족(公族) 대부고후(大夫高侯)의 후손 광릉고목(廣陵高穆)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고구숙녜(高丘宿禰)
좌백유청(佐伯有淸)은 고구(高丘)의 씨명에 대해 그 조상인 광릉고목(廣陵高穆)의 고(高)와 능(陵)을 합친 미칭일 것으로 추정한다. 즉 능(陵)과 구(丘)가 상통한다는 점에서 이해되는 추정이다. 지명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속일본기』 신호(神護) 원년(724) 5월 신미조에는 정6위하 낙랑하내(樂浪河內)는 고구련(高丘連)으로 개성되었다. 동 신호경운(神護景雲) 원년(767) 3월 병자조에는 하내국(河內國) 고시군(高市郡) 사람 종4위하 고구련비량마려(高丘連比良麻呂)에게 숙녜(宿禰)성을 주어 고구숙녜(高丘宿禰)가 되었다고 한다.
고구숙녜비량마려(高丘宿禰比良麻呂)는 천평보자(天平寶字) 5년(761) 정월에 월전개(越前介)에 서임된 이래 천평보자 8년(764) 정월에는 내장조(內藏助)와 대외기(大外記)를 겸직하였다. 『정창원문서』 천평보자 8년 7월 25일부 「시약원해(施藥院解)」(『大日本古文書』16-504)에도 대외기 겸 내약조(內藥助) 고구련비량마려(高丘連比良麻呂)가 나오고 말미에 비량마려(比良麻呂)의 이름을 자서(自署)한 문장이 있다. 이 문서는 시약원에서 상급 기관인 내장료에 올린 것으로, 의약품 조달을 위한 물품 청구서에 내장료 차관인 그의 자필 서명이 들어간 것이다. 그는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764) 9월조에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의 반란을 천황에게 밀고한 공으로 외종5위하에서 종4위하로 특진하였고,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5) 정월에는 종4위, 훈4등을 받았다. 그 후 천평보자 8년 9월에는 칭덕천황(稱德天皇)의 기이국(紀伊國) 행차에 즈음해서 어장속차관(御裝束次官)이 되고, 신호경운 원년(767) 3월에는 법왕궁직(法王宮職)을 설치할 때에 대외기(大外記) 원강수(遠江守)로서 법왕궁의 차관인 양(亮)에 임명되었다.
한편 『속일본기』 신호경운 2년(678) 6월 경자조 고구숙녜비량마려의 「졸전」 기사에는, 그의 조부 사문영(沙門詠)은 근강조(近江朝)인 계해년(天智 2년, 663)에 백제에서 귀화하였다고 한다. 백제 패망 후에 망명한 씨족으로 원래의 성은 백제 8대 대성인 사씨(沙氏)였음을 알 수 있다. 사문영(沙門詠)에 대해서는 기타 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 2년(663) 9월조에 나오는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유 등 백제의 고위 관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승선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낙랑하내(樂浪河內)는 하내 지역에 거주한 까닭에 지역명을 씨성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동 「졸전」 에 낙랑하내에 대해 “정5위하 대학두(大學頭)”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식부성 대학료의 장관인 대학두의 지위에 있던 대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낙랑하내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화동(和銅) 5년(712) 7월에 파마국(播磨國) 대목(大目) 종8위상 낙랑하내가 정창(正倉)을 만든 공로로 1계급 승진과 시(絁), 포(布)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 양로(養老) 5년(721) 정월 경오조에 “정6위하 낙랑하내 등은 퇴조(退朝) 후에 동궁에 근시하라”라고 명받는다. 또 동년 정월 갑술조에 관료 중에서 학업이 뛰어나고 모범이 될 만한 자를 포상하였다는 기록에 낙랑하내가 문장가로서 나오고 있다. 『가전(家傳)』 하(『寧樂遺文』 下-885)에도 문사에 뛰어난 인물로 기조신청인(紀朝臣淸人), 산전사어방(山田史御方), 갈성련광성(葛井連廣成), 백제공왜마려(百濟公倭麻呂), 대왜기촌소동인(大倭忌寸小東人) 등과 더불어 낙랑하내에서 개성한 고구련하내(高丘連河內)의 이름이 열기되어 있다. 이들은 고전에 밝은 유식자로서 사서, 율령의 편찬 등에 관여한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다. 이후 『속일본기』 천평(天平) 3년(731) 정월 병자조에는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되고, 동년 9월 계유조에는 우경량(右京亮)에 보임되었다. 동 13년(741) 9월 기미조에는 왕경에 파견되어 백성들에게 택지를 반급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 14년(742) 8월 계미조에는 천황이 근강국 갑하군(甲賀郡) 자향락촌(紫香樂村)으로 순행할 당시 이궁(離宮)을 조영하는 조이궁사(造離宮司)에 임명되었다. 『만엽집』 천평 15년(743) 「고구하내련가이수(高丘河內連謌二首)」(6-1038, 1039)라고 하여 2수의 문장을 남기고 있으며, 『속일본기』 천평 18년(746) 5월에는 종5위하로 승진하고, 동 천평 18년(746) 9월조에는 백기수(伯耆守)에 보임되고, 천평승보(天平勝寶) 3년(751) 정월조에는 종5위상, 동 6년 정월에는 정5위하가 된다.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6년(839) 8월조에는 견당사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고구숙녜백흥(高丘宿禰百興)이 나온다. 그는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승화5년(838) 7월 2일조에도 등원상사(藤原常嗣)를 대사로 하는 견당사에 준녹사(准錄事)로서 참가하고 있다. 또 『일본문덕천황실록』 인수(仁壽) 원년(851) 정월에는 외종5위하 미장개(尾張介)가 되었고, 동 제형(齊衡) 3년(856) 정월에는 월전개(越前介)에 보임되었다. 이어 『일본삼대실록』 정관(貞觀) 원년(859) 정월에는 화천수(和泉守), 동 정관 5년(863)2월에는 하내수(河內守)에 오르는 등 다양한 관력을 거쳤다.
2. 광릉고목(廣陵高穆)
광릉고목에 대해서는 좌경 제번(하) 「대석(大石)」 조(778) 광릉고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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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숙녜(高丘宿禰; 다카오카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