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진조(豐津造; 도요츠노미야츠코)
풍진조(豐津造; 도요츠노미야츠코)
임나국(任那國) 사람 좌이금(左李金; 사리코무)[또 이름은 좌리기모(佐利己牟; 사리코무)이다.]로부터 나왔다.
【주석】
1. 풍진조(豐津造)
풍진(豐津)의 씨명은 대판부(大阪府) 풍능군(豐能郡)에 풍진촌(豐津村)이라는 지명으로부터 나왔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나, 풍진(豐津)이 오래된 지명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구체적인 것은 불명이다.
풍진조의 옛 성은 한인(韓人)이다. 『속일본기』 보귀(寶龜) 10년(780) 5월조에 “섭진국(攝津國) 풍도군인(豐島郡人) 한인도촌(韓人稻村) 등 18인이 풍진조(豐津造)의 성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해에 한인도촌 등은 풍진조로 개성하였다. 『대동유취방(大同類聚方)』 지지내배약(志智乃倍藥)조에 “섭진국(攝津國) 풍도군(豐島郡) 사람 한인도촌(韓人稻村)”의 인명이 보인다. 풍진조의 일족으로는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5년(838)정월 신사조에 섭진국 풍도군(豐島郡) 사람인 정6위상 풍진조미사(豐津造彌嗣) 등 28인을 우경 2조로 호적을 옮겼으며, 이들은 제번에서 귀화한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풍진(豐津)의 씨명은 대판부(大阪府) 풍능군(豐能郡)에 풍진촌(豐津村)이라는 지명으로부터 나왔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나, 풍진(豐津)이 오래된 지명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구체적인 것은 불명이다.
풍진조의 옛 성은 한인(韓人)이다. 『속일본기』 보귀(寶龜) 10년(780) 5월조에 “섭진국(攝津國) 풍도군인(豐島郡人) 한인도촌(韓人稻村) 등 18인이 풍진조(豐津造)의 성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해에 한인도촌 등은 풍진조로 개성하였다. 『대동유취방(大同類聚方)』 지지내배약(志智乃倍藥)조에 “섭진국(攝津國) 풍도군(豐島郡) 사람 한인도촌(韓人稻村)”의 인명이 보인다. 풍진조의 일족으로는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5년(838)정월 신사조에 섭진국 풍도군(豐島郡) 사람인 정6위상 풍진조미사(豐津造彌嗣) 등 28인을 우경 2조로 호적을 옮겼으며, 이들은 제번에서 귀화한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좌리기모(佐利己牟)
다음의 「한인」 조(989)에도 동일한 기사가 보인다. 대화국(大和國) 제번 「대반조(大伴造)」조(961)에 보이는 좌리왕(佐利王)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다음의 「한인」 조(989)에도 동일한 기사가 보인다. 대화국(大和國) 제번 「대반조(大伴造)」조(961)에 보이는 좌리왕(佐利王)과 동일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