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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백제의 성립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주 001
번역주 001)
在遼東之東千餘里 : 『삼국지』 동이전의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를 본뜬 표현이다. 백제의 위치를 고구려와 묶어서 설명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북조 계통 사서는 백제의 지리적 위치를 구체적으로 소개한 반면 『송서』를 비롯한 남조 계통 사서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랐을 뿐 백제에 대한 구체적 관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유원재, 1993)가 있다. 또한 이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백제가 본래 부여·고구려와 인접한 만주 지역에 있다가 4세기 중엽의 격변기에 한반도로 남하해 우세한 기마전술을 바탕으로 마한을 정복하고 한반도 중부에 정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道學, 1994). 里는 판본에 따라 裏로 기재된 것도 있는데, 지역·장소라는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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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니 백제가 요서를 경략하였다.주 002
번역주 002)
畧有遼西 : 백제가 요하 서쪽을 다스렸다는 뜻으로, 같은 기록이 『양서』·『남사』 등 남조 계통 사서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정작 요서 지역을 영토로 삼았던 북조의 여러 사서와 백제 역사를 가장 자세히 다룬 『삼국사기』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으며, 『양직공도』에는 “樂浪亦有遼西”로 적혀 있어 논란이 일었다.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해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있다. 긍정론은 백제가 요서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유했다고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2 ; 강종훈, 1992 ; 강종훈, 2003), 4~6세기에 일정 기간 요서 지역을 지배했다는 견해(鄭寅普, 1947 ; 申采浩, 1948 ; 1972 ; 金庠基, 1967 ; 김세익, 1967 ; 方善柱, 1971), 해상활동을 통한 상업기지 확보로 보는 견해(金哲埈, 1975 ; 李明揆, 1983 ; 신형식, 1992 ; 이희진, 1999 ; 정재윤, 2005) 등이 있다. 부정론은 중국 정통왕조를 자처하는 남조의 옛 영토 회복을 위한 외교수단에 불과하다는 견해(池內宏, 1947),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견해(那柯通世, 1919), 고구려와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和田博德, 1951), 부여와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金廷鶴, 1981), 樂浪·帶方과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李弘稙, 1971 ; 유원재, 1994), 요서의 낙랑교군 설치와 백제왕의 낙랑태수 작호를 오해했다는 견해(김기섭, 1997), 요서 지역에서 부여계 인물들이 활동한 것을 백제의 요서 진출로 오인했다는 견해(余昊奎, 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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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주 003
번역주 003)
晉平郡晉平縣 : 『양서』와 『남사』 백제전에는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경략하여 百濟郡을 두었다고 하였으며, 『양직공도』에는 낙랑이 요서 진평현을 점유했다고 하였다. 『송서』 제기(권8)에는 468년 4월에 晉安郡을 진평군으로 바꾸고 山陽王 [劉]休祐를 晉平王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의 진평군은 지금의 福建省 福州이다. 또 『송서』 州郡志(권38)에는 280년에 長平縣을 진평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지금의 廣西省에 위치한 작은 현이다. 모두 요서 지역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3세기 중엽 魏나라의 요서군 옆에 위치한 것은 右北平郡이고, 이것이 3세기 말엽 晉나라 때 北平郡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치소는 지금의 唐山 부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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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다.

  • 번역주 001)
    在遼東之東千餘里 : 『삼국지』 동이전의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를 본뜬 표현이다. 백제의 위치를 고구려와 묶어서 설명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북조 계통 사서는 백제의 지리적 위치를 구체적으로 소개한 반면 『송서』를 비롯한 남조 계통 사서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랐을 뿐 백제에 대한 구체적 관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유원재, 1993)가 있다. 또한 이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백제가 본래 부여·고구려와 인접한 만주 지역에 있다가 4세기 중엽의 격변기에 한반도로 남하해 우세한 기마전술을 바탕으로 마한을 정복하고 한반도 중부에 정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道學, 1994). 里는 판본에 따라 裏로 기재된 것도 있는데, 지역·장소라는 뜻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畧有遼西 : 백제가 요하 서쪽을 다스렸다는 뜻으로, 같은 기록이 『양서』·『남사』 등 남조 계통 사서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정작 요서 지역을 영토로 삼았던 북조의 여러 사서와 백제 역사를 가장 자세히 다룬 『삼국사기』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으며, 『양직공도』에는 “樂浪亦有遼西”로 적혀 있어 논란이 일었다.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해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있다. 긍정론은 백제가 요서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유했다고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2 ; 강종훈, 1992 ; 강종훈, 2003), 4~6세기에 일정 기간 요서 지역을 지배했다는 견해(鄭寅普, 1947 ; 申采浩, 1948 ; 1972 ; 金庠基, 1967 ; 김세익, 1967 ; 方善柱, 1971), 해상활동을 통한 상업기지 확보로 보는 견해(金哲埈, 1975 ; 李明揆, 1983 ; 신형식, 1992 ; 이희진, 1999 ; 정재윤, 2005) 등이 있다. 부정론은 중국 정통왕조를 자처하는 남조의 옛 영토 회복을 위한 외교수단에 불과하다는 견해(池內宏, 1947),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견해(那柯通世, 1919), 고구려와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和田博德, 1951), 부여와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金廷鶴, 1981), 樂浪·帶方과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李弘稙, 1971 ; 유원재, 1994), 요서의 낙랑교군 설치와 백제왕의 낙랑태수 작호를 오해했다는 견해(김기섭, 1997), 요서 지역에서 부여계 인물들이 활동한 것을 백제의 요서 진출로 오인했다는 견해(余昊奎, 2001) 등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晉平郡晉平縣 : 『양서』와 『남사』 백제전에는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경략하여 百濟郡을 두었다고 하였으며, 『양직공도』에는 낙랑이 요서 진평현을 점유했다고 하였다. 『송서』 제기(권8)에는 468년 4월에 晉安郡을 진평군으로 바꾸고 山陽王 [劉]休祐를 晉平王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의 진평군은 지금의 福建省 福州이다. 또 『송서』 州郡志(권38)에는 280년에 長平縣을 진평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지금의 廣西省에 위치한 작은 현이다. 모두 요서 지역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3세기 중엽 魏나라의 요서군 옆에 위치한 것은 右北平郡이고, 이것이 3세기 말엽 晉나라 때 北平郡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치소는 지금의 唐山 부근에 있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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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성립 자료번호 : jd.k_0006_0097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