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신찬성씨록

좌백숙녜(佐伯宿禰; 사헤키노스쿠네)

좌백숙녜(佐伯宿禰; 사헤키노스쿠네)
 대반숙녜(大伴宿禰)와 같은 조상이다. 도신명(道臣命)의 7세손 실옥대련공(室屋大連公)의 후손이다.
 
【주석】
1. 좌백숙녜(佐伯宿禰)
좌백숙녜는 천무 13년(684) 12월에 좌백련이 숙녜를 사성받아 좌백숙녜가 되므로, 685년 이후의 씨족명칭이다.
『일본서기』에 좌백련씨가 처음 보이는 곳은 흠명 15년 춘정월 병신조로, 백제가 사신을 축자에 파견하여 내신과 좌백련 등에게 왜국이 언제 군대를 파견할지 묻고 있다. 흠명천황 17년 정월조에서도 그 전해 정월에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 혜가 귀국할 때에 아배신, 좌백련, 파마직을 보내 축자국의 수군을 거느리고 호송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는 좌백련이라고만 적고 구체적인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백제계 사료에서 개인 이름 없이 좌백련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일본서기』에는 좌백련씨 출신의 사람이 모두 7명이 보인다. 최초는 숭준 즉위전 정미년 6월 갑진삭 경술조에 보이는 단경수(丹經手)로, 취옥희존(炊屋姬尊, 추고천황)을 옹립한 대신 소아마자숙녜의 명으로 혈수부황자(穴穗部皇子)와 택부황자(宅部皇子)를 주살하였다. 이후 서명 즉위전기에는 추고 사후에 군신들이 후계자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좌백련동인(佐伯連東人)이 산배대형왕을 천황으로 추천하였다. 그 후 황극천황 3년 춘정월 을해삭조에서는 중신련겸자가 황극천황의 아들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에게 좌백련자마려를 추천하였다. 좌백련자마려는 이후 중대형황자의 경호를 담당하였던 듯하다. 그는 황극 4년 6월무신조에서는 중대형황자와 함께 대신 소아신입록을 죽였다. 천지천황 5년 3월조에서는 그가 병이 들자 칭제(稱制) 중이던 중대형황자가 그의 집에 가서 위문하였다고 적고 있다.
좌백련씨 중에는 백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사람도 있었다. 즉 제명 2년(656) 시세조에는 서해사 좌백련고승(佐伯連栲繩)이 백제에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672년 6월에 대해인황자가 거병하여 일어난 임신의 난 때에 좌백련은 대해인황자 측과 대우황자 측으로 갈라져 싸웠다. 이때에 좌백련대목(佐伯連大目)이 대해인황자의 사인으로 함께 하였다. 그러나 좌백련남(佐伯連男)은 대우황자의 명으로 축자에 가서 율외왕(栗隈王)의 군대를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신의 난 후 즉위한 천무천황은 소금하 좌백련광족(佐伯連廣足)에게 명하여 675년에 용전(龍田)에서 풍신(風神)을 제사지내게 하였다.
684년에 좌백련씨가 숙녜를 사성받은 후 광족은 685년 9월 15일에 직광사(直廣肆,율령제의 종5위하)로서 축자사자(筑紫使者)로 임명되었다. 그 후 지통천황 대에는 좌백숙녜대목이 직대이(直大貳, 율령제의 정2위)를 추증받았다. 『속일본기』에는 모두 52명의 좌백숙녜씨가 관인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가장 고위로 승진한 사람은 이다지(伊多智)로 768년에 우위사독으로 종4위상이었다.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일본문덕천황실록』에는 모두 18명의 좌백숙녜씨 출신 관인이 등장하고 있다.
좌백이라는 씨명은 좌백부의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좌백부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경행 51년 8월조에 보인다. 즉 경행천황의 아들 일본무존이 동쪽을 원정하여 포로로 잡은 하이(蝦夷)를 파마국(播磨國), 찬기국(讚岐國), 이예국(伊豫國), 안예국(安藝國), 아파국(阿波國)에 배치하였는데 이들이 좌백부의 조상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경행은 제12대 천황으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기원전 13년에서 130년까지 생존한 사람이며, 71년부터 130년까지 재위하였다고 한다. 일본무존은 경행의 아들로, 서쪽의 웅습(熊襲), 동쪽의 하이(蝦夷)를 평정한 전설의 인물이다. 이 좌백부 배치 기사는 왜국 정권이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복당한 사람들을 왜국의 지배 영역으로 옮겨 배치하였음을 말해 주는 전설적인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좌백부에 관한 기사가 웅략천황 즉위전기에 보인다. 형 안강천황(20대)이 사촌인 시변압반황자를 후사로 정하고 죽자, 웅략천황이 사냥으로 유인하여 시변압반황자와 그의 장내(帳內) 좌백부매륜(佐伯部賣輪, 仲手子라고도 표기함)을 죽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현종천황 즉위전기에도 안강천황 3년 10월에 현종천황의 아버지 시변압반황자가 사인(舍人) 좌백부중자(佐伯部仲子)와 함께 웅략천황에게 살해당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현종 원년 2월조에서는 현종천황이 아버지 시변압반황자의 유골을 수색하여 황자와 사인 좌백부중자의 유골이 섞여 있는 것을 발굴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현 5년 춘2월 정해삭 신묘조에서 널리 국군에 흩어져 있던 좌백부 중에서 좌백부중자의 후손을 찾아 좌백조(佐伯造)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5세기에 좌백부씨 중에서 왜왕 왕자의 사인으로 활약한 사람이 있었으며, 5세기 말에는 좌백부씨 중에서 좌백조를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좌백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민달 14년 3월 병술조에 보인다. 물부궁삭수옥대련(物部弓削守屋大連)이 소아마자대신 집에 마련한 불전과 불상을 불태우고 좌백조어실(佐伯造御室, 於閭礙)에게 명하여 선신(善信) 등의 비구니를 잡아오도록 하였다. 좌백조씨 중에서 유력자인 물부대련의 측근으로 활약한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좌백부를 직접 관할한 것이 좌백조이며, 좌백조를 관할한 것이 좌백련이었을 것이다. 좌백부 중에서는 중앙에서 궁문을 경비하고 호위하는 병사가 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거느린 사람이 좌백련이었다.
2. 대반숙녜동조(大伴宿禰同祖)
대반숙녜에 대해서는 앞의 「대반숙녜」 조 참조. 대반숙녜씨와 좌백숙녜씨의 조상이 같다는 것은 『만엽집』에서는 대반숙녜가지(大伴宿禰家持)가 노래(4094번가)에서 대반씨는 먼 조상 대구미주(大久米主; 오쿠메누시)가 대군의 곁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하여 깨끗한 이름을 전해 온 집안의 자손이며, 대반씨와 좌백씨는 이 선조의 이름이 끊이지 않도록 대군의 조정을 지키고 궁문을 경호하는 역할을 해온 집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반숙녜씨와 좌백숙녜씨가 대구미주의 후손으로서 함께 조정에서 군사적 업무를 담당해 온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공해(空海)의 『편조발휘성성령집(遍照發揮性性靈集)』 권3 「증반안찰평장사부륙부시병서(贈伴按察平章事赴陸府詩幷序)」 에서 ‘반좌곤계(伴佐昆季)’라고 썼다. 이는 대반씨와 좌백씨는 같은 선조를 가진 동붕(同朋)이라는 뜻이다.
3. 도신명(道臣命)
도신명에 대해서는 『고사기』 신무천황단에서 대반련 등의 조상 도신명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 신무 즉위전기 무오년 6월 정사조에서는 대반련의 원조(遠祖) 일신명(日臣命)이라고 적고, 일신명이 충성되고 용맹하여 길을 잘 인도하였으므로 신무천황이 도신(道臣)으로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도신명의 원래 이름이 일신명이었으나, 신무천황에게 도신명이라는 이름을 사여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위 기사에 이어서 같은 해 9월 무진조에서는 신무천황이 고황산령존을 제사지내면서 도신명을 재주(齋主)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계사삭조에서는 신무천황의 명으로 도신명이 팔십효수(八十梟帥)의 잔당을 섬멸하였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신무 원년 춘정월 경신삭조에서는 대반씨의 원조 도신명이 대래목부를 이끌고 밀책을 받들어 풍자하는 노래로 요기를 소탕하였다고 적고, 신무천황 2년 2월 을사조에서는 천황이 논공행상을 해서 도신명에게 택지를 사여하여 축판읍(築坂邑)에 거주하게 하고 특별히 총애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무천황을 도운 도신명의 활약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계체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즉 계체 21년(527) 추8월 신묘삭조에서는 “옛날에 도신(道臣)부터 실옥(室屋)에 이르기까지 임금[帝]을 도와 토벌하였다”라고 적고 있으며, 동 24년 2월 정미삭조에서는 신무천황과 숭신천황 때부터 박식한 신하들이 명철하게 보좌한 덕을 보았으며, 도신명(道臣命)이 의견을 말하여 신무천황이 융성하게 되었다고 계체천황이 말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어습유』에서는 신무천황이 동정(東征)하던 해에 대반씨의 원조 일신명이 원융(元戎)을 이끌고 흉거(兇渠)를 제거하여 천황을 도운 공적은 비견할 데가 없다고 적고 있다. 일신명이 내목부를 인솔하여 궁문을 지키며 문의 개폐를 관할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상 『고사기』, 『일본서기』, 『고어습유』에서는 도신명 또는 일신명이 대반련씨의 조상 또는 원조라고 적고 있다. 도신명이 좌백련씨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는 것은 『신찬성씨록』 의 이 조문이 유일하다.
4. 실옥대련공(室屋大連公)
실옥대련공을 도신명의 7대손이라고 하는 주장은 이 조문에만 보인다. 대반씨 계보인 『고옥가가보(古屋家家譜)』와 『반계도(伴系圖)』에서는 실옥대련공이 도신명의 8대손으로 나온다.
실옥대련공은 대반련실옥을 가리킨다. 대반련실옥은 『일본서기』 윤공 11년 3월 병오조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그는 윤공천황의 명으로 윤공천황의 비 의통랑희(衣通郞姬)를 위해 등원부(藤原部)를 설치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대반련실옥은 그 후 웅략천황 대에 대련(大連)이 된 후, 청녕, 현종, 무열 대에 대련을 역임하였다.
대반련실옥을 좌백련씨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찬성씨록』 의 이 조문이 처음이다. 그 후 『일본삼대실록』에서는 대반련실옥의 아들 어물숙녜를 좌백련씨의 조상으로 주장하고 있다. 즉 정관(貞觀) 3년(861) 11월 11일 신사조에서는 서박사(書博士) 정6위상 좌백직풍웅(佐伯直豐雄) 등 11명이 좌백숙녜를 사성받았는데, 그와 관련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즉 좌백련풍웅이 정6위하였던 시기에 자신의 선조가 실옥대련공의 맏아들 어물숙녜(御物宿禰)의 후손이며 윤공천황 대에 찬기국조(讚岐國造)였던 왜호련공(倭胡連公)이라고 말한 것을 정3위 행 중납언 겸 민부경 황태후궁대부 반숙녜선남이 청화천황에게 상주한 결과 좌백숙녜를 사성받게 된 것이었다.
어물숙녜를 좌백련씨의 조상으로 놓은 계보는 대반씨의 계보인 『고옥가가보』에도 보인다. 여기에서는 실옥대련공의 아들도 금촌대련공, 어물숙녜련공, 약고련공을 적고, 어물숙녜련공에 대해 ‘부좌백련성(負佐伯連姓)’이라고 하여 좌백련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어물숙녜련이 좌백련씨의 조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좌백숙녜(佐伯宿禰; 사헤키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