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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석상조신(石上朝臣; 이소카미노아소미)

석상조신(石上朝臣; 이소카미노아소미)
 신요속일명(神饒速日命; 가무니기하야히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주석】
1. 석상조신(石上朝臣)
석상(石上; 이소카미)이라는 씨명은 율령제의 대화국(大和國) 산변군(山邊郡) 석상향(石上鄕)과 관련이 있다. 이곳은 현재 나량현(奈良縣) 천리시(天理市) 포류정(布留町) 일대이다.
석상조신의 옛 씨성은 물부조신(物部朝臣)이다. 『일본서기』 천무 13년(684) 11월 갑술조에 의하면 물부련씨(物部連氏)는 다른 씨족들과 함께 새로 조신(朝臣)이라는 성을 사여받았다.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천손본기(天孫本紀)에 의하면 물부련씨는 물부조신을 사성받은 후 다시 천무천황에게 석상조신(石上朝臣)이라는 씨성을 사여받았다고 한다.
천무천황에게 새로 물부조신과 석상조신을 사성받은 물부련씨는 물부련마려(物部連麻呂)였다. 그는 『일본서기』 주조(朱鳥) 원년(686) 9월 을축조에서 천무천황이 죽은 후 빈궁(殯宮) 의식을 거행할 때 그는 직광삼(直廣參, 율령제의 5위하) 석상조신마려(石上朝臣麻呂)라는 이름으로 법관(法官, 율령제의 式部省)을 대표하여 조사를 읽었다. 그러나 지통천황 4년(690) 춘정월 무인삭조의 지통천황 즉위식에서는 물부마려조신(物部麻呂朝臣)이라는 이름으로 방패를 들었다. 이는 과거 즉위식 등의 전통적인 의식에서 물부씨가 봉사해 온 전통을 중시하여 앞서 석상조신으로 씨명이 바뀌었지만 물부라는 씨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그는 『속일본기』 양로 원년(717) 3월 계묘조에 실린 석상조신마려의 훙전(薨傳)에서는 그에 대해 “박뢰조창조정(泊瀨朝倉朝庭, 웅략천황)의 대련(大連)이었던 물부목(物部目; 모노노배노메)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석상조신씨 일족으로는 『속일본기』에 석상조신풍정(石上朝臣豐庭), 석상조신견남(石上朝臣堅男, 石上朝臣勝男), 석상조신을마려(石上朝臣乙麻呂), 석상조신제남(石上朝臣諸男), 석상조신국수(石上朝臣國守), 석상조신택사(石上朝臣宅嗣), 석상조신오계(石上朝臣奧繼), 석상조신사수(石上朝臣糸守), 석상조신동인(石上朝臣東人), 석상조신가성(石上朝臣家成), 석상조신지비호(石上朝臣志斐 ), 석상조신진족(石上朝臣眞足), 석상조신등능고(石上朝臣等能古), 석상조신계족(石上朝臣繼足), 석상조신을명(石上朝臣乙名), 석상조신진가(石上朝臣眞家) 등이 보인다. 『일본후기』에 석상조신택자(石上朝臣宅子), 석상조신미나마려(石上朝臣美奈麻呂)가 보이며, 『유취국사』에 석상조신수(石上朝臣雖), 『일본삼대실록』에 석상조신병송(石上朝臣竝松)이 보인다.
그런데 석상조신씨가 물부조신이라는 씨성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음은 석상조신택사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석상조신택사는 좌대신 석상조신마려의 손자이며, 중납언 석상을마려의 아들이었다. 771년에 광인천황 조정에서 중납언이 되었는데, 『속일본기』 보귀(寶龜) 6년(775) 12월 갑신조에서 광인천황이 중납언이며 종3위였던 석상조신택사의 청원을 받아들여 물부조신으로 씨성을 바꾸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보귀 10년(779)에 광인천황은 중납언이며 종3위인 물부조신택사에게 석상대조신(石上大朝臣)을 사성하였다.
2. 신요속일명(神饒速日命)
『일본서기』에서는 요속일(饒速日; 니기하야히), 요속일명(饒速日命; 니기하야히노미코토), 즐옥요속일명(櫛玉饒速日命; 구시타마니기하야히노미코토), 『고사기』에서는 이예속일명(邇藝速日命; 니기하야히노미코토),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에서는 요속일존(饒速日尊; 니기하야히노미코토), 『고어습유(古語拾遺)』에서는 요속일명(饒速日命; 니기하야히노미코토)으로 표기되고 있다.
『고사기』에서는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이예속일명이 알고 뒤쫓아 내려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신무천황 무오년 12월 계사삭 병신조에 의하면 물부씨의 시조 요속일명이 신무천황보다 먼저 대화(大和) 지방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는데, 이러한 전승이 물부씨가 대화정권에서 세력이 강했던 흠명천황 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서기』 신무천황 무오년 12월 계사삭 병신조에 의하면, 요속일명은 대화 지방에서 토착 수장 장수언(長髓彦; 나가스네비코)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세력을 길렀는데 신무천황이 구주를 출발하여 대판(大阪; 오사카)을 거쳐 대화 지방으로 들어오려 하자 장수언이 이를 막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요속일명은 신무천황이 천신의 자손이며 장수언의 성품이 비뚤어져서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고서, 장수언을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신무천황에게 귀순하였다. 신무천황도 요속일명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알고 총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의 물부씨 조상 요속일명에 관한 내용과 유사한 서술이 『선대구사본기』 천손본기와 『고어습유(古語拾遺)』 신무천황조에도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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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조신(石上朝臣; 이소카미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10_0110